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교수 (연세대학교 교수) 2004.10.01 조회 : 423  

IV. 상대적 동시성에 속에 있는 절대적 공간

이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현대 물리학에서 어떻에 융합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동시성에 관한 문제는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건들의 동시성이다.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서 발생한 사건들의 동시성은 일단은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아인슈타인의 "광속도 일정의 원리"에 의해서 극복된다. 즉 동일 공간 속에 있는 점 A에서 점 B에 갔다가 다시 점 A로 되돌아오는 시간거리를 ABA로, 점 A에서 점 C에 갔다가 다시 점 A로 되돌아오는 시간거리를 ACA라고 한다면, 이때에 시간거리 ABA와 ACA가 같으면, AB의 공간적 거리와 AC의 공간적 거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측정을 통하여 거리측정을 하는데는 "광속도 일정의 원리"와 광속도가 우리가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고속이라는 전제가 앞선다. 만일 이것을 광속도에 의한 측정이 아니라, 소리에 의한 측정이라면 결코 점 A와 점 B는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속도"에 의한 거리측정만이 4차원 <시-공간> 연속체에 대한 거리구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광기하학(light-gemotry)"이라고 불러왔다.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서 발생한 사건이 동시성을 갖는다는 것은 운동의 "동등성의 원리(Principle of equivalence)"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즉 서로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은 "동등성의 원리"에 의해서 <시-공간>의 지평융합을 형성한다. 이 "동등성의 원리"는 아인슈타인이 마하(E. Mach)의 "동력학적 상대성" 원리를 발전시킨 것으로서, 공간 내에서 중력의 질량과 관성의 질량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하의 동력학적 장을 인정하는 즉시 중력장 g를 둘레의 운동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식이 성립된다:



→ → → →
F = m * g 와 F = m * b 는 비유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F = e * E)

이러한 식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은 수직운동(F = m * g)은 수평운동(F = m * b)과 동등해 질 수 있으며, 두 운동은 F = e * E 로 보편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은 g 와 b 의 등가에 의해서 한가지 운동으로 융합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전제 위에서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기하학"적 차원에서 볼 때, 떨어져서 일어난 서로 다른 두 개의 사건이 동시성을 갖는 것은 단지 시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두 사건이 동시성을 갖게 되는 전제 조건은 두 사건이 동일한 단위 공간 즉 동일한 중력장 속에서 일어날 때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관성계에서는 동일한 운동법칙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질량 중심의 중력장 내에서 정지해 있는 두 시계는 그에 대응하는 지역적 관성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가속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중력장이 더 높은 절대적 중력 포텐셜 값을 가진 지역에 놓여져 있는 시계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동일한 중력장 안에서 공간적으로 떨어져 일어난 서로 다른 두 사건은 "광기하학"의 원리에 의하면 시간적으로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동등한 중력장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유비적 동일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V.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극복으로서의 땅과 하늘의 지평융합

현대의 자연과학은 독일의 시인 쉴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가 자신의 시 "그리이스의 신들"에서 자연을 비신격화(entgöttern)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시계 추가 소리없이 시간을 치는 것과도 같이
神格을 빼앗긴 自然은
노예와 같이 重力의 法則을 섬긴다"

이 詩가 암시하는 바는, 자연 그 자체는 아무런 신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연은 신의 피조물이고,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하늘을 아주 단순하게 땅의 일 부분으로, 그리고 하늘을 포함하는 땅의 구조, 곧 하늘과 땅으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자연 속에 내재해 있는 신의 현존을 거부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배회하고 있는 영(靈)이라는 종교학이나 무속적(巫俗的) 신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는 이 세상에 현존해 계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즉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이시여!" 하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의 근거가 어디 있는가?

우선 공간적 차원에서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世上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동시에 구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하늘은 분명 하나님의 거처(Wohnstatt)이다(시 2:4; 123:1; 신 4:36; 26:15). 하늘 위에 세우신 하나님의 궁전에 관하여 성서는 언급하고 있다(시 104:2; 암 9:6; 출 24:10). 그리고 시 29:10은 하늘바다에 세운 하나님의 보좌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고 그 하늘 보좌에서 야웨 하나님은 지상을 감찰하신다(시 33:13f.; 비교. 11:4; 102:19).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늘에서 성전에 강림하시고(비교. 합 3:20; 습 1:7; 슥 2:17), 때때로 예루살렘 성전에 현존하신다.

