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릭스 앞에서의 바울의 재판 (사도행전 24:1-27 )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이샤랴로 호송이 됩니다.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벨릭스 총독에게로 호송이 된 바울은 거기서 3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먼저
는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벨릭스의 후임인 베스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일이고, 세 번째는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는 일입니다. 오늘 읽은 24장
은 벨릭스 총독에게 재판을 받던 기록이고, 25장은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는 재판기록이
고, 26장은 아그립바 왕에게 재판을 받는 기록이 되겠습니다.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아
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재판 과정에서 2년동안 감옥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
도 바울은 다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핍박과
고난과 역경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 돌에 맞고, 쫒겨다니고, 강의 위험과 강도
의 위험과 정말 수없는 많은 일들을 배웁니다. 그러나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는 이 시
간은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휴식과 기다림과 인내를 배워야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1절부터 재판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옮겨 가는 중에 40명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
패를 하고만 대제사장과 장로 무리들은 가이사랴까지 와서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
소하면서 재판을 합니다. 이때 더둘로라고 하는 말을 대신하는 변론사까지 대동합니다.
요즘의 변호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더둘로가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3가지로 고소를
하면서 아첨을 합니다.

2-4절,
3가지 죄목으로 고소를 합니다. 첫째는 유대인을 소요케했다는 죄목입니다. 두 번째
는 바울이 바로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고소를 합니다. 세 번째는 바울이 성전을 모독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5-9까지 나와 있습니다.
아마 이 세가지 중에서 로마 사람들을 거스렸던 말은 소요를 일으켰다는 말일 것입
니다. 정치적으로 소요가 일어나면 불안하기 때문에.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죄목
은 성전을 모독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변론사 더둘로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염병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전염병을 가진 사람처럼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한
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전염병을 가진 사람들입
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영향력을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
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곳을 가든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더둘로의 변론에 대하여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말할 기회를 줍니다. 당신도
당신 자신을 변호해 보십시오. 10-13절이 바울이 변론하는 내용입니다.
세가지를 이 부분에서 배울 수가 있는데 더둘로의 말과 사도 바울의 말이 좀 다르다
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벨릭스에게 하는 말이 틀립니다. 재판장에서는 재판장에게 존
경하는 말을 씁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런데 3절에 보니까 더둘로의 말을 보십시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
나이다'
그냥 존경하는 재판장님 대신에 굉장히 아첨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이 재판장을 부를 때 재판장으로서의 예의와 존경을 표시하지만 더둘로와는 다
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세요.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
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시편 12:3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사람은 언제나 말에 과장이 있고 거짓된 아첨이 있습
니다. 진실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한 언어를 씁니다.

다음으로 더둘로의 고소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바울이 아주 논리적으로 제시
를 하고 있습니다. 10-13에 보면 '당신이 아시듯이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온지가 열흘밖
에  안됐다는 것입니다. 또 성전에서 내가 변론한 것을 누구도 본 일이 없다는 거에요.
누구와도 변론을 안했기 때문에. 회당에서도 내가 당신들이 고소하는 것처럼 소요를 일
으키고 변론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증거가 실제로 그 사람들이 내놓은 것이 없습니다.
실제로 없으니까. 이렇게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딱잘라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또 좋은 점은 자기가 한 것은 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세가지를 그가 인정을 합니다. 나는 내 조상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 말은 했다는
거에요. 나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 다시 말하면 구약의 성경을 믿는다. 세번째 나는 의
인과 악인이 부활할 것을 믿는다. 라고 선언을 합니다. (14-15)
사도 바울의 고백은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이렇게 믿습니다. 그
들은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믿고 부활을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죄가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천부장도 그 유대인들의 소요 속에서 바울을 뽑아 내었을 때 아무리
바울을 조사해 봐야 바울에게서 체포할 만한, 그리고 감금할 만한 죄를 발견하지 못했
던 것이죠. 그러나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470명의 군인으로
가이사랴로 호송을 시켰던 것이 바로 바울의 죄목이 뚜렷하게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
니다. 사도 바울은 법정에서 '예스'와 '노'를 아주 분명하게 했습니다.

세 번째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6절입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낀 것이 없다'
자기가 재판 앞에 섰는데 거짓말을 하거나 상황을 좀 바꾸거나 이러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서 말을 바꿉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아닌 것을 그렇다고 말하고, 그런 것을 아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거짓말을 하면 그 순간은 피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은 피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순간을 피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하여 순간의 거짓
말과 아첨과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자기가 던진 그물에 자기가 걸
립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주장한 최후의 보루를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양
심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양심에 있어서 시꺼먼 양심. 어떤 사람은 양심을 부
인한테 맡기고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다시 양심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에서는 양심을 가지고는 살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사는 것은 어
렵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 없기를...'

