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9:1-8


'역사의 주인' 과 '역사의 주인공'

주인공이란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사건이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의 주역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역사의 주인' 과 '역사의 주인공' 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언제나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사건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반드시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영화에는 돈을 투자해서 영화를 만들어서 돈을 버는 주인이 있고, 그 다음에는 영화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주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연을 돕는 조연이 있고, 엑스트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영화 줄거리가 전개되어 나가려면 이 모든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입니다. 인생 드라마의 주인은 하나님이 분명하지만 인생역사의 드라마의 중심인물인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인생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거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외적인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물은 배만 부르면 되지만 인간은 배부르면서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동물은 좋은 여건에서 충분히 행복하지만 우리 인간은 아무리 좋은 여건에서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자본, 지식, 기술, 건강, 심지어는 건강까지도 결코 행복의 여건이 아닙니다. 여러분, 병들었다고 불행하고 건강하다고 모두 행복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복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인간만이 행복할 수 있는 복,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복, 우리 영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모르는 동안은 그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복 받을 그릇의 문제입니다. 온 우주에 축복과 은혜로 가득 차 있다하더라도 내 그릇이 문제입니다. 태평양 바다에 떠 있는 물병에 병마개가 꼭 막혀있는 동안은 그 병 속에 물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어떤 복이 우리에게 있다하더라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그는 그 복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유명한 사회학자인 커밍 웍(Cuming Walk)의 아주 명언이 있습니다.“현대인이 성공하려면 지능과 지식과 기술이 있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네 번째 '태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세가 문제입니다. 외적인 문제가 아니고 내적, 나 자신의 삶의 자세, 그것이 성공여부를 좌우한다고 사회학자의 양심으로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얼마나 환경을 원망하며 살아왔습니까? 이제부터 행복이나 불행은 나의 삶의 자세에 있습니다. 의식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또 하나는 이미 주어진 복을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복의 여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문제는 복된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러am로 사람은 한평생 복을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이 복인가, 친구가 복인가, 사랑이 복인가, 뭐 혹은 많은 재산이 복인가, 명예가 복인가,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고, 그 많은 세월동안 참 복이 무엇인지 그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한평생 복된 사람으로 양육되는 것입니다. 복 받을 만한 성품, 복 받을 만한 인격, 복 받을 만한 심력, 마음가짐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한평생 공부하고 그렇게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평생 복된 사람으로 다듬어 지고 양육되어 가는 과정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평생 우리는 더 나은 복, 더 영원한 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심의 장막을 걷고 자신의 잠재력을 믿으라.

어떤 회사에 근무하던 20대 자매가 있었는데 그녀는 교양이 있고, 얌전하고 착했으며, 밉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별로 말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잘 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 달 휴가를 내고 난 후 회사에 출근했는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외적인 모습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런 성품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명랑하고 자신감이 가득하고 친구들이나 이웃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얼굴에 수심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가 변화가 왔는지 알고 싶어 했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그의 존경하는 사람에게 변화의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이유인즉 그녀는 오랫동안 자기 코가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미운 자화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본다고 생각하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쌓여 생활했습니다. 자기는 코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롱! 감이 되고 애인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우울하고 사람을 피하고 근심어린 얼굴로 지냈습니다. 결국 그녀는 돈을 모으고 휴가를 얻어 성형외과에 가서 코 수술을 받고 마음에 드는 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자화상이 확 달라졌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예쁘고 사랑스런 자기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말에는 번영하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흥하기도 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가능성과 놀라운 잠재력, 창조적 아이디어, 꿈으로 가득한‘씨앗’을 우리 안에 뿌리셨습니다. 하지만 좋은 씨앗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으란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의심의 장막을 걷고 자신의 잠재력을 믿으십시오.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로 위대한 일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뛰어난 존재로 만드시고 능력과 재능과 지혜에다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하나님이 주신 운명을 완성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범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하나님은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보면 이 구절은 과거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미 복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공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 안에 넣어 두셨습니다. 이미 소유한 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우리 몫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만국의 아버지로 만들었다.”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기로 선택했습니다.“하나님, 제 생각으론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머리로 따지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저와 사라가 이 나이에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믿겠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도 과거시제였습니다. 실제로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만국의 아버지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때가 돼서야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으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아들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할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자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고 이삭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우리에게도 놀라운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 ? 이런 복이 저절로 굴러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 다. 복 받을 줄 믿고, 이미 복 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미 복을 받은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 약속은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제대로 누리라

