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잃지 않는 신앙 (막 10:46-52.)

      인류역사의 발전은 '용기'라는 단어로 이어져 왔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용기는 새로움을 창조하는 용기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로 생각할 수가 있으며,
이 용기는 이성적인 용기와 신앙적인 용기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흔히 이성
적인 용기라는 것은 헬라사상을 중심으로하여 현대문명을 발전 시켰으며, 신앙적인
용기라는 것은 히브리인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한 문명입니다.

이제도 우리는 이 용기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용기가
필요하며 나아가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창세기 1장에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야 말로 우
리의 신앙적인 삶의 용기를 주는 장면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맨처음 창조하실 때 세상은 혼돈하고 흑암이 지배했으며
전혀 쓸모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혼돈을 질서로 바꾸시고, 흑암을
광명으로 바꾸시고, 가장 아름다운 세상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감탄하신 세상으로 만
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 창조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고 답답할 때도,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도, 도저히 살아갈 용기 없을 때에
도,이 창조정신을 가지고 그러한 신앙으로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고, 어려움을 극복
하는 용기를 잃지 않고 도전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 맹인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디매오의 아들인 바디메오입니
다.그가 언제부터 소경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앞 못보는 일로 인하여 직
업을 가질수가 없었고 거지로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은혜로 두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사
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비참한 인생을 축복의 생으로 바꾸었습니다. 거지인생을 살며 예
수님에게 가장 큰 동냥을 얻어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인생을 보면서 창조신앙을 보게됩니다. 용기있는 인생의 승리자를 하나
의 드라마처럼 보게됩니다.

그는 어떤 용기를 가졌습니까?

1. 불행을 극복하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닦친 불행에 대하여 좌절만했다면 그는 아마 두가지의 결과를 내
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자살했던지, 아니면 스스로 운명으로 받아 가능성을 향한 용
기를 잃고 평생을 거지로 자학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지금은 맹인이지만 반드시 고치겠다고 하는 용기를 잠시도 잃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만났고 그 만남의 기회를 붙잡고 도전하였던 것입니
다.
불행이 닦쳐오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사람은 도피하는 사람이요, 한 사람
은 극복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도전 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양과
돼지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양은 시궁창에 빠지면 빠져나올려고 발버둥치
고 돼지는 거기에 드러누워 뒹굽답니다.

[에릭 프롬]은 인간을 '희망을 가진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의 가장 휼륭한 점은
우리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헨델의 오리토리오 메시야는 헨델의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때에 만들어 졌습니다.

     바울사도가 많은 서신을 써서 기독교의 교리를 완성했고 성경의 체계를 이루었
는데 그 편지의 대부분은 안락한 침대나 평안한 휴식처에서 이루어진것이 아이라, 싸
늘하고 춥고 배고프고 매맞아 고통스러운 감옥안에서 써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나약한 사람은 환경을 탓하며 사는 사람이요 주어진 여건이 기회임을 모르고 불
평과 불만만 토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에 의하여 신앙이 변하거나 자
신의 가치를 저울질 하는 자들이 아니요, 오히려 신앙의 힘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자
신의 진정한 존재가치를 망각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느 스피르타 장군의 아들이 자기의 칼이 너무 짧다고 불평했을 때 그 장군의 대
답은 칼이 짧으면 한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진정 우리는 창조적인 신앙의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삶에 어렵고 힘들고 불행이 닦친
다 하여도 그것을 극복하는 용기를 가져야 되갰습니다.

2.포기하지 않는 용기입니다.
바디메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오쳤을 때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고 예수님께로 가는 걸음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모습입니까?
그는 그에게 닦친 방해와 어려움과 시험앞에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아니하고,더욱
힘차게 도전하며 앞으로 전진합니다.

우리의 패배는 포기에 있습니다. 조그마한 어려움과 시험이 오면 포기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아름다운 역사를 늘 방해하고 훼방합니다. 우리의 발을 붙잡고 하나님꼐 가까
이 나아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주위 사람을 통하여 방해합니다. 환경을 통하여 방해
합니다. 그럴때 우리의 마음은 약해지고 흔들려서 포기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마귀가 은퇴를 하면서 자기가 가장 잘 사용하던 무기들
을 팔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비싸게 가격이 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절망과
포기'라는 물건 이었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게 비싼가고 물었을 때 그 마귀는 자신이
이제껏 사용하면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지옥에 보낼 수가
있었던 무기였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
르매 거두리라"
진정 우리의 창조적 신앙의 용기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어떤 시험이 오고 어려움
이 와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그럴수록 더욱 도전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마귀의 꾀임에 빠져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이 인간을 향해 포기하셨다면 우리의 존재는 어떻했을까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끊임없는 배신과 죄악과 타락으로 하나님을 버렸던 이러한 인간을 향해 결
코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구속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루어 나가셨던 것입니다.

[윈스턴 쳐칠]은 그가 수상에서 물러난 뒤 어려서 다니던 그의 모교를 방문하여 그이
후배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명한 말은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
시오, 결코,결코,결코!"라는 명언 이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며 도전하는 자를 하나님은 반드시
복주시고 도와 주실 것입니다.

3. 바디메오가 비록 육신의 눈이 어두웠으나 그의 영은 예수님을 바로 보수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바리새인은 저들은 보고 듣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도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곧 고난
받으시고 십자기에서 죽으실것을 말씀을 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중에 오실때
에 서로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모습을 보셨을 때에 얼마나 한심했었을까?
요  그런데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다른사람이 '나사렛예수시라고 '했지만은
그는"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소리쳐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께 신
선한 충격을 주었으리라고 생각 됩니다. 바라건데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마음을 시
원게 해드리시기를 축원 합니다.

4.자기를 희생하는 용기입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 자기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달려나갔습니다.
그 겉옷은 그의 전재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버리고 달려갔습니다. 땅의 것을
버리지 않으면 결코 하늘의 것을 받을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약속을 얻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신앙이 성숙이 없고 믿음의 힘이 약한 이
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벗어버려야
할 것들을 벗지 못하고, 끊어야 할 요소를 끊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그대로 있으면 한알 그대로라고
했습니다.  아직 내가 썩어져 죽어야 할 부분이 그대로 있으면 나의 신앙의 성장과
은혜의 복된 삶도 옛날 그 상태로 멈추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
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용기를 가졌기에, 그러한 자기 희생의 용기가 있었
기에 그는 하나님앞에서 인정을 받았고 축복의 근원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
니다.

우리 기독교의 구속신앙은 십자가가 정점을 이룹니다. 그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것
은 예수님의 자기포기와 자기희생의 결과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적 신앙은 버릴 것을 버리고, 더욱 새로운 것을 붙잡는 도전입니다.
옛것을 잊어버리고 앞에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바울 사도의 믿음이 우리에게
더욱 힘있게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벗어야 할 겉옷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걸치고 살던 세상적인 가치관 사상 습관 세상적인 욕심등의 껍데기
를 벗어던져야합니다. 미련없이 훌훌 던져 버려야합니다. 이것 던져 버리지 않으면
새옷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까지의 그 짧은 순간에 빗어
진 그의 용기있는 삶을 예수님은 축복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
냐?"
그리고 그 분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고 하십니다. 이제 바디메
오는 거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가는 예수님의 휼륭한 제자, 사명을 따라 살
아가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여러가지 문제와 어려움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잃지 마십시다. 용기있는 믿음으로 우리의 역경을 축복으로 바꾸고, 새로움을
창조해가는 창조신앙의 사람이 되십시다.                    아멘.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