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5:2-4

크로스비 여사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로 인해 하나님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그녀의 친구가 크로스비 여사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그처럼 많은 재능을 주셨으면서도 왜 너를 시각장애인이 되게 하셨을까? 네 눈을 보면 언제나 안쓰럽구나." 이 말을 들은 크로스비 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태어나는 순간에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시각장애인이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야. 그래야 천국에 가서 뜬 눈으로 내가 처음 보게 될 분이 바로 예수님이 되지 않겠어?"

이처럼 위대한 신앙을 소유한 그녀는 무려 2,000여곡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그녀가 작사한 곡이 무려 24편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했던 그녀이지만 결코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눈을 활짝 뜨고 늘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할 뿐이었습니다. 크로스비 여사를 생각하면 정상적인 두 눈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진짜 시각장애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제각기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한 시인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라고 노래하며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3,4)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아니더라도 온 피조물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행사를 드러내며 그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조물 가운데 으뜸으로 지어놓으신 인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고 또 하나님을 믿기는 하더라도 오히려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더욱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고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건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목적을 벗어나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새롭게 된 피조물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려드리지 못하고 자기의 안위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그려 놓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의 목적을 회복하고 크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삶의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1. 거룩하고 성결한 자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면 마치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대합창의 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수많은 영적 승리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다를 건넌 후에 모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듯이(출15장) 천상의 합창이 하나님의 위대한 행사를 높이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2절)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리바다"는 구약 시대에 제사드릴 때 솔로몬 성전 번제단 앞에 놓여있는 놋으로 된 물두멍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물두멍은 "바다" 혹은 "대야"라고 불렀는데 직경이 무려 4,5m 그리고 높이가 2,3m나 되어서 이를 바다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이 물두멍은 당시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잡고난 후 몸이나 옷에 묻은 피를 씻고 지성소에 출입할 때 자신의 몸이 청결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했던 성구였습니다.

그러므로 천상에서 부르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찬양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거룩하고 성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그 분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먼저 거룩하고 성결해야만 합니다. 구약 시대에 지성소에 들어간 제사장이 만일 물두멍을 통해 자신을 정결케 하지 않고 부정한 모습으로 들어갔다면 그는 바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삶에서는 거룩하고 성결함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도 인간이 스스로 거룩할 수 없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이처럼 죄로 인해 오염된 인간의 본성은 결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거룩하고 성결하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르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1:25)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한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순간에 일어나는 일회적 사건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게 된 우리들도 날마다 자신을 돌이켜보며 자신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끊임없이 성결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날마다 새로운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순결하고 거룩한 사람들의 찬양을 주님께서는 받아주십니다. 흠없고 순전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
다.

2.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전쟁에 승리하면 패전국의 노예를 하나 선택해서 3일 동안 왕위에 앉히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노예에게 왕복을 입히고 그가 원하는 모든 쾌락을 즐기게 합니다. 하지만 3일이 지나고 나면 그는 왕복을 벗고 제단에 바쳐지는 인신 제물이 된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생의 결국은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당장에는 권력이나 돈 그리고 명예와 인기 등이 좋고 부럽기만 합니다. 때론 이것들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신앙도 양심도 인격도 팔아버린 채 그것들을 탐닉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시대는 물론 상대적 빈곤은 있지만 경제적 풍요로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쾌락 속에 침잠되고 있습니다. 물질적 부요로 인해 영적 무력감에 빠졌고 여러 가지 현대판 우상 종교에 의해서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이런 불신앙의 풍조와 맞서 싸워 이겨나가는 영혼을 더럽히지 않은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들의 찬양을 받으시며 하늘나라는 이처럼 승리한 자들의 찬양 소리로 가득찬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여선 성도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2절)를 이기고 벗어난 승리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그의 우상"은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 세워진 각종 제단이나 동상을 "그의 이름의 수"란 적그리스도의 동의어로서 적그리스도가 행하는 각종 비신앙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은 당시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시대의 심각한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등장한 승리자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순교의 형틀에 매달린 순교자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켜냈던 그들이 바로 승리자들이었고 그들의 찬양이 하늘나라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을 본문 말씀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신앙의 문제로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끼거나 소외되는 경험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혹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당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찬양은 환난을 이겨낸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많은 유혹이 몰려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찬양은 부정한 사람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거룩한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성도들의 찬양이 승리의 개선 행진곡이 되기를 원합니다. 거룩한 천상의 노래가 되기를 원합니다.

로마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황제의 정예 부대 안에도 그리스도인이 많이 생겼다는 보고가 네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네로는 부대의 지휘관에게 "그리스도인을 색출하여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지휘관은 그 부대의 군사 중 그리스도인은 모두 모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지휘관 앞에 선 병사는 모두 40명이나 되었습니다. 모인 병사들에게 지휘관은 "그리스도인은 모두 죽이라는 황제의 분부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신앙을 버리는 자는 살려 준다."고 마지막 통첩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죽음의 형벌을 받기 위해 알몸으로 꽁꽁 얼어붙은 호수위에 세워졌습니다. 추운 겨울 살을 에이는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놀랍게도 그들은 그 곳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찬양 소리는 얼어붙은 호숫가 전체에 울려퍼져 나갔습니다. 한편, 호수 가까운 곳에는 천막이 쳐졌고, 그 안에 더운물이 가득 담긴 목욕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는 신앙을 포기하는 자를 살려 주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40명의 병사들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만 더욱 드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병사가 호수 위를 가로질러 천막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드디어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 뜨거운 목욕통에 몸을 담갔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비명을 지르더니 곧 눈을 감고 말았다. 얼었던 몸을 뜨거운 물에 담근 결과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지휘관은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갑자기 병사들이 서 있는 호수 위 하늘에서 40명의 천사가 40개의 면류관을 들고 춤을 추다가, 그 중 한 천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지휘관은 천천히 투구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용감하게 호수의 얼음 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을 버린 병사의 죽음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했으며, 그가 버린 면류관을 대신 받고자 죽음의 길로 나갔던 것이다. 하나님 찬양은 이와 같습니다. 순교의 각오를 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켜가는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바로 찬양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나오는 "두려워하다"라는 말은 경배한다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외"라는 말이 두려움과 공경심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본문의 "두려워하다"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이 말은 당시의 정황을 염두에 둘 때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지던 당시는 로마의 황제숭배가 극도에 달했고 이교도의 박해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현장에서 목숨을 잃어야하는 때였습니다. 어제 함께 했던 성도들이 오늘 아침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하는 극도의 긴장이 교회 공동체를 뒤흔들어놓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정말 목숨을 내건 순교의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로마의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참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려워하다"라는 단어는 이처럼 눈에 보이는 로마의 칼과 권력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비록 오늘 나에게 박해자의 칼이 임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사람이 갖는 신앙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자신들의 육신의 생명을 해하는 자보다 오히려 몸과 영혼의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그들이었기에 순교의 현장에서까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전7:1) 이 말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그 모든 박해자보다 크고 전능하신 분입니다. 인류 역사에 등장하였던 모든 그리스도교 박해자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저주받은 이름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보존하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오늘 여기서 부르는 우리의 찬양은 언젠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부를 우리의 찬양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직 어린 양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실하고 정결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