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교수 (케뤼그마신학연구원 원장,)

III.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과 역설의 동시성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예리한 분리를 전제하였던 것과 같이, 그의 논문: "성서적 질문과 통찰과 전망(Biblische Fragen, Einsichten und Ausblick, 1920)"에서도 성서가 제공해 주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 지식, 역사적 의미, 그리고 삶의 가치를 철저히 二分하여 대립시킨다. 그는 이원론적 대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부는 우리들 안에 존재하는 것에(Drinnensein), 그리고 동시에 일부는(teilweises) 우리의 밖에 있는 존재(Draußensein)에 견고히 붙어 있음으로서 우리자신을 확고히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이중성(Zweierlei), 즉 하나의 이원론(Dualismus)을 세워야 하는가? 그렇다면 또한 하나님 인식 다른 인식들에 반대되는 것이기에 우리 안에 다른 공간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 인식은 다른 인식들에 반대되지 않는가!".

하나님 인식과 다른 세속적 지식의 이러한 예리한 분리 때문에 그는, 우리는 하나님 인식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도 하나님의 인식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무능력하고 또 무능력한 상태로 자라났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루터의 "성서에 의한 성서 해석(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을 수용한다(50).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 인식"을,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지식의 전제로 이해한다. 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하나님 인식"을 세속적 모든 인식의 전제로 봄으로서, 그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의 지식"을 "긍정"과 "부정"의 대립 상태로 본다: "그렇게 우리는 긍정(Ja)과 부정(Nein), 그리고 부정과 긍정에 직면하게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말씀의 위기 속에, 그리고 그 위기의 당혹함에, 우리 자신이 있음을 발견한다."(53) 그러나 인간적인 것의 부정과 신적인 긍정은, 바르트에게서, 영원한 분리로 끝나지 않는다. 바르트는 세속적 부정 속에 하나님의 긍정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봄으로서, 부정과 긍정의 대립 및 갈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으로 극복한다: "선택사상이란 곤경에서 나온 것 이외는 다른 어떠한 말도, 성서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말해야만 했던 것에 관하여 언급될 수 없고, 들여질 수도 없다."(55)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선택 그 사건 이외는 부정과 긍정의 철저한 분리가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선택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인식"과 세속적 지식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해서 쓰여진 성서가 어떻게 모든 세속적 지식 내지는 인식을 초월한 하나님 인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도 성서가 하나의 종교적 문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서의 증언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문서와 다르다고 강조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분(totaliter aliter)"(73)이신 예수에 대한 통찰이 성서에 있기에, 성서는 모든 인간적인 문서들과 전적으로 다르다. 이를 바르트는 은유적(methaphorisch)으로 설명한다. 그는, 그류네발트(Gründewald)가 예수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세례요한의 손과 같은 것이 바로 성서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 없는 다른 문서들과 성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는 세상적 문서들과 내용상 전혀 다른 타자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인간적인 통찰이 "전적으로 다른 분"에 대한 통찰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이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찰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도 바르트는 앞에서 전개해온 변증법적 사고를 되풀이 한다. 즉 "하나님 인식"이 모든 다른 인식의 전제가 되듯이. 성서는 모든 종교적 증언의 전제이다. 더 나아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모든 사건의 전제이며, 동시에 종합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즉 예수의 죽음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다. 즉 인간의 否定적인 죄가 否定되는(거부되는) 하나님의 肯定이다. 그는, 예수에게서 있어난 종말론적 사건을 새로운 창조로 해석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통치(Gottesherrschaft)"(72)의 시작이고, 시간이 종식된 "영원(Ewigkeit)"(72)이고, "새로운 세계"(73)이다, 이 종합에 대한 통찰이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성서의 증언도 철저히 "변증법적"이다. 그의 말을 빌어서 말하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거리로 부터(von daher)"(67, u.a..),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바르트가 본 성서의 통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부정적인 요소들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라는 점에서 성서의 증언도 다분히 변증법적이라고 그는 확정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논리 전개는 우선 먼저 성서의 특성, 즉 인간의 종교적 문서와 하나님에 대한 통찰을, 분리시키고, 그 다음 분리되어 있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증언이라는 하나의 사실로 종합 함으로서 양자의 분리를 극복하여 성서의 독특성을 증언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 혹은 사건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 <역설적이면서 동시적으로> - 부정을 긍정으로 그리고 긍정을 부정으로 - 해석하는 방법이다.

