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교수 (케뤼그마신학연구원 원장,)

칼 바르트의 기독론적-전이의 해석학(1) (Hermeneutik der christologischen Metapher bei K. Barth) O. 해석, 사고유형, 아니면 증언인가? 가다머(H.-G.Gadamer)는 "해석학"을 선포(Verk nden), 통역(Dolmetschen), 설명(Erkl ren), 혹은 주석(Auslegen)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본래 "해석학"이란 용어는 "헤르메스(Hermes)"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헤르마스는 神들의 使者로서 신들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신들의 명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청취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신들이 내린 명령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따라서 가다머는 "해석학"이란 용어의 근본적인 의미를 "사유에 관한 증언(Aussage von Gedanken)"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성서가 증언하고자 했던 최초 본래의 내용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해석학의 과제라고 말한다. 해석학에 대한 이러한 가다머의 개념정의는, 해석학이 화자의 사유체계 내지 사고유형에 대한 분석을 결코 배제하지 않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석학에 관하여]란 책에서, 해석학은 종합적인 판단 내지 진리의 논리적 구조를 체계적인 문법 양식에 준하여 탐구하는 논리적 방법이라고 보았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성서가 증언하는 바의 내용 내지 사실(Sache)을 어떠한 사적 견해 없이 정확하게 설명하는 방법이 해석학이라고 정의된다. 이 때에 성서는 단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역사적 증언이나, 독단적 교리를 주장하기 위한 참고서가 아니라,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전제가 주어진다. 따라서 성서 해석학은 성서가 담지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실 혹은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이해방식(Verfassungsmethode)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20세기 "성서 만으로(sola scrpitura)"라는 명제로 교의학적 신학을 전개한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의 신학을 우리는 변증법적 "말씀의 신학"이라고 특징 짓고 있다. 그런데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단지 그의 신학적 논리 전개가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변증법적 신학"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성서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 vere deus, vere homo - 로 증언하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가 "참 신이며, 참 인간"이라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변증법적 증언을 담지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의 변증법적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해석에 기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성서의 내용(Sache)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며, 동시에 최초의 해석학자를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성서의 증언과 기독론적 교리는 - vere deus, vere homo -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가?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사이에 과연 해석학적 일치성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일연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르트가 성서의 증언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모형(hermeneutisches Paradigma)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래의 작은 논문에서는 칼 바르트의 초창기 변증법적 신학으로 부터 시작에서 그의 교회교의학(Krichlich Dogmaitk)을 지배하고 있는 해석학적 모형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아래 논문은 주로 바르트의 가장 대표적인 사유모델 내지 해석학적 모형을 분석해 내는데 국한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해석학적 모형은 연대기적으로 체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러 가지 모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바르트의 해석학적 모형이 철저히 기독론적 변증법임을 재 확인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기독교의 복음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편화시킨 그의 탁월한 학문적 공적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I. 하나님의 말씀의 행위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서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의 내용(Sache)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증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 행위(Handeln)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의 "신론(Gotteslehre)"의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의 계시 행위에 있고, 그의 하나님 말씀론(Die Lehre vom Wort Gotes)는 곧 "하나님의 현실성(Die Wirklichkeit Gottes)"이라는 장에 속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현실성"이란 장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 명제로 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자기 계시의 행위 속에 있는 바로 그러한 분이다(Gott ist, der er ist, in der Tat seiner Offenbarung)"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에 대한 해석은 단지 그 말씀을 묵상하거나, 본문을 분석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이 증언하는 대상 곧 하나님의 계시 행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느냐에 대한 분석이 곧 성서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 행위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의 행위>이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다(Deus dixit)"는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은 곧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 행위를 뜻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우리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기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서 안에 담겨진 기적은 곧 말씀의 기적이다, 곧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말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자나, 사도들의 인간적인 말의 형식을 빌리기는 하지만, 그래서 그들의 증언 속에는 불일치와 모순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증언을 하나님에 대한 증언, 곧 하나님이 되게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행위이다. 성서 해석학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발단을 그는 이미 "자신의 계시 속에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교리(Die Lehre vom dreieinigen Gott in seiner Offebarung)"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영역에서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하게 진술하고 있다: "문장의 주체와 술어와 객체 관한 질문들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과 상응한다. 