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3:1-7, 삼상 19:1-7

오늘은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시므로 실제 생활에 있어 어떤 유익이 우리들에게 있는가를 생각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우는 아가페 사랑은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닌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가페 사랑을 가장 닮은 것이 어버이의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란 거의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자식이 똑똑하고 영리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지 못하고 말썽꾸러기라 할지라도 부모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 그 자식이 온전하지 못하게 태어났을 경우 부모의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그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것-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사랑은 가장 참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 믿고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이란 모든 상황 모든 조건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결국 이 말속에는 좋은 조건, 좋은 상황만이 아니라 아주 안 좋은 조건, 극단적으로 안 좋은 상황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좋은 조건과 상황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사랑할 만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어려운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상황 즉 병들었거나 말썽꾸러기거나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을 끝까지 돌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의 부모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즉 희생 정신과 용기와 인내와 무한한 포용력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인간이 죄악으로 인하여 타락하므로 정말 사랑하기 힘든 존재로 전락하여 버렸지만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인간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그 허물을 덮어 주시고 인간이 변화될 것을 믿고 바라셨으며, 그들이 저지르는 온갖 죄악을 견디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달아 알고 우리도 그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은 대단히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가페  사랑은 무한한 포용력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악을 받아들이시고 그 대신 새 생명을 인간들에게 주시므로 악의 세계를 바꾸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포용력이 악을 이기고 사랑의 세계를 건설하신 것입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참게 합니다.
먼저,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덮어 준다" 또는 "보호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지붕을 가리키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한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리워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허물이나 약점이나 문제나 잘못이라 할지라도 우선 덮어 주고 가리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과오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공포하고 떠들고 다니는 부모가 있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어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덮어 주고 가리워 줍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비리나 과오를 들추어 내어 비난하고 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비리를  용납하고 그 잘못을 용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잘못을 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가 자식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식을 채찍질하고 바르게 잡아 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채찍을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자주 채찍으로 그 백성을 때리시어 바른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감싸주지만 결코 무조건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덮어 주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책임을 걸머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자신이 감당하시므로 그 모든 허물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감싸주는 사랑은 안의 것을 들어내지 않고 해결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오는 공격에서 보호해 주는 것도 의미합니다. 병아리를 암탉이 그 날개 아래 감싸므로 보호해 주듯이 사랑은 온갖 공격과 비난의 화살로부터 사랑하는 자를 보호해 주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실례를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은 다윗을 지극히 사랑하였기에 아버지가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할 때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변호하고 보호해 주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들의 우정은 모든 이해 관계를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왕의 공격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해 주고 감싸주었던 것입니다. 훗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요난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죽을 때까지 잘 보살펴 주므로 요나단의 우정에 보답하였던  것입니다.

암탉이 그 날개로 병아리를 보호하려다 자신이 독수리에게 희생당할 수도 있습니다. 덮어 주는 사랑, 감싸는 사랑은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사랑은 결국 자기 희생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도 가족 관계와 같아서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용납하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보호해 줄 때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로 자라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 짜증나는 일이 있고 용납하기 어려운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 떼어버릴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한 가족임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감싸주는 사랑으로 극복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2. 사랑은 모든 것을 믿게 합니다.
둘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 대해서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께서 결코 저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한 번 잘못을 저지르면 다시는 그 사람에 대해 믿음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신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대게 다른 사람의 변화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처럼 사악한 시대에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개는 그 믿음을 배신당하기가 일수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처럼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당하기가 쉬운 것이 오늘 우리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일단은 의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가족 관계에 있어서 조차도 가족끼리 서로 신뢰하지 못할 경우 그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일일이 그 행동을 감시하려 한다면 그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은 신뢰입니다. 자식을 믿어 주는 것입니다. 그가 때로 잘못을 행한다 해도 그것 때문에 신뢰심을 거두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신뢰심을 계속 갖고 그에게 그 신뢰심을 보여줄 때 그 믿음은 결코 배반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은 때로 손해를 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손해 보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신뢰를 통하여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식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모든 것을 믿는다고 말할 때 아무 판단 없이, 아무 지혜 없이 믿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악한 것이 무엇이며,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파 놓은 함정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갖지 못하였다는 것은 어리석음에 해당합니다. 믿음은 어리석음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사악하게 행동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특별히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3.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게 합니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고 실망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의 성품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망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모든 세계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실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본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사실상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서 소망은 울어 나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절망적이라고 생각되는 상황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아내고 그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아니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란다는 것은 현재는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나타나지 아니한 긍정적인 요소들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는 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은 여러 차례 변신을 합니다. 지금의 상황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되고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보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싹이 노랗다"든지 "될썽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속담처럼 너무 일찍 사람을 단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인간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습니까? 극악무도한 살인 강도가 변하여 전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안 믿을 수 없는 예수”라는 글에서 플로이드 C. 맥켈빈이라는 사람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오스카 써번티스야 말로 인생을 바꿔 놓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살아 있는 실례이다. 오스카는 어렸을 때부터 문제 속에서 자라야 했다. 자라 가면서 그는 강력 범죄로 열 일곱 차례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감옥의 정신과 의사들도 오스카는 구제 불능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틀렸다. 짧은 막간의 자유를 누리던 어느 날, 오스카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노인은 오스카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스카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고, 차츰 친절하고 사랑 많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그는 감옥 사역을 시작했다.
워위크 감옥 목사는 이렇게 묘사한다. “솔대드의 매달 세 번째 토요일 밤은 ‘오스카의 밤’이다. 재소자들은 다 모여 오스카의 메시지를 듣고, 열렬하게 복음 성가를 부른다. 그들은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진지한 자세로 앉아 있는다. 그들은 예배당의 제단 앞으로 자유롭게 걸어 나간다.” 오스카의 변화! 많은 전문가들이 몇 년을 두고 상담을 통하여 이루어 보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순간의 회심을 통하여 이루어 내셨다. 우리가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격분하여 날뛰는 귀신들린 광인을 유순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바꾸시는 모습을 본다. 이 광인과 오스카 써번티스를 바꾸어 놓은 바로 그 능력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도 활짝 문을 열고 있다. 그분이야말로 으뜸 변혁 자이시다. 당신은 그분으로 인하여 변화되었는가?

