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교수 (케뤼그마신학연구원 원장,)

V. 유비적 은유(Analogische Metapher)

인간의 존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도 바르트에 이해에 의하면 행위 속에 있는 존재(ein Sein in der Tat)이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행위 속에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존재한다(Ich bin)"라는 문장을 "나는 행동한다(Ich tue)"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행위과 인간 행위 사이에 유비(analogie)가 있음을 전제하는데 기초한다. 즉 인간의 행위 속에서 있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은유적으로 유비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진술한다. 그는 행동이론(Handlungstheorie)을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데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렇다면 바르트의 인간존재 이해는 무엇인가?
바르트는 인간의 존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행동은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 존재를 이렇게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윤리학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론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실존한다(Existieren)"는 것은 "윤리적으로 실존하는(also ethischen existieren)"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의 판단과 행동의 연속성과, 그 행동의 가치와 선함은 곧 바로 그 사람의 존재론적 연속성과 가치과, 선함(Güte)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를 행동(Handeln bzw. Akt) 내지 사역(Werk)으로 부터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의 계시행위로부터 규정하는 것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 속에 계신 분이기(Gott ist in seiner Tat)"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의 행동은 곧 자신의 계시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곧 계시의 행위 속에 있고, 그 계시의 행위 속에 바로 하나님의 존재가 실존한다. 따라서 하나님 존재의 가치 및 연속성 그리고 선함은 그 행동의 가치 및 연속성 그리고 선함에 상응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의 연관성은 곧 인간의 존재와 윤리적 행동의 연관성과 은유적인 유비를 갖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행위를 단지 하나의 행동으로 규정하지 않고, 행동개념 속에 전제되어진 것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주제화(thematisieren)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행동하는 주체(das handelne Subjekt)로서 규정한다, 즉 하나님은 계시행위의 주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격개념(Personbegriff)은 곧 행동개념(Handlungsbegriff)이며, 동시에 주체개념(Subjektsbegriff)이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는 곧 말씀사건(Deus dixit)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그에 있어서 인격개념은 말씀의 주체 개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곧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그 말씀은 곧 행동이고, 그 행동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의 연속성, 가치, 현실성 등은 곧 하나님 인격 내지 존재의 연속성, 가치 그리고 현실성이다.
바르트는 인간 존재도 "주체(Subjekt)"로 규정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행위의 주체, 선택과 결정의 주체로 본다. 즉 자기선택,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결정, 혹은 자기규정(Selbstbestimmung)의 주체로 본다. 그래서 바르트는 인간의 실존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하여 행동의 자율적 주체(ein autonomes Subjekt)로 규정한다. 그러나 인간은 2차적인 주체(ein zweites Subjekt)이고, 하나님이 "1차적인 주체(das erstes Subjekt)"이다. 이 말은 인간도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에 대하여 자기 편에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라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은 외관상 볼때는 경쟁하는(konkurrierende) 그리고 서로 상대방을 억압하는 주체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상호 갈등의 딜레마(Dilemma)로 부터 바르트의 해석학은 역설적이면서 동시에 은유적인 유비로 나타난다. 그는 한편 하나님과 인간을 자율적 주체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결코 경쟁관계(Konkurrenzverhältnis)가 아닌 것으로 기술한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갈등관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상응관계(Entsprechungsverhältnis)로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즉 행동하는 인간은 하나님께 상응하는 주체(entsprechendes Subjekt)이다. 따라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 행위의 본래적인 주체이고, 인간은 단지 그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상응관계가 이루어지는가?
하나님께 상응하게 행동하는 인간은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인간이다. 즉 신률적 자율의 목적론적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인식된다. 왜냐하면 예수는 항상 자신의 구체적인 행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 사이에 있는 상응은 우선 먼저 인간의 자율(Autonomie)를 형성해 준다. 그래서 인간의 주체는 신적 행동의 객체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 인간들의 자기규정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은유(Metapher)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언급은 우리들의 자율(Autonomie)를 형성하는데, 그 것은 신률(Theonomie)에 상응하는 자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은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존재이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인간적인 실존은 "능동적 항존자이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히 수용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히 자발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간단히 요약해 볼 수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은 결코 원인과-결과의 관계(Ursache-Wirkungs-Verhältnis)가 아니라, 철저히 계약 파트너(Bundespartner) 사이에 있는 상응관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 사이에는 은유적 유비(analogische Metapher)가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자신의 인간학과 윤리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행동에 상응하게(entsprechend) 행동하는 인간의 행동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행동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바르트의 해석학은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sch) 전망 속에서 인간의 행동과 하나님의 행동을 은유적으로 비유시키는 성서의 증언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은유적으로 진술된 하나님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데는 "신앙의 유비(analogia relationis)"가 전제된다.

