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삶 (눅14:1-1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그들의 신앙 문제를 지적하시며 그리스도인의 삶
의 자세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첫째, 병든 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1-6)
2. 둘째, 낮은 자리를 택하라(7-11)
3. 셋째, 낮은 사람을 청하라(12-14)

Ⅰ.병든 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1-6)

한 바리새인의 두령이 안식일 만찬에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두령(헬, 아르곤)은 "지도자"란 의미입니다.  이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 중의 한 사람으
로 바리새인 가운데 상당한 지위를 가진 지도급 인물이었습니다.  이가 안식일에 예수님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랍비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안식일에 손님 접대하기를 가르쳤고 그것을 종교적인 의무로
생각했습니다.(느8:9-12)   그래서 호화로운 식탁을 보면 "안식일 식탁 같다"라는 격언까지
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초대되어 식사하신 것이 이번까지 세 번 되겠습니다.
7:36절, 11:37절에 나옵니다만, 이렇게 예수님을 초대해서 식사를 하러 들러가셨을 때에 바
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엿보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나 안고치나를 엿보았습니
다.  이는 주의 앞에 고창병 든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연회에는 랍비들이 와서 강연을 한다든지 좌담을 하게 되면 누구든지 안
뜰에 들어와서 그것을 청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은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을 가능성이 있
습니다.  그들 중에 고창병(蠱脹炳) 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창 병이란 의학 용어로서 과도한 수분이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입니다.  이를 다른
마로 수종병(水腫炳, dropsy) 이라고 합니다.  이런 병은 특히 신장이 나쁠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병에 걸리면 간, 혈액, 심장에 나쁜 영향을 주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당시 의학으로서는 이런 병은 불치의 병이었으며 병자는 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볼 때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엿보며 노려
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
물론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을 했습
니다.  안식일에는 응급 처치만 해 주고 치료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그들의 의견이
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그것이 과연 모세의 율법에 합당한가
(lawful) 아니한가(unlawful) 율법의 근본 정신에 입각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잠잠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권위자로 자처했지만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창병 든 자를 데려다가 고쳐 보내셨습니다.  이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속으로 판단하고 있
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보니 "이단이다"   또, "율법을 어겼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
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유대에서는 뚜껑을 덮지 않은 우물이 흔히 있어서 아이들이나, 짐승들이 빠지는 경우가 종
종 있었습니다.(출21:33)  이런 경우에는 안식일이니까 건져서는 안된다든지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선 빠진 사람이나 짐승
을 건져 놓고 보아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살리는 것이 법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온 몸에 물이 가득 차서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를 고쳐 주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주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고통을 보시고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아들과 같이 불쌍히 여기시고 고
쳐 주신 것입니다.  법보다 생명이 귀합니다.
어떤 규칙 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이런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기고 양 떼를 살펴야 하겠습니다만, 율법
에 메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들이 물에 빠진 것 같이, 당
신의 양이 우물에 빠진 것 같은 심정으로 건져 주셨습니다.
이 자비하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이 믿는 주님이십니다.

하와이 군도 중의 한 섬인 몰로카이 섬은 우리 나라 소록도와 같이 문둥 병자들만 모여
살던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어느 날 멀리 벨기에로부터 다니엔이라는 신부가 그 섬에 찾아
와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온 몸이 썩어져 가는 문둥 병자들 앞에 서서 복음을 전
할 때에 문둥 병자들은 그를 비웃으면서 "자신은 건강한 몸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
만 만약 우리들처럼 이렇게 병들고 어려운 처지가 된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고 조
롱을 했습니다.  아무리 말하여도 먹혀들지를 않고 전도의 문은 막혔습니다.  고민에 쌓인
다니엔은 일상 재단 앞에 나아가 자신에게 문둥병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
부터는 다니엔에게 감각이 점차로 무디어지고 눈썹이 빠지고 관절이 오그라들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문둥 병자의 모습으로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하고 그들 앞에선 다니엔 신부
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동료 여러분! 그리스도는 문둥 병에 걸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모든 문둥 병자들은 큰 감동을 받으며 주께로 돌아 왔습니다.

여기 고창병을 고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와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이 사람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 주셨습니
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편이십니다.

Ⅱ.낮은 자리를 택하라(7-11)