IV.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서의 종합 명제

바르트는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에서 우선 먼저 3 가지 문장으로 강연 제목과 관계되는 명제를 설명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할 수 없다. 우리는 양자, 즉 우리의 당위와 우리의 무능(할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199).
우선 바르트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처음 부터 존재의 문제를 갖고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과제는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생명과 죽음", "영원과 시간"이라는 질적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곤궁에 빠진 문제로 남게 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해야 한다"는 과제와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적인 질적 차이 속에 內在해 있는 이러한 변증법적 대립(dialektische Konstration)이 극복 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사건"의 발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건"은 인간 편에서 일어날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첫 번째 명제는 두 번째 명제, 곧: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명제로 넘어가게 된다.
두번째 명제가 극복될 수 있는 길은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사건"의 발생이다. 이 "새로운 사건"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특징짓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바로 말씀의 화육사건,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207)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Deus dixit)"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에서 두 명제의 갈등은 기독론적으로, 즉 "말씀의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으로 극복되어진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해야한다"와 "할 수 없다"의 변증법적 갈등이 "하나님의 화육사건"으로 극복될수 있을까?
바르트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된 채 머물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단순히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역자 주)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되실수 있는 분이다.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다른 존재로 계신 하나님이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다" 또한 바르트는 하나님을 主-客의 構造(Subjekt-Objekt Schema)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아니다. 즉 인간은 주체로서 객체인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상에 있는 독특하고 고유한 인간 존재(das partikulare Eigensein des Menschen in Wege)"(210)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체성 속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충만함을 갖고 인간이 되시는 곳에서, ... 자신을 긍정(Ja)로서 우리의 부정(Nein) 속으로 들어오시는 곳에서, 그 곳에서 만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되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되심"의 사건이 전제된 곳에서만이, 역설적 해석이 - 부정이 긍정으로, 긍정이 부정으로 -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루터의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 justificatio impii (불경건한 자를 의로 인정함)이 가능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바르트의 변증법은 이제 역설적 종합에 이른다. 즉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애가 할 수 없다"는 모순이 "하나님의 인간되심"으로 극복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변증법적 도식은 바르트가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명제와 반 명제가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주-객 일치 변증법> 이라고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이야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하나의 통일된 종합에 내재된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의 갈등을 예리하게 분리하고, 그 分離가 새롭게 기독론적으로 극복된 것을 쁹아 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인간적인 문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리하게 분리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적인 문서"와 "하나님의 말씀"의 갈등을 화육된 말씀인 그리스도로 극복되었음을 천명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봄으로서의 자신이 제시하는 종합명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기독론적 변증법을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화육된 말씀을 - 하나님의 인간되심을 - 모든 신적인 것과 모든 인간적인 것의 綜合으로 보고, 이를 자신의 성서 해석학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해결점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은, "명제의 힘과 반명제의 힘이 근원적이고, 절대적으로 (독자적으로) 태동하고 있는 종합명제의 힘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33)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 하나님 - 인간의 언어와 하나님의 말씀 -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바르트는 언제든지 神 中心,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 中心의 극복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기독론적 갈등 극복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변증법은 전체성 속에서 하나를, 그리고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보는 통전적 변증법으로 특징지어 질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변증법적 해석은 기독론적 갈등 극복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긍정과 부정,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 현세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 -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바꾸어 말해서 바르트는 부정 속에서 긍정을 보고, 긍정 속에서 부정을 본다, 그리고 이 둘이 상존해 있는 현실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기독론적 변증법적 해석은 루터(Luther) 더 소급하여 바울(Paulus)의 신학 방법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핀노마(L. Pinnomaa)는 암시하고 있다.
(다음주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