하나님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복으로 가득한 연회를 베풀고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값은 이미 다 치렀습니다. 하나님의 연회에는 기쁨과 용서, 회복, 평화, 치유 등,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의자에 앉아 하나님이 예비하실 복을 먹기만 하면 됩니다. 말할 수 없이 큰 좌절과 실패를 맛보았다면 아무쪼록 현실을 직시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어도, 누군가가 우리를 실망시켰더라도, 우리의 원래 신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힘차게 걸어가십시오. 문이 닫혀도 언제나 하나님은 더 크고 좋은 문을 열어 주십니다. 고개를 높이 들고 하나님이 주실 새로운 복에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꿈이 사라지면 또 다른 꿈을 꾸라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고 지금도 물질적으로 별로 풍요롭지 않은가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큰 복을 예비해 놓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명심할 점이 있습니다. 가난의 이미지가 우리 안에 깊이 파고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가난하게 살고 별 볼일 없는 일을 하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거기에 안주해 버리면 곤란합니다. “우린 항상 가난했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거야.” 이런 생각을 버리고 믿음의 눈을 가질 때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번영하는 자신을 보고 그 이미지를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기십시오. 잠깐 동안은 가난 속에 살 수 ?! 逞嗤? 가난이 우리 속에 살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성경에 따르면“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번영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하나님은 자녀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번영할 때 크게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가난에 찌든 정신으로 인생을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높으신 이름을 깎아내리는 짓입니다. 늘 현실에 굴복하고 좌절하면서 억지로 인생을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성공하는 마음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주위를 보면 그저 되는 대로 인생을 살면서 자족하고 순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이만큼 했으면 됐어. 더 이상 승진하긴 어려워.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틀린 말입니다. 우리의‘분수’는 끊임! 없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수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스스로 극빈자로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큰 비극인가요? 구약성경의 므비보셋이란 젊은이가 바로 그런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초라한 인생을 받아들이지 말라

므비보셋은 사울 왕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데 그는 다윗은 매우 친한 친구였고 둘은 의형제와 비슷한 언약관계를 맺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음식이나 옷 또는 돈이 필요할 때 서로의 집에 가서 마음대로 가져다 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둘 중 하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남은‘형제’가 죽은‘형제’의 가족까지 돌봐주는 관계였습니다.

후에 사울 왕과 요나단은 같은 날 전쟁터에서 전사했는데 이 소식이 궁으로 전해지자 유모가 어린 므비보셋을 안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황급히 예루살렘을 빠져나오던 중에 유모는 아이를 안은 채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유모는 므비보셋을 주변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외딴 도시들 중에 하나인 로드발로 데려갔고, 므비보셋은 거기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왕의 손자가 그처럼 끔찍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에 이어 왕이 된 후, 수년이 흘러 사울과 요나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부하들에게 물었습니다.“사울의 집안에 살아남은 자가 없느냐? 내가 요나단을 위해 은혜를 베풀어야겠다.” 기억나는가요? 남은 형제가 죽은 형제의 가족을 돌봐주는 것이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 관계였습니다. 사울 가문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다윗이 부하들에게 물은 것이었습니다. 한 부하가 대답했습니다.“예 있습니다. 폐하, 요나단의 아들이 아직 살아 있는데 다리를 접니다. 지금 로드발에 살고 있습니다.” “가서 그를 궁으로 데려오라.” 궁에 도착한 므비보셋은 당연히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과거에 그의 할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온 국가를 뒤졌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울의 가문은 완전히 몰락하여 다윗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기에 므비보셋은 다윗이 마지막 후환을 완전히 없애려고 자기를 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태도는 그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네 아버지 요나단 때문에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한다. 과거 네 할아버지 사울의 당을 모두 돌려주겠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내 아들과 마?! 弼≠値? 내 식탁에서 식사하거라.” 다윗은 므비보셋을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므비보셋이 왕의 손자이기도 했고 그의 아버지 요나단과의 언약 관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므비보셋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로드발이라는 초라한 도시에서 산 세월을 생각해 보십시오. 원래부터 그는 자신이 왕족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 관계는 이스라엘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언약 관계만 하더라도  그는 충분히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궁으로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다윗 왕이시여, 저는 요나단의 다들입니다. 저는 로드발에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억울합니다. 제 아버지와 페하 사이의 언약 관계를 통한 제 권리를 주장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므비보셋은 왜 초라한 삶에 순응했을까요?! 우리는 그가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 보인 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다윗이 그를 돌봐주겠다고 말했을 때“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므비보셋의 자아상이 보이는가요? 그는 자신을 죽은 개, 패배자, 걸인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왕의 손자였으나 약한 자아상 때문에 자신의 마땅한 특권을 받아 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실수를 자주 저지릅니다. 우리는 자아상이 하나님의 시각과 완전히 달라서 하나님의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용사’로 보시지만 우리는 종종 자신을‘죽은 개’로 봅니다. 므비보셋이‘죽은 개 마음 자세’를 던져버리고 번영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과거에 어떤 실수를 했든 진심으로 회개하고 올바로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면 더 이상 죄책감과 수치 속에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놀라운 복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당연한 복을 찾고 기대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난과 약한 자아상과 죽은 개 마음 자세로 ‘로드발’ 에 머무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우리 자녀가 우리에게 므비보셋 같은 태도를 보이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놓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자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와서는 식탁에 앉지 않고 땅을 기어 다니면서 부스러기가 떨어지기만 기다린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얘야, 도대체 뭘 하는 거니? 어서 와서 자리에 앉으렴. 이 모든 음식은 널 위해 준비한 거야. 사랑하는 자녀인 네가 개처럼 행동하며 부스러기를 구걸하면 내 맘이 너무 아프단다.”하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너는 사랑하는 내 자녀란다. 치즈와 비스킷은 내려놓고 여기 앉아서 네 복을 받으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식탁에 앉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십시오. 이제부터는 죄책감과 수치감 속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값은 이미 치렀습니다. 승선권에 자유의 값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몸을 일으켜 자리를 차지하십시오.‘아빠의 소파’에 앉아 번영하는 마음 자세를 기르고 하나님이 주신 왕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비참한 어?! ╂?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오늘부터는‘하나님의 식탁’에 앉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