예루살렘에서의 소요 (사도행전 21:17-36)

3차 전도여행을 마친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들어
오기 전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환난과 결박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많은 예언하는 사람들과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것이 계속 확
인이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너는 체포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 이런 결심을 하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여러분,
죽음이 결정된 사람은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죽음이 결정된 사람은 성공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습
니다. 건강해도 괜찮고 병들어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과 함께 담담하
게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을 하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기쁘게 환영을 합니다. 그다음날 그들
은 사도 바울을 그당시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소개를 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만
나서 3차 전도여행에 모든 성령께서 하신 일을 낱낱이 보고를 합니다. 그 내용이 17-19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을 생각을 해보십시오. 성령세례와 두란노 서원에서의 제자 양육이 그 특징입니다. 3
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올릴만한 일들
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밖에서 일어난 일들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현장들, 기적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예루살렘안에 있는
교회는 위축되어 있고 겁에 질려 있는 모습들을 오늘 보게 됩니다.

20절,
저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영광을 돌렸지만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수심에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사실, 그들은 그동안 핍박에 지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승전보를 듣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지만, 그러나 오늘 예루살렘 교회
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실을 보니까 마음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오순절날을 기해서 많
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는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믿는 유대인이 수만명이 모였다는 것입니
다. 이 사실은 유대 지도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을 만난 예루살렘
의 지도자들에게는 기쁨에 앞서 염려가 먼저 있었습니다.

21-22절,
(행21:22)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얼마나 이들이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볼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염
려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율법에 행위를 같이 따라야 한다는 강성 유대인이 예루
살렘에 수만명이 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바울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
다. 이사람들도 다 외국에서 왔습니다. 바울이 외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들과 부딛쳤습니다. 다시 말
할 때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배반한 자요 아이들에게 할례를 하지 못하도록 한자요, 율법의 규모를 지
키지 못하도록 한 자였다고 그들이 소문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비판한다고 해도 사도 바울이 없으면 괜찮겠는데 지금 그 자리에 사도 바울이 와 있
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모든 상황들이 이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순
절날 성령이 역사한 던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그때는 고난이 없었습니까?
그때는 핍박이 없었습니까? 그때는 역경이 없었습니까? 아니에요. 베드로는 감옥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유대인의 공격을 계속 되었습니다. 그럼 뭐가 다릅니까? 그떄는 충만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좌절감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을 때 처음에는 아주 열심히 예수를 믿습니다. 그때
문제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불가능이 없었습니까? 불가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신나고 재미있고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참 하다보니까 시련에
부딛치고 고난에 부딛치고 핍박에 부딛칩니다. 여기서 자꾸 좌절을 하고 절망을 하다보면 어려움을 겪
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 처음에는 그렇게 고난이 있었고 불가능이 있었고, 핍박이 있었고 어려
움이 있었지만 그것이 아무 문제 없이 해나갔는데 세월이 지나가다 보니까 이렇게 나약해지고 두려워
지고 사람이 무서워지고, 소요가 나타나는 것에는 겁을 먹는 이런 모습을 오늘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가던 때에 큰 풍랑과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배가 뒤집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떄 예수님이 파도위를 걸어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놀랐습니다.
주여 당신이 주시여든 나를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주님을 보는 순간에 예수님이 물위로  어오는 것
을 보는 순간에 베드로는 자기의 상식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다 잊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
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야 오라 말씀했습니다. 베드로는 정신없이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는 물위를 걷
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땅위를 걸어가
는 것이 아니라 물위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안되는 일들이 되고,
없는 일그들이 생기고 기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위를 걸아가고 있을 때 파도가
베드로의 뺨을 스쳤습니다. 이제 제정신이 듭니다. 드디어 이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상식으로 돌아 왔습
니다. 어떻게 될까요? 물에 빠지죠. 상식으로 돌아오면 물에 빠집니다. 베드로는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
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이성과 상식과 경험에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여
러분의 상식과 여러분의 이성과 여러분의 경험과 여러분이 계산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어찌 그
분이 하나님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기의 이성에 안잡혀서 하나님이 안계시다
고 말합니다. 자기의 상식에 안잡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나
님은 여러분의 이성을 초월하십니다. 지성을 넘어서는 분입니다. 여러분의 경험과 합리성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이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야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죠. 여러분이야 도
죄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같은 사람이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붙들어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께
서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 주시고 '어찌하여 의심하느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물위로
걸어가는 초자연적인 축복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나를 좌절시키고 절망시키고 우리의 신앙을 빼앗아가는 것들로 가득차 있
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는 것도 모르고 할 수 있는
것도 못하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무슨 말을 합니까?
23-24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한 대안을 제시를 합니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우리가 계획한대로, 우
리가 각본을 짠대로 이렇게좀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믿음이 없는 사람들, 두려움에 사로 잡
혀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서원한 사람이 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결례를 행하지 못하고 있다. 좋은 기회다. 네가 돈을 드려서 비용을 내서 이 사람들의 결례를 행하는
것을 도와 주어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소문이 헛소문이요, 또 당신이 율법을 배척하는
사람이 아니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소요를 피해 가자는 것입
니다. 질문을 합시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생각은 전략입니까? 신앙입니까? 신앙에서 나온 것
입니까? 하나의 상황적 전략입니까?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두려움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인간적인
하나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룻기를 읽어보면 베들레헴에 기근이 왔을 때 거기에 있지를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모압이란 ㄴ
곳으로 잠간 이주를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남편 죽고 두아들 죽습니다. 세 과부가 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집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ㅑ이 아
브라함에게 말씀했을 떄 그는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가보니 기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것은 애굽으로 잠간 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
주 멋진 아이디어 같습니다. 그,것은 이 상황을 이겨 낼 수 있는 생각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은 다릅니다. 결국 애굽으로 가다가 부인을 뺏길뻔 합니다.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고, 믿음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25절,
예루살렘 1차 모임에서 이것이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씁니
다. 결의한 내용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26절에서 다음과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26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바울은 그렇게 했습니다. 돈을 드려서 나실인의 서원에 모든 결례를 다행하게 했고 결례가 다 끝나
기까지 함께 있었고 도와 주었습니다.
잘문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전략입니까? 신앙입니까? 전략이 아니고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전에 그는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아는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체포될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이 두려워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오로지 한 관심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를 믿는을수만 있
다면 바울은 그쪽을 택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
것이 사도 바울의 철학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그런 형식이 사도 바울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만 믿을 수 있다면, 그들이 복음을 알 수만 있다면 사도 바울은 뭐든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롬 9:1-5에 보면 이런 고백이 절실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를 믿는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가? 이것이 사도 바울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심
지어 자기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나는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끝어질지
라도 원하는바로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무엇이 무서워서 그렇게 피하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사도
바울의 관심은 한 영혼이라도, 한 사람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나는 머리도 깎겠고 별별 짓을 다하겠
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도 다 먹겠고 어떤 음식도 다 안먹겠다. 우리는 여기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식이 너
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식을 위해서 너무나 왔다갔다합니다. 우리는 내 직장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교
회야 하나도 안중요합니다. 신앙. 아무데나 가서 하면 돼지뭐... 이렇게 신앙생활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
나님을 위하여 자기 같은 것, 대부분의 우리들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깁니다. 여기에 아주 결정적
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략이었든지, 신앙이었든지 결과는 실패였다는 것입니다. 그 소요를 막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는 독하게 믿어야합니다. 권면합니다. 독하게 믿어요. 타협하면서 믿지 마세요. 타협하면 편합니
다. 타협하면 모든 것이 쉽습니다.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비참해
집니다. 독하게 믿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습니다. 왜그렇게 촌스럽게 믿어야 하느냐? 술한잔도
먹고, (맥주가 술이냐) 이러면서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독하게 믿으세요. 주일을 2시간만 지키지 말
고 온전히 지키십시오. 갈데 다가고 그게 무슨 안식일입니까? 사업에 어떤 이익이 있어도 성수주일 하
십시오. 십일조하십시오.