이러한 증언에 근거해 볼 때,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다(참고. 마 5:33b-35).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역 장소, 곧 하나님의 일터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시간 밖에,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 곧 시간 속에 계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은 하늘과 땅의 상대적 대칭 구조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오히려 하늘의 초월성 속에 있고, 이 지상에서는 단지 상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역은 영원 속에 있고, 이 지상에서는 단지 시간 곧 역사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은 시간과 영원의 동시성 속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시-공간의 지평 융합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다. 이와 상응하게 예수의 선포 속에는 하늘과 땅에서 일어난 사건의 동시성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예수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말씀한다. 이 말씀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두 사건의 동시성에 근거해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한편으론 공간적으로 이 지상과 다른 곳을 뜻하고, 다른 한편으론 '풀리리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미래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예 29; 왕상 8:23f.), 하나님은 하늘에서 들으신다(왕상 8:36). 따라서 야웨 하나님은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운데 계신 분이다(예 23:23). 즉 하늘과 땅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장(場)이다(왕상 8:27, 참고 사 66:1f.). 이렇듯 서로 다른 곳에서 일어난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건의 동시성에 대한 이해는 신학에서 성서의 증언을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전제 가운데 하나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일어난 두 사건의 동시성에 관한 것은 성서에 나타난 시간 이해를 통하여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현재와 미래>의 시간이 <땅과 하늘>이라는 공간개념으로 전환되어 표현되는 것은 구약성서의 시간이해를 통하여 분명히 밝혀진다. 루드비히 쾰러(L. Köhler)는, 시간에 대한 구약성서적 개념은 세상을 통치 유지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약성서적 진술방식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구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야웨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신의 시간"(예 5:24; 시 145:15)에 행하신다. 구약 성서는 과거(ࠍࠣࠃࠣࠗ)와 미래(ࠛࠉ࠘ࠇࡏ, 사 46:10)를 아주 특이하게 표현하고 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미래"는 어떤 사건 혹은 장소의 "뒤(後)"에 있는 것으로서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것(예 29:11)을 뜻하고, 과거는 어떤 사건 혹은 장소의 "앞(前)"에 있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그 사건을 담지하고 제어 내지 억제할 수 있는 것(시 143:5)을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 뜻하는 "과거" 사건은 막연한 신비적인 전(前)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행하신 구체적인 사건을 뜻한다(시 44:2f.; 74:2 그밖에 다른 곳). 자연히 "미래"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사건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현재는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과거와 결합되고, 동시에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결합된다. 즉 <과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미래>는 하나님 앞에 놓여진 과제를 뜻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내일도 계실 분으로 인식된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 1:8). 따라서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장소에 대한 기술에 따라서 시간상으로 시제가 바뀌어진다. 즉 "하늘"은 시간상으로 <과거>와 <미래>를 뜻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셨다는 것은, <과거>에서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계속 관찰해 오셨다는 것이고, "하늘"로 되돌아 갔다는 뜻은 <미래>로 갔다는 뜻이다.