이렇듯 바르트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를 하나님의 계시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주님으로, 곧 주체(Subjekt)로 계시하시고, 또한 자신을 자기 계시사건의 객체(Objekt)로 계시하신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외에 그 어떠한 보다 구체적인 것도, 그 어떠한 보다 믿음 만한 것도, 그 어떠한 보다 생동적인 것도 계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융엘(E. J ngel)에 의하면 이러한 바르트의 말씀 계시로서의 하나님 계시는 신약성서적증언인 요한복음 1장14절 대한 주석이라고 본다. 이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서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서의 하나님 행위에 대한 해석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계시사건이며, 이 계시 사건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화육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어쩔 수 없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한 해석은 기독론적 사유모델을 담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에게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계시에 대한 언급은 등가치를( quivalente) 갖는다. 다시 말하면, "계시를 말하는자(Wer Offenbarung sagt)"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Das Wort ward Fleisch)"을 말하는 자이고, 따라서 "계시를 말하는 자"는 동시에 "우리와 함께하는 자(Gott mit uns)"를 말하는 자라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계시를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Deus dixit)"를 말한다고, 바르트는 진술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바르트의 신학을 "그리스도중심의 신학"이라고 특징지어 평한다. 이러한 해석은, 바르트가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언제든지 기독론적 해석을 전면에 내어 놓는다는 것을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행위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서>를 아래와 같은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II. 기독론적 역설의 변증법 바르트의 초창기 신학에 대한 解釋은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起因한다: "애초부터 삶에 대한 우리의 긍정(Ja)은 그 안에 神의 부정(Nein)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 부정은 반제(Antithesis)로서 일어나며, 그러나 그것은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종합에 대한 명제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 저 否定은 마지막에 다다르게 되는 최고의 진리(Instanz)가 아니다. 단지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물음에 대답을 주는 것에 대한 명칭일 뿐이다". 여기서 즉각적으로 질문이 제기된다. 바르트는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기에 이러한 역설적인 진술을 할 수 있을까?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이란 논문에서 "그리스도人"을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변증법적 종합으로본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이다."(4) 그에게 있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사역의 초역사적 혹은 구원론적 보편성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안"이란 의미를 "우리 위", "우리의 배후" 그리고 "우리를 넘어"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리스도인"을 피조물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혹은 초월적 結合 내지 綜合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명제로서의 "그리스도인"에는 언제든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전적 분리가 전제된다. 왜냐하면 그는 神的인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것은(Das G ttliche), 그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며, 그 類 있어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고, 그리고 세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어떤 전체이다." 반면에 바르트는 世上的인 것 혹은 人間的인 것을 먼지로 규정한다: "너는 먼지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이것이 인간성에 대한 바른 선고가 아니며, 인간성에 대한 본연의 신앙고백이 아닌가?"(7) 神的인 것과 人間 내지 人間的인 것의 이러한 예리한 대립을 그는 비유적으로 되물음으로써 확고히한다: "모두가 무의미한 것 뿐인데 의미있는 것이 어디 있으며, 타락한 것 가운데서 근원적인 것이 어디 있으며, 모두가 쭉정이 뿐인데 밀알이 어디있는가?"(6f.). 바르트는 "그리스도인"이란 종합명제에 앞서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예리한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神的인 것과 人間的인 것의 아무런 전제없는 결합을 거부한다: "신적인 것을, 만일 그것이 진정 신적인 것이라면 인간들에 눈에 감추어져 있어서 접근을 못하게 돼 있으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즐겨 결합하려고 한다."(6) 그래서 바르트는 "기독교-사회(christlich-sozial)", "복음주의-사회(evangelisch-sozial)" 그리고 "종교-사회(religi s-sozial)" 式으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결합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내재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기독론적으로 극복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Gottes Menschwerdung)"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극복하는 새로운 운동이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오시는 전적으로 새로운 분이시고, 길이며, 생명이고, 인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삶이고, 인간의 아들이다. 그 분 안에서 人間性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직접성 (Unmittelbarkeit)을 인식하게 된다"(11) 바꾸어 말하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는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하나님으로 부터 인간에게 오는 길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 길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로 오시는 하나님의 길이다(참. 12).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분리가 극복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길을 바르트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들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가까이 오지 말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출 3,5) 하신 말씀은 인간이 감히 스스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존재 임을 계시해 주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해석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나는 확실히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환난을 보았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나는 그들을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왔다"(출 3,7-8)고,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직접 오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위로부터 아래로"의 운동, 곧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 가로 놓인 담을 넘어오는 하나의 "수직선적 (die senkrechte Linie)"운동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 바로 영원한 말씀의 화육사건이다(요 1:14).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의 분리는 기독론적으로 극복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수직선적" 운동 속에서 "전적 타자(Das gnaz Andere)"(13)로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 곧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종합으로 말미암아 "흙에서 낳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가 아니라, "내가 살았으니. 