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교수  

III. 부활체의 육체성에 제한된 현대신학의 부활 논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의 부활에 관하여 논할 때 항상 걸림돌이 되는 것은 썩어 없어지는 인간의 육체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가장 논쟁점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부활한 몸의 육체성(Leiblichkeit)에 관한 것이다. 부활한 몸이 어떠한 존재냐는 질문에 대하여 현대 신학자들의 대략 세가지 종류의 답변이 있다. 첫째, 현대 신학자들은, 성경이 육(肉)과 혼(魂) 혹은 영(靈)으로 형성된 인간의 '몸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음을 주목함으로서 육체의 부활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이들은 막 12:25; 고전 15:45.50 등을 근거로 육체의 부활을 거부한다. 부활의 육체성을 거부하는 학자들은 죽음 이후 완전한 '육(肉)의 영화(Spiritualisierung des Leibes)'을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부활한 몸은 전적으로 비물질적 곧 '영(靈)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로빈슨(J.A.T. Robinson), 케제만(E. Käsemann) 스테이시(W.D. Stacey) 같은 학자들은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다. 둘째,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부활체가 현재의 육(肉)적인 몸은 아니지만, 어떤 다른 종류의 물질로 이루어진 '실체(Substanz)'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빙크(Bavinck)와 딕(Dijk) 같은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육체의 부활을 근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육(肉), 혹은 육체(ՓՁՑՎ)'라는 단어가 부활체에 대한 적합한 표현은 아니지만, 부활체도 역시 가시(可視)적인 물질로 구성될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현재의 육적인 몸과 같을 것이라고 확고히 믿고있다. 끝으로 소수 학자들만이 - 그렇지만 한국의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대부분 - 성서의 문자 그대로 부활체는 육체로 된 어떤 몸일 것이라는 것이다. 즉 신자들의 부활체는 영광스러운 육체일 것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현대 가장 위대한 조직신학자였던 칼 바르트(K. Barth)는 "육체의 부활"이라는 말을 여러차례 사용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성서의 언어를 인용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육체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현세의 인간 육체의 "새로운 시작", 혹은 "새 창조"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의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에서 "육체의 부활"이란 표현을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해온 전통적인 의미의 "육체의 부활"이 지상적 혹은 현실적 '객관적 실체'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창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창조 이전의 인간과 종말 이후의 인간이 연속성을 갖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르트의 부활의 육체성에 대한 해석은, 그가 단순히 부활한 자의 육체성에 제한되어서 부활을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라는 인간 구원 내지 영생(永生)의 차원에서 부활을 해석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이상 앞에서 언급한 부활체의 육체성에 관한 논쟁은 주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내지는 인간의 몸이 어떠한 것인가, 다시 말해서 부활한 존재의 몸이 어떠한 것인가, 부활한 자의 본질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등의 부활한 자의 '육체'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기독론적 진술은 단지 부활체의 본질이 무엇이며, 즉 부활한 자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Material)이 무엇이냐는데 있는 것 만은 아니다. 부활 논쟁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보고의 진위성(眞僞性)이다. 여기서는 소위 현대 신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온 소위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문제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객관적 사실성"이 문제된다. 그리고 둘째는 "부활" 개념에 대한 연구이다. 여기서는 "부활"과 "환생(還生)"과 "영생(永生)"의 개념이 비교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부활이다. 넷째는 "부활의 의미"이다. 즉 "부활"과 "인간 구원", 곧 "죄 용서"와의 관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추가되어야 할 연구 주제는 "부활의 시간"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분명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논구(論究)하는데 있어서 단지 부활체의 육체성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내지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논하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출발해야할 연구 주제는 "부활"에 대한 개념정의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부활 논쟁이 부활체의 육체성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부활"을 이 지상적 시-공간 안에 살고 있는 현세적 몸으로 환생(還生)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의 차이는 부활의 역사적 현실성을 논증하는데 있어서 한계점에 부딪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부활 논구(論究)에 있어서 제일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바로 "부활"의 개념 내지 의미(意味)이다. 왜냐하면 히브리 구약성서 속에서 부활에 관한 유일한 본문인 다니엘 12장 2절이하는 단지 부활을 육체의 재생(再生)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다니엘 12장 2절이하에 나타난 부활의 목적은 바로 종말론적 심판을 통한 영생(永生)이기 때문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중에 많이 깨어 영생(永生)을 얻는자도 있겠고 ..." 