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 25-37절


예배를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의료봉사 할 문촌7 사회복지관(자주 봉사하는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정형외과에서 이제는 친근해진 아저씨 한 분을 만났습니다. 큰 장애로 인해 거동하기가 힘든 분임에도 만나서 인사할 때마다 얼굴에 화사한 웃음을 담고 계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움직임을 도와주려는 저를 거절할 때는 더 밝게 웃으시는 분입니다.
봉사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도 그 미소가 쉬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 환자를 돌보고 안내를 하는 지체들을 보는 기쁨도 컸습니다.
저는 중학생과 젊은 부부를 상담 해드렸습니다. 무엇을 주기보다는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싶어서 키를 낮추고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봉사를 마치고 함께 칼국수를 먹으러 갈 때,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생각나서 갑자기 바빠지는 형제(등록하지 않은 지체)의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0:25-37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의 결론을 아십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일까요? 이를 결론으로 아셨다면 여러분들은 본문을 더 많이 읽으셔야 합니다. 오늘 메시지의 중심은 이 이야기의 결론을 찾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25절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율법사의 이 질문은 부족한 자신에 대한 통찰에서 온 질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아직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 더 해야 할 것이 있는지를 묻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다고 합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하십니다. 그 율법사의 대답은 옳았습니다. 우리도 옳은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조금만 배우면 옳은 대답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옳은 대답을 한다고 반드시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실천입니다.
정답을 아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조금만 눈을 뜬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할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안다고 다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식인은 날로 늘어나는데 세상은 더 모르겠고 어두워지는가 봅니다.

예수께서 율법사의 대답을 들으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고 하셨습
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율법사는 29절에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라고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묻는 율법사에게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30절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이 벗기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낙차가 심하고 바위가 많은 험한 골짜기였습니다. 그래서 강도행각을 벌이는 베두윈족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31절에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여리고에는 성전 일을 맡지 않은 비번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많이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마침'이라는 말은 강도 만난 자나 제사장에게 기회 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마침 제사장이 등장하였으니 독자들은 기대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피하여'라는 헬라말은 직역하면 '반대편'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마지못해서 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가 버린것입니다. 항상 지금의 상황으로부터 피해갈 반대편은 있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피하여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는 나름대로 거룩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민수기 19:11절에 "죽은 사람을 만지는 것은 칠일 동안 불결하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불결해지지 않기 위해서 반대편으로 지나갔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도 머무를 자리에 사람들은 불결을 이유로 지나갑니다.

이때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거기서 그가 누구이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의 눈에는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만 보일 뿐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물을 만지는 것은 좋아하였지만 상처받은 자의 손을 만지기는 싫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상인으로서 바쁜 몸이었지만 상처받은 사람을 우선하였습니다. 내 바쁜 용무가 상처받은 사람을 밀어낸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그 사마리아인의 헌신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강도 만난 자의 상처에 붓고 싸매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과 포도주는 당시 여행자들의 상비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상비약을 강도 만난자에게 부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상비약은 어떻게 쓰이고 있습니까?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자기 짐승에 태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는 주막까지 걸어간 것입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주막에서 하룻밤을 그를 돌보아주었습니다. 요즘 같이 병원이 흔한 시대가 아닌 당시는 주막 같은데서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에 대한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올 때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상처받은 자를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입니다.

36절에서 주님은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을 하십니다.
37절에서 율법사는 의견을 내놓는데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사처럼 의견을 말하기는 쉽습니다. 선한 사람이 누구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선한 사람이 되는데는 머뭇거리게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설교 서두에서 질문 드렸던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결론은 37절과 38절 사이에 있습니다. 주님은 율법사에게 '네가 결론이 되라' 고 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이고 결론이라 하지 말고 네가 주인공이 되고 결론이 되라고 하신것입니다.
진정한 성경공부는 본문에서 주인공을 찾아내고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말씀에 나타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이 말씀을 읽는 네가 결론이 되라고 하십니다.
본문 안에서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결론이 아니고 율법사가 결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적용하면 우리들이 37절 다음에 오는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37절 다음은 우리들의 행적이 줄이어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결론이 항상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세상에 강도 만난 자의 신음 소리가 그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결론이 됩시다.

어떤 아저씨가 고급차를 닦고 있었습니다. 그를 아는 한 아이가 "아저씨, 좋은 차네요. 새로 샀어요?"라고 묻기에 아저씨는 "아니, 우리 삼촌이 사주셨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뭐라 말했겠습니까? '
나도 그런 삼촌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나도 그런 삼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의선교회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오늘 말씀의 결론이 됩시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