고창 병자를 고치신 일은 식사 이전이었고, 그 후 곧 식사가 시작되어 손님들은 다투어 상
좌를 택하였습니다.  이를 보시면서 예수께서는 낮은 자리를 택할 것을 교훈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식탁은 U자 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 가운데가 상석입니다.  그리고
양쪽 끝으로 갈 수록 말석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 바리새인들은 서로 상석에
앉고자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상석에 앉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위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말석에 앉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볼 것만 같았습니다.  또, 자기가 상좌에 앉아 있어야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며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높은 자리에 앉아서 어
깨에 힘을 주고 헛기침을 하고 허세를 부린다면 얼마나 가관이겠습니까?   대단한 손님이
아닌 사람이 잔치에 일찍 와서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귀한 손님이 그 후에 오게 되어 상
석을 차지했던 사람이 아래 자리로 내려앉으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매우 난처한 처지가 되
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만일 어떤 사람이 말석에 앉아 있는데 그 후에 더 좋은 자리로 올
라가겠금 권고함을 받게 된다면 그 겸양의 덕으로 그는 점점 더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언제나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는 미덕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 문제는 바리새인들만이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
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며 다투고 변론을 했습니다.(9:46)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치마 바람을 일으키며 예수님의 좌우 편 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마
20:10,21)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열 제자들은 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분을 내었습니다.
(막10;41)  이들은 식사시간에 누가 예수님께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을 것인가로 신경전을 벌
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요한이 항상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식사한 것을 보면 요한이 가
장 약삭빨랐던 것 같습니다.(요13:23)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
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8절)  만약 상석에 앉았다가 말석으로 밀리면 이보
다 더 부끄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차라리 청함을 받았을 때에 가서 말석에 앉으라.  말석에 앉았다가 청한 자가 와
서 높은 자리에 올라 앉으라 할 때 얼마나 남들에게 영광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석에 앉아 있으면 더 이상 내려 갈 고시 없으니 불안하지 않습니다.  마음
이 편안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낮은 자리를 택하는 것은 편안함의 지름
길입니다.  행복을 찾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무릇 자기를 높이
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젊은 날에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서기를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겸손한 종이 되어 베드로전서 5:5-6절에 "젊은 자들
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니느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노이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그의 인격을 무시하게 됩니다.  글 앞에
서는 존경하는 것 같이 하지만 속으로는 "별 것도 아닌 것이" 하며 욕을 합니다.  그러나 자
기를 낮추고 겸손한 사람은 마음으로 존경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자기를 낮추
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① 첫째,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빌립보 2:3-4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나세 여기고" 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생활이 자기를 낮추는 생
활입니다.  

② 둘째, 구속의 은혜와 사랑을 충만이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으로는 낮출
수 없습니다.  겸손해지려고 하면 할 수록 교만이 오뚝이처럼 살아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겸손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구속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비천한 구유에까지 낮아지
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히 죄인을 섬기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을 덧입어야 합니다.  이런 구속의 사랑을 덧입으면 사회적인 지위,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겸손히 낮추며 섬길 수 있습니다.  

가수 김 수희가 부른 "애모"라는 대중가요 가사 중에 "그대 앞에만 서며 왜 나는 작아지는
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 드는데" 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한갓 세
상의 살아 때문에 그 앞에서 낮아지고 그 뒤에서 눈시울을 적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
도인은 주님의 충만하신 구속의 은혜를 덧입을 때 자기를 낮추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③셋째,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소원만 간절할 때 자기를 낮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높은 자리를 탐하게 됩니다.  또, 사람들의
영광을 구할 때 내용도 없이 폼을 잡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
원이 간절할 때 상석에 앉는가 말석에 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석에 앉는 것이 하나
님께 영광 된다면 상석에 앉을 수 있고 또 말석에 앉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된다면 말
석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살 때
상석을 탐하는 마음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을 낮추는 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살펴보았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집니다."(11)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물리치십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고 때
가 되면 높여 주십니다.
구약에 사울이 행구 사이에 숨을 만큼 겸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초대 왕
으로 높이셨습니다.  
그가 교만하여졌을 때, 가장 비굴한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겸손하여 삼
하 7:18절 "여호와여 나는 누구 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를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
며 겸손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목자요, 주권자로 높이셨습니다.  음악가로, 시
인으로, 장군으로 세우셨습니다.

Ⅲ.낮은 사람을 청하라(12-14)

예수님은 자기를 청해 식사를 대접하는 바리새인의 한 두령에게 이렇게 충고를 하셨습니
다.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하셨
습니다.(12)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너를 도로 청하여 갚음이 될까 하노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집에 여러 번 초대를 받으셨습니다.(7:36, 11:37, 14:1)  그런데 이
들이 사람을 초청하는 마음의 동기가 너무나 이기적이라는 사실과 또 보상 심리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
라 자기에게 돌아올 가치를 먼저 계산하고 사람을 초대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가를 바라
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 든지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한다면 그것
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초대 식사 대접이 아닙니다.
또, 그가 도로 청하여 사랑의 빚을 갚아 버린다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賞)이 없어집니
다.
당시 식사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나중에 거기에 상응(相應)하는 식사를 초대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식사에 초대한 사람도 당연히 그 보상을 바
라면서 식사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이쪽이 한 번 사면 저쪽이 한 번 사는 것이 당시의 예의
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시고 오늘 12절의 말씀을 한 것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
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그러므로 대접하려면,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거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이 부활 시에 네게 갚음을 받겠음이니라"(13,14) 하
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베풀고 이 땅에서 갚음을 받아 버리면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이 없어집니
다.  그러므로 되돌려 갚음을 받지 못할 자리에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성령이 말
씀한 말씀을 우리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되돌려 받을 수 없는 고세 할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기를 택한 것도 하나
님의 상급을 바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히11:24-26)
사도 바울도 온 생애를 받쳐 양 떼를 섬기며 세계 선교 역사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부
르심에 상을 바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빌2:14)
하나님께서 반듯이 보상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부활 신앙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생뿐이라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겠다고 고린도전서 15:3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고후 5:10절 "우리가 다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이 부활 시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반듯이 의의 부활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많은 수고를 하고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더라도 조금도 낙심할 필요가 없
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다 아시고 부활 시에 다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바리새인을 목자의 심정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가장 큰 문제는 ?
① 첫째, 율법적인 마음이요, 사랑이 없었습니다.
② 둘째, 자기 영광만 찾아 구하는 자였습니다.
③ 셋째, 이기심과 보상 심리로 가득했습니다.
이 문제는 비단 바리새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요,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누
구에게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 율법적인 마음과 사람의 영광만 구하고 나의 이익만 구하는
마음을 버리기 위해 진실하게 진리를 붙잡고 투쟁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덧입고 겸손히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종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