다니엘 12장 2절이하를 부활을 통한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12장 13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이러한 증언은, 죽음 이후 마지막 날에 성취될 부활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구원, 곧 업(業: Erbteil)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듯 의인의 부활이 소상히 예언되고 있는 것과 같이, 12장 서두에서는 거대한 환난의 시작이 예고되고 있다. 그렇지만 본문이 지시하고 있는 죽은 자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부활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 내지는 의로운자(des Gerechtens)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2절에서 "영생을 얻을 자"와 "수욕를 당하여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로 구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다니엘 12:2이하와 병행하고 있는 이사야 26장 19절, 그리고 더 나아가 이사야 53장 10-12이하의 본문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혹자는 다니엘 12장 2절을 이사야 묵시(Jesaja-Apokalypse)의 고대 자료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템베르거(Stemberger)는 이 세 가지 본문이 처음부터 진술하고자 한 것은 이스라엘의 죽은자 곧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확언(Zusage)이라고 한다. 특히 이사야 26장 19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슬에 의해서 부활한다는 것이다. 스템베르거는 이사야 26장 19절은 이 지상에서의 새로운 삶으로서의 구체적인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고 본다.
이상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히브리 구약성서가 부활에 관하여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다니엘 12장 2절이하는 부활체의 육체성에 관하여 그렇게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의인의 부활이건 이스라엘의 선택된 자의 부활이건 부활에 대한 구약성서의 증언은 죽은자의 부활을 인간의 구원, 곧 영생(永生), 하나님에 의한 깨어남,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부활한 자의 분깃과 결부시켜 복합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하는데 있어서 국한되었던 부활체의 육체성에서 벗어나 예수의 부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삼위일체론적으로 그리고 기독론, 인간학, 종말론과 연관하여 통전적으로(inbegrifflich)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통전적 해석을 위해서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바로 '부활의 개념 내지 의미'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앞에서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단순히 '육체의 다시 태어남 혹은 살아남' 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IV. 부활은 환상(Vision)이 아니라, 다시 나타남(Wiedererscheinung)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자,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현대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은, 우선 '부활(復活)'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 신앙인들이나 비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육체의 부활 내지 육체의 단순한 재생(Wiederaufleben), 소위 말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시-공간 속에 생활하던 자기 몸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환생(還生: Wiederzusichkommen)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이러한 오해를 극복해 보고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는 예수의 부활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예수의 부활은 분명 이 지상의 삶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부활은 오히려 새로운 종말론적 삶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즉 예수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이고,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롬 8:29)이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난 자'(골 1:18; 계 1:5)이고, '생명의 주'(행 3:15)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예수의 부활을 환생으로 오해하는 것을 극복하고자 시도한 이러한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부여(eschatologische Sinngebung)도 그 나름대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부활의 역사성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부활에 대한 어떠한 종말론적 의미부여도 종교적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의 객관적 사실성(Faktizität) 없이는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성서의 최초 증언은 예수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부여도, 부활한 나사렛 예수의 육체성을 논증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기독교 태동의 시발점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성서의 보고는 십자가에 죽은 나사렛 예수가 다시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예수의 현현(다시 나타남) 보고에 주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서의 증언자들은 부활한 예수가 역사 속에 우리과 함께 현존하고 있다는 명백성(Sinnfälligkeit)을 강조하는데 그 보고의 촛점을 맞추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8). 