1995년 9월 26일 조선 일보 사회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이사는 지난번에 사형을 당한 실인 공장 지존파 사형수 6명의 "눈물의 참회의 글“을 실은 것입니다. 그들의 글을 읽겠습니다.
"오늘 저녁 예배를 드리는 도중 저도 모르게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동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참으로 혼났습니다.  천하에 제가 눈물을 흘리다니…."
오는 28일이면 지존파가 검거된지 만 1년이 된다. 그 1년동안 지존파는 한 교회 집사에게 1백여 통의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죄과를 참회한다는 것. 모든 책임을 [압구정동 야타족]에게 돌린 강동은, 인육을 먹은 김현양을 비롯, 고개를 빳빳이 들고 죄를 뉘우칠 줄 몰랐던 두목 김기환까지 180도 돌변한 모습이었다.
편지로나마 죽음을 앞둔 이들의 마음을 돌린 이는 서울 서초구 [사랑의 교회] 이재명집사(53). 이 집사는 지난해 지존파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뒤 이들이 감금돼 있는 서울 구치소에 꾸준히 영치금과 편지를 전달했다. 첫 답장이 온 것은 지난해 10월말. 김기환은 '제가 저지른 사건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잘못됐음을 선생님 앞에 처음으로 고백합니다'라는 말로 참회를 시작했다. 김현양은 '지난날 사탄의 굴레에서 사회를 어지럽히던 김현양이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전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이 집사는 "처음엔 영치금과 편지에 대한 순간적인 감사의 표시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편지는 계속됐고, 교도관에게 전해 듣는 그들의 수형생활도 모범적으로 변해 갔다.
지난 5월20일  6명 전원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자 [감방 전도사]로 돌변해 다른 사형수를 교화시키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강동은은 최근 참회의 편지에서  '저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까요?'라고 썼다. 이 집사는 '지존파 6명은 이제 예수님의 제자와 마찬가지'라고 답장했다.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의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지금까지의 관례로 볼 때 또 다른 강력 범죄가 일어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때 법무부장관이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재가할 것"이라며, 그러나 지존파는 워낙 범죄가 잔인해 올해 안으로 전격 단행될 가능성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것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은 다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 변화되어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완전한 사람이 될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할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4.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게 합니다.
끝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견딘다"로 번역된 희랍어는 "...아래서 버틴다"  또는 "...아래서 남아난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 말은 맨 밑바닥까지 떨어져 그 위에 무거운 짐들이 누르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버텨 내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최악의 경우에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견뎌 내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밖으로부터 오는 고통의 압력이 거세다 하더라도 거기 굴복하지 아니하고 이겨내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고통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당하기가 어려워 그 잔이 물러가기를 위해 하나님께 세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그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 하시고 그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너무 잘 아시기에 그는 끝끝내 그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들이 올 때가 있습니다. 너무 감당하기가 어려워 때로는 자살하고픈 마음을 먹게도  됩니다.
11월 24일 밤에 수능 시험을 보고 그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해서 여고 3년 아이가 아파트 옥상의 계단에 목을 매고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면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가족의 사랑 보다 더 큰 힘을 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견디는 힘을 가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 압력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인 것입니다. 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무서운 박해를 견디면서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가장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감싸주고 믿음을 잃지 않으며 항상 소망 가운데서 견뎌 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상황 아래서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포용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어떤 시련,  
어떤 고통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극복해 내는 힘입니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낙관적이요 긍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구원하시어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에 근거하여 우리도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나 우리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아가페 사랑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갖고 감싸주고 믿고 바라고 견딜 때 우리의 가정이 변하고 이 사회가 바로 서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아가페 사랑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룩하며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 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모르는 자는 모두 고아와 같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고아들이 사랑을 알지 못한 채 파괴적인 성격을 간직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을 모르는 현대인들은 결국 폭력적이고 스스로를 파멸의 구덩이에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병든 세계와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가페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만이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약입니다. 사랑만이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을 간직하므로 여러분의 삶을 건강하게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