너도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산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씀의 화육 사건속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셨다(deus dixit)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내용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durch Christus)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는 과정은 어떠한 변증법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수직선적인 운동", 즉 "하나님의 인간 되심"을 소위 명제, 반명제, 그리고 종합명제란 변증법적 용어를 빌어서 설명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종합명제에서 반명제를 본다. 그리고 명제를 반명제의 前提가 아니라, 오히려 반명제 속에 있는 부정과 긍정 사이의 갈등을 극복해야 하는 종합명제의 전제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독특한 변증법을 설명한다: "근원적인 것은 종합명제(Synthesis)이다, 이 종합명제로 부터 비로서 반명제(Antithesis)가 나온다. 그러나 또한 종합 명제로부터 명제(Thesis) 자체가 나온다." 이를 다시 바꾸어서 다음과 같이 얘기 한다: "단지 명제로부터 참된 반명제가 나올 수 있다. 참된 반명제란 근원적으로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반명제를 뜻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변증법적 전개 속에는 논리적 "동시성(Gleichzeitigkeit)"이 내재되어 있다. 그는 논리적 동시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의: 역자주) 긍정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것의 부정이다. 따라서 하나님 위에 근거한 것이 아닌 (세상의: 역자 첨부) 모든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같은곳). 바르트는 자신의 변증법 도식을 구원사적으로 보충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기에 구원자가 될 수 있고, 구원자이시기에 동시에 종말의 심판주가 될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종합으로서의 종말론을 시간의(역사의) 끝에서 보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의 갈등이 극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본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역사의 참된 시작도 창조로 부터 보지 않고, 역사의 종합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본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창조 역사의 참된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참으로 밝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된 종말론은 단지 (시간상) 앞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뒤로 (소급해서) 빛을 비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에야 비로서 계신 것이 아니라, 어제도 계셨다."(같은곳)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역사적 종합명제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계시되었고, 그 나라는 창조 역사의 전제 내지 목적이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종합명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반명제의 관점으로 부터만이 사람들은 명제를 조용히 가치 있는 것으로 놔 둘 수 있다"(24)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세상의 나라 혹은 현세의 나라는 역사적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의 반명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반명제로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극복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있는자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제 "흙에서 낳으니, 흙으로 돌아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者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 된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갈등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바르트는 인간의 삶이 갖고 있는 동시적인 역설적 갈등을 얘기한다. "삶에 대한 우리들의 긍정은 처음부터 그 자체 안에 神的인 否定을 담지하고 있다"(28). 그런데 "신적 부정은 반명제에서 나온 것으로서 선행하는 명제에 대립되어 있고, 근원적이고-최종적인 종합명제를 지시하고 있는 부정"(같은곳) 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이 말은 우리의 긍정(Ja)은 신적 부정(Nein)이고, 우리의 부정은 신적 긍정이라는 역설적 갈등의 세계가 바로 우리들이 현존해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편에서의 긍정은 바로 이 否定的인 우리의 삶을 否定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썩어질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사랑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육체의 죽음으로 (곧 부정)으로 수행되었다. 여기서 인간적인 부정은 하나님의 긍정에 삼킨바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적 삶에 대한 긍정은 하나님의 부정에 의해서 부정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긍정 혹은 인간적인 긍정에 대한 부정으로서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르트에 의하면, 세상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과 그 부정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으로서의 종합이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역설적 갈등이 기독론적으로 종합되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쌍방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에 의하면 "종합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34) 다시 말하면, "명제 속에서 의도되었던 종합 명제는 반 명제 속에서 단지 쁹아졌고"(같은곳), 밝히 드러났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종말은 이미 창조에서 계획된 것이고, 그것은 반명제에 대한 극복 속에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바르트는 새로운 종말론을 정립한다: "최후의 것, 終末, 곧 종합은 다음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마지막에 이르는 연속(Fortsetzung), 그 결과(Folge) 결론(Konsequenz)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잠정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잠정적인 것과의 단절)이기 때문에 근원적인 의미을 갖고, 그 잠정적인 것을 움직이는 힘이다."(35) 이 말은 終末이 이 歷史의 연속이나, 역사적 결과 혹은 끝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종합명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전혀 다른 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아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의 백성이 되고, 전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즉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 것이다(고전 15,53)(32). 그렇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창조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목적 되었던 것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먼저번 하늘과 땅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파괴되어서 다시금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계획되어지고 목적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탈 세상적으로 이 세상을 부인함으로서 소유 것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이며, 이 역사의 歸港地를 희망함으로서 소유하는 것이다. (다음주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