VI. 해석을 위한 형식적 구조로서의 계약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교회 교의학전체를 기초하는 성서 신학적 근거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계약"의 개념에 대한 이해는 성서 전체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구조가 된다. 그는 성서의 증언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약의 "파트너(Partner)"로 규정한다. 우선 바르트는 그의 선택론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약의 파트너로 선택하였음을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약의 파트너"로 선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없이 홀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드러났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함께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과 영원한 결의(Ratuschluß) 내지 의지(Wille)가 실제적으로 현실화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론은 "복음의 총체(Summe des Evangeliums)"이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약관계(Partnerschaft)"는 단지 하나님과 인간 관계 만을 규정하는데 적용되지 않는다. "내재적 삼위일체론(Immanente Trinitätslehre)"을 비롯하여, 인간의 하나님 형상, 하나님과 이스라엘, 남-녀, 더 나아가 만물이 하나님과 "계약관계"에 있음을 증언한다. 바르트 자신이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항상 파트너 관계로 계셨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하여,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우선 먼저 하나님 자신 안에 있었던 것은, 그리고 또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은 바로 이러한 계약 관계 속에 있는 역사이다". 이러한 진술은 창조를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계약관계의 실현 내지 현실화로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의 표명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계약관계"를 교의학 진술의 성서신학적 기초로 전개하고 있다. 동시에 "계약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Begegnung),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을 기술하는 기초가 되며, 더 나아가 신적 행동의 원리(Gotteshandlungsprinzip)된다: "계약관계 속에 있는 역사(Geschichte)는 모든 창조적 삶 앞에 그리고 위에 있는 하나님의 삶이다. ... :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삶은 간격을 넘어가는 것이고, 대립 속에서 중재하는 것이고 그리고 만남을 통한 대화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Gebot)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 조건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떠한 경우에도 단지 추상적이고 권위적인 명령이 아니라, 일종의 계약 조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는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그 자신에게 응답해야 하는 존재로 인간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진지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는 또한 계속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그리고 "성숙한 피조물로서" 우리 자신의 존재를 계약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공간과 시간"을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바르트가 하나님의 계명을 일종의 계약조건으로 해석하는데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전제가 있다. 그 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계약관계", 곧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계약파트너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더 자세히 말하면, 이스라엘, 남자와 여자, 교회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까지도,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까지도 "계약조건"에 따라서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 곧 구속사(Heilsgeschichte) 심지어는 창조사(Schöpfunsgeschichte) 까지도 모두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사(Bundesgeschichte) 속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증언하는 모든 내용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 파트너 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약은 바르트 해석학의 <형식적 구조>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예정론에서 계약을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ewiger Ratschluß)로 규정하기 시작하여 "창조를 계약의 외적 증거"로 시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 사건을 "계약의 성취"으로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교회 교의학 전체를 계약 신학적 전망을 갖고 전개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의 교의학적 전개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내용들을 교의학적 체계에 따라서 전개하고 있다면, 그의 해석학적 모델은 "계약"이외에 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VII. 맺는말: 복음과 율법의 변증법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구조와는 달리, 바르트는 <복음과 율법>의 변증법을 전개한다. 즉 인간의 죄 인식은 율법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온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사건 없이 자기의 이성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항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일어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통하여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이 어디에 있었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바르트에 있어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죄 인식의 전제이다. 이를 변증법적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종합명제>이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인간의 죄된 상태는 <반명제>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최초의 의지 내지 뜻, 곧 <명제>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요약한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에는 "동시적 양면성(gleichzeitige Doppelseitigkeit)"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 즉 한 사건에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요소 내지 내용(Gehalt)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과, 그 사건은 항상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학은 이 "동시적 양면성"을 극복하는데 자신의 해석학적 기대(Anliegen)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의 "동시적 양면성"은 구체적으로 "직설법(Indikativ)"과 "명령(Imperativ)"이라는 말씀의 양식(Form)을 해석하는 설명모델이 된다. 즉 성서의 말씀은 "직설법"과 "명령"이라는 양태를 갖고 있는데, "직설법"으로 진술된 성서의 증언은 <종합명제>로서 <복음>을 뜻하고, "명령법"으로 진술된 성서의 증언은 하나님의 요구(Postulat)를 행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의 죄악을 계시하는 <반명제>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계명은 사실상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로서 <종합명제>의 전제가 되는 <명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지와 뜻은 <종합명제> 을 통하여 <명제>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어쨋든 분명한 것은 바르트의 해석학은 <종합명제>에서 <명제>와 <반명제>를 통찰하는 기독론적 변증법이라고 특징지어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가 기독론적 변증법을 전개하는 신학적 기본구조는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규정하는 "계약(Bund)"이다. 그 계약은 하나님의 우선적이고 주권적인 행동(der initiative Souvenänitätsakt)를 전제하는 일방적인 계약(der einseitige Vertrag)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사건은 사실상 근원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의지와 결단(ewiger Ratschluß)에 근거한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하여 인간은 단지 "계약 파트너(Bundespartner)"로서 이에 상응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행동에 상응하는 주체(das entsprechend Subjekt)로 행동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종합명제>는 필연적으로 <명제>에 상응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계약 파트너인 인간의 행동은 <반명제>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바르트는 율법을 "유비적 은유(analogische Metapher)"의 모형 속에서 해석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우선적이고 주권적인 행동에 상응하게 행동해야만 한다.
그런데 바르트의 "유비적 은유"의 해석학 은유적 "상응(Entsprechung)"이란 전망(Perspekt) 위에 서 있다. 즉 하나님의 행동은 동시에 은유적으로 인간의 행동을 계시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유비는 상응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에 기초해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파트너관계"는 하나님의 행동에 상응하게 행동해야 하는 인간의 행동을 규정하고, 그로 부터 야기되는 모든 관계를 해석하는 전제가 된다. 여기서 바르트는 또 다시 예수의 양면적 역할을 언급한다. 예수는 "선택하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선택받은 인간"이다. 이러한 양면적 해석의 전거는 기독론적 고백, 예수는 참 신이며, 참 인간이라는 신앙고백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론 고백에서 출발하여 모든 성서의 증언을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sch) 사고를 갖고 해석한다.
이와같은 해석학적 사유모델을 통하여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동시성(Gleichzeitigkeit)"이란 해석학적 전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모든 인간을 위한 사건으로 보편화시킨다. 즉 단 한 번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사건으로 확장시킨다. 이 원리를 그는 주로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 수용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