이와 같은 바울의 증언은 죽었던 예수의 다시 나타남(Wiedererscheinung)을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보고들을 통해서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보고가 일차적으로는 예수의 육체성의 부활에 대한 논증보다는, 부활한 예수의 다시 나타남에 부활 보고의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한 예수의 다시 나타남을 강조할 경우, '부활한 예수의 다시 나타남은 목격자들의 감각적 내지 종교적 환상(Vision)이 아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부활한 예수의 다시 나타남은 '감각적 종교적 환상이 아니다'라고 답변하면,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우리는 부활한 예수의 육체성(Leibhaftigkeit)에 대하여 논증해야할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9절은 다음과 같이 부활한 예수의 육체성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누가복음 24장 30절은 이점을 아주 확고히 증언하고 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39절과 요한복음 20장 27절은, 예수의 제자들 혹은 도마가 예수와 그의 상처 당한 곳을 만지고자 하였을 때에, 이에 대한 예수의 권고를 보고하고 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靈)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심지어 누가복음 24장 41절 이하는 예수의 부활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나 기뻐서 이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 놀래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래서 그들이 예수에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니, 예수께서 그를 받아 그들 앞에서 잡으셨다." 이러한 성서의 증언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참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이 그의 육체성에 제한될 때, 부활의 역사성은 그 당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만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부활한 예수에 대한 신앙은 목격자 내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에 대한 신앙 이외에 다른 것이 못된다. 이 때에 예수의 부활은 지나간 과거 사실로 사장되어버리고, 동시에 부활의 역사적 현실성(Wirklichkeit)도 상실되게 된다. 이러한 부활 개념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부활개념을 정확히 밝혀낼 필요성을 느낀다. 왜냐하면 현대인에게,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조차 부활한 예수에 대한 목격자들의 체험을, 그들이 부활한 예수의 육체를 대면(Konfrontation)하였다는 식으로 이해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부활은 어떠한 것인가? 예수의 부활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우리의 實存(실존) 속으로 다시 살아나 나타난 역사적 사건이었는가? 예수의 부활은 감각적으로 경험한 저 성서의 증언자 내지 경험자들의 주관적인 표상(Vorstellung) 속에서만 현존해 있었는가, 아니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도 현존해 있는가?
우선 많은 고대 신학자들은,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예수의 부활을 부활한 예수의 육체성이나, 부활한 예수를 대면한 목격자들의 증언에만 국한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사건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부활은 목격자들의 체험을 통한 증언 내지 표상에 대한 자세한 해명(Rechenschaft)이나, 육체로 부활한 자의 역사적 사실성을 자연과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설득력있게 논증함으로서 증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폭넓게 심지어는 구약성서의 증언까지 힘입어 하나님의 계시 사건과 연관해서 논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요한복음 1장 1절, 14절이 증언하고 있는 그의 화육(Inkarnation),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의 인간되심(Gottes Menschwerdung), 혹은 하나님의 스스로 낮아지심(Gottes Selbstherablassung)(빌 2:5이하)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태어나심이 하나님의 자기계시 내지는 하나님의 인간되심이라면, 예수의 부활은 또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 내지는 예수의 나타남과 관계되는 것이다. 만일 예수의 부활이 하나님의 자기 현현이나, 계시와 관계되지 않는다면, 예수 부활의 사실성(Faktizität)은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하여 경험하고 있는 실재(實在: Erfahrungswirklichkeit)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 과연 하나님의 자기 현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으로 완전히 끝났는가? 예수의 부활 현현은 성령의 역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 관한 성서의 증언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하고 있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의 보고들은 주로 예수의 다시 나타남에 관한 보고들이다. 비록 성서의 이러한 보고들이 부활하신 분의 나타나심에 관하여 아주 단편적으로 증언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들은 부활하신 분과의 역사적(歷史的) 만남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목격자들이 증언하는 내용들은, 예를 들면 보였다가 사라지고, -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 24:31) - 거의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아주 불확실하지만, 그러나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에 취한 목격자들의 행동전환은 그들의 목격 사실을 입증해 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목격자들이 부활하신 분의 의미심장한 현존을 강조하는 것은 - 손으로 만지고, 빵을 자르시고, 잡수시는 사건 등 - 부활하신 분의 현현(顯現)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현현은 환생(還生)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의 보고들은, 부활하신 분이 자기의 제자들과 혹은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다시 그리고 계속해서 함께 살았다는 인상을 성서 어느 한 구절에서도 보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다시 나타남은 부활 이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살았던 그러한 삶을 계속해서 살았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성경 구절도, 부활하신 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전 나사렛 예수가 살았던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그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는 것을 결코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나타남"으로서의 부활은 어떠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