미하엘 벨커(M. Welker)는 하늘을 시-공간의 융합으로 보고, 하늘은 시간적으로 주로 <미래>를 뜻한다고 말한다. 몰트만(J. Moltmann)도 이를 인식하고, "초월의 새로운 모형(Paradigma)으로서 미래"에 관하여 이야기 하였다. 동시에 그는 성서가 <미래>를 단지 "하늘"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늘나라"로 바꾸어 쓰고 있는 것에 대하여 주목하도록 한다. 그래서 그는 "외관상의 초월"과 "참된 초월"을 구별하였다. 즉 그는 알려진 세계, 보이는 세계를 참된 초월경험(Tanszendenzerfahrung)과 역사적 미래로 끝없이 초월화시키는 것을 분리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차별화를 "하늘"과 "하늘나라"의 구별로 시도하게 된다. 즉 "하늘"은 단지 감각 세계의 초월을 뜻하지만, "하늘나라"는 감각적 "초월"과 시간상의 "미래"를 동시에 뜻하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시간적인 차원에서는 미래의 하늘과 땅을 의미하지만,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 혹은 질적인 차원에서는 - 현재의 하늘과 땅에 선행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와 상응하게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것은 한편에는 "미래"로 먼저 가신 것을 뜻하고, 신학적으로는 "새 하늘"로 가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늘"은 단순히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이 융합된 하나님의 사역의 장(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도, "하늘"은 단지 감각적으로 밖에는 달리 어느 방법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바로 그렇게 공간적인 의미에서, 즉 "위에 있는"것으로 파악될 뿐아니라, 또한 우리로서는 시간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위에" 혹은 "미래"에 놓여있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공간적으로 떨어진,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상대적으로 불확실한, 그래서 계시되지 않은 창조의 영역이 "하늘"로서 파악되어진다면, 하늘은 구원의 장소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늘"과 "하나님 나라"의 결합은 신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서가 전반적으로 "하늘"을 시간화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늘나라"는 미래의 나라이며 동시에 구원의 나라이다. 이에 상응하게 바르트도 "하나님께서 영원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바로 그 까닭으로 하나님은 시간을 가지고 계시다"라고 말하였다. "하늘"의 개념이 시-공간적으로서 그리고 자연적인 하늘과 신학적으로 구원의 처소로서 이해될 수 있다면, "하늘"은 "위"와 "아래"의 예리한 대립구조에서 벗어나 "위"와 "아래"의 상호 공존의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영역으로서의 "하늘"을 한정되고 제한된 구체적인 사건과 관계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건의 변화 내지 질적 구별성(Unterschiedenheit)으로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과정와 변화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사건적 그리고 상대주의적 전망에서 규정하는 것은, 하늘을 "시-공간적 영역의 변화(raumzeitlichen Bereichsvariationen)"로서 규정하기 위한 해석적 전제일 뿐만 아니라, 하늘을 양적 혹은 질적변화의 표상으로 표현하기위한 전제이도 하다. 그렇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늘"은 분명히 서로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의 시-공간적 동일의 영역을 뜻한다.


VI. 맺는 말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공간과 따로 뗄 수 없는 한 덩어리이며, <시-공간>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이 우주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아니 <시-공간>은 우주를 인식하기 위한 인식범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은 그 자체의 변화 내지는 행동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물리학을 통해서 증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시간이 물리적인 우주의 한 부분이라면, 온 우주의 창조는 곧 시간의 창조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심으로 시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러한 진술을 우리는 성서의 창조기사에서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창 1:4-5). 그러므로 기독교가 주장하는 창조는 처음부터 <시-공간>의 지평융합을 제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기독교의 종말론도 <시-공간>의 지평융합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회개와 구원의 기도를 듣고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마 23:43b). 이 증언에 의하면 종말론적 미래는 "오늘"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낙원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선포에 의하면 종말에 있을 구원의 처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증언은 시간적 미래와 공간적 낙원의 <시-공간>의 지평융합을 의미한다. 즉 예수는 시간의 동시성과 장소의 동일성이 강도에게 이루어짐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의미로 표현하면 시간과 영원의 융합이다. 이제 역으로 공간과 시간의 융합은 종말론적 진술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 1:8). 이 증언에 의하면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은 공간적으로 전에 있었던 존재의 공간과 장차 올 자의 공간이고, 그 시간과 공간은 곧 이제도 있는 - "이제"는 시간을 뜻하고 "있음(ՏԛՙՍ)"은 존재하는 공간을 뜻한다 - 전능자 곧 <시-공간>의 지평융합을 이루시는 분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증언은 우주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시간의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증언에 상응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독교의 세계관은 <시-공간>의 지평융합을 이루고 있는 세계관이고, 하나님은 <시-공간>의 지평융합 속에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전자통신으로 지구의 온 지면이 "광속도 일정의 원리"에 의해서 공간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공간으로 지각되어 시간의 차를 경험할 수 없게 된 것과 같이, 하나님 안에서 시-공간의 초월을 증언하고 있는 성서는 결코 비과학적 증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광속도를 능가하는 거리에 위치한 곳도 한 공간, 한 장소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이미 이러한 세상(세계)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분 안에서 성실하신 하나님은 불확실하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세상의 영역으로부터 순수하고, 분명하고, 의심할수 없는 곳으로 나타나신다.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서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하신다(요 1:14; 12:28; 17:1.4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