사실은 우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
에서 부끄러움 없다는 말처럼 부러운 말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우리 모두가 부끄럽게
살고 있기 때문에. 큰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작은 거짓말은 하고 살고, 큰 강도는 아니
지만 작은 것들은 사기를 하며 살고 있어요.
죄라고 하는 것은 들킨 죄가 있고, 안들킨 죄가 있지요.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들
킨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안들킨 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
분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 아니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교도소 안갈 사람이 있어요?
다 우리는 뭔가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요.
사도 바울은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자기의
재판에, 자기의 말에 최후의 보루는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비슷한 말을 로마서
9:1-2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정말 내가 이스
라엘을 사랑하는 지 이건 성령님이 아시고 내 양심이 안다.'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한다고는 하지만 그는 언제나 떳떳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
울이 왜 위대한지 아세요? 그가 남달리 열심히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는 정말 열심히 복
음을 전했어요. 그리고 그는 떳떳했어요. 왜 우리는 힘이 없는가? 떳떳한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세상 앞에서 좀 떳떳했다면. 우리는 적당하게
많은 것들과 타협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힘없게 만듭니다. '세상 살면 다 그렇고 그런
거다' 하면서 타협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자기가 더 많은 형을 받
을 수 있을지 몰라도 떳떳하게, 공명정대하게 내가 양심에 부끄럼 없이 산다고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언제나 공명정대 했습니다. 숨기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국에서 한 일을 낱낱이 말합니다. 해외에서 성도들의 구제금을 가지고
돌아온 것과 자기가 결례를 드린 것과 이런 것을 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
못한 일이 있다면 부활을 믿는다고 말한 것뿐이다.

21절,
얼마나 그가 공명정대하게 살았는지 보여줍니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은 잠을 잘 못잡
니다. 괴롭기 때문에. 떳떳한 사람이 힘이 있습니다.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
인들이 많이 생겼을 때 세상은 변합니다. 벨릭스 총독은 그런 재판을 맡은 총도이었지
만 바울의 그 진실에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천부장이 쓴 편지의 내용과 벨릭스가
직접 재판을 해 보니까 바울이 한 말과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
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정직이 이긴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거짓은 순간을 이깁니다. 그러나 정직은
끝을 이깁니다. 오늘 이 벨릭스가 마지막 판결을 내립니다.

22-23절,
바울에 관한 재판은 3심입니다. 3번 재판을 하는데 1심에 결론은 유예입니다. 결정을
안내리고 천부장이 예루살렘에서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재판이 끝
났는데 바울에게는 2가지의 축복이 안겨졌습니다. 먼저는 바울에게 '무죄요' 결정이 났
다면 바울에게는 살해의 위험이 있습니다. 40명이라는 사람이 먹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
습니다. 만약에 감옥 밖으로 나오면 언제 살해를 당할지 모릅니다. 형을 결정받지 않고
감옥에 있는 것은 바울 자신이 살해위험으로부터 보장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벨릭스가 '바울은 보류다' 이렇게 명령하면서 '너희는 바울을 잘 지
켜라' 하면서 무엇을 주라고 했어요. '자유'를 주라고 했고, 친구를 마음대로 사귀게 해
라. 그러니까 바울은 보호를 받으면서도 그 보호 아래서 자유도 누리고 복음도 전하는
그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고생을 하던 바울이 감옥에 들어간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
르겠어요. 2년동안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복음도 전하고.

24-25절을 보세요.
재판을 맡았던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 죄수
는 떳떳해요. 교만한 게 아니라, 굉장히 자신감이 있어요. 이 모습에 벨릭스 총독은 감
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불러내요. 자기 부인과 함께. 그리고 '네가
믿는 것을 얘기좀 해봐라.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드느냐.'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
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정직과 담대함.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벨릭스 총독에게 3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의에 대
해서, 절제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을 듣고 벨릭스가 겁을 먹었습니다.
두려워해요. 왜그래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사람이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
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누구냐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26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총독이 바울의 인격에 감화를 받았지만 어
떻게 하면 돈을 받을까, 혹시 자기에게 돈좀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해서 바울을 자주 불
렀습니다. 현대의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때의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이 총독에게는 두가지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신앙적 관심이 있었고, 돈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관심 아닙니까? 돈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이것이 지금 우리
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엄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여러분, 둘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넘어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 믿겠다는 거 아니에요. 교회 안다닌다는거 아니에요. 그런데 결
정적인 순간에는 돈을 벌고 교회를 가겠다는 거지요. 다하고 시간 남으면 교회 다닌다
는거지요. 그리고는 암에 걸렸을 때에야 '그때 잘할걸' 그러나 소용없습니다. 좋은 시간
은 나를 위해 다 쓰고, 마지막 헌 시간은 주앞에 드립니다. 이런 소리죠.

27절,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소요가 무서워서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계속 보류를 하
는 것입니다. 2년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벨릭스가 이 재판을 못하고 후임인 베스도가 이
재판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떠나지만 하나님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재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30년전의 재벌이 어디있습니까? 영원하지 않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만이 영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
들에게도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바꾸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남은 시간, 떳떳하게 사
십시오.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사십시오. 부인 앞에 떳떳하십시오. 남편 앞에서도 떳떳
하십시오. 교회에서도 떳떳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영원히 그사람에게 함께 있을 것
입니다.

[짧은 세상을 사는데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이 없게 살게 하옵소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