27-29절,
선동한 내용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바로 이자가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대적한다다.
또하나는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감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한다. 이두번째 부분은 이스라엘백성
들을 감정으로 몰아넣기에 아주 알맞은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이런 말입니다. '누군가가
우리 조상의 묘를 팠다.' 성전을 범했다는 개념은 아버지  묘를 팠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모두
화가 났습니다.
사실 그것은 29절에 나오는대로 상황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예수님 때
문에 무슨 어려움을 겪었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무슨 고생을 했습니까? 내
가 무슨 헌신을 했습니까? 내가 무슨 희생을 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매를 맞고 기절하고, 좇겨다니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당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입니까? 장가도 못가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인자에게는 머리 둘곳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에게 남겨진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행복하고 모든 것이 부요한 것이 축복입니까? 그
런 기준이라면 바울과 예수님은 어디에 두어야합니까? 한 번도 그는 따뜻한 방에서 잔 적이 없습니다.

30-32절,
계속 바울을 치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잡아다가 영문밖으로 데려다가 문을 닫고 사람들이 몰매를
친 것입니다. 이 소문이 로마의 군대까지 들렸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교인들은 다 어디간거에요?) 바울
은 죽기까지 맞았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해서 오해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손해본적이 있습니까? 억울한 일 당한 적이 있습니까? 복음이 있었기 떄문에 그는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뺨을 치면 한 대 더 때려라. 그리스도인들은 희생을 당하고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보상이
없습니다.

33절,
천부장이 사도 바울을 결박을 했습니다. 드디어 결박을 했습니다. 이 결박은 로마로 가는 결박입니
다. 하나님의 예언이 응답되는 결박입니다. 고난이라고 다 고난이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망한 것이 축복일 수가 있습니다. 안망했더라면 큰일날뻔했어요. 어떤 경우에는 그
런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병든게 얼마나 감사한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환점일 수 있기 때
문에. 바울은 결박을 당했습니다. 결박을 당했기 때문에 그 폭도들 앞에서 보호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
다. 돈도 안줬는데 와서 지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재미있는 것은 로마를 가는데 돈없이 가는겁
니다. 배값도 안내고.
'너는 누구냐? 어떤 일로 이렇게 하고 있느냐?' 묻지만 어떤 사람은 이 말로, 어떤 사람은 저 말로,
횡설수설을 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죄가 없으니까. 그런데 죄가 없는데 사건이 생겨요. 잘못 안했는
데도 사건이 생기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이 죄를 지어 매를 맞으면 맞아 싸지요. 그런데 그러지 않는데도 고난이 올 수가 있어요. 바
울의 생애는 하나님이 함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시고, 손해가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병듦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하게 하소서. 우리의 몸도 마음도, 우리의 삶 전체도 드려지는 아름다운 축복이 있
게 하소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