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빈교수 (장로회 신학대학 기독교 윤리학)

술 담배가 아직도 문제인가?

21세기를 논하고 준비하기에도 바쁜 요즘에 술 담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그것은 이미 선교 초기, 혹은 60년대에나 토론의 대상이 될 만한 정도의 주제가 아닌가? 과연 성경이 이 문제들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내려 주고 있는가? 과연 성경이 이 문제들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내려 주고 있는가? 단지 문화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술 담배의 문제를 오늘날에 다시 재론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우리는 던질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술 담배와 한국교회는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제일까? 이 글이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입장은 여전히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성은 선교 초기나 혹은 과거에 논의되던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사실 오늘날 술 담배 문제가 아니라도 우리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회적 분야 및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지금이 술 담배를 놓고 이야기 할 때냐고 조소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21세기를 책임질 우리 청소년들의 육적, 영적 건강을 직·간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들이라는 점에서, 또한 가임여성의 음주, 흡연율 급증이 태아의 건강을 크게 위협한다는 측면에서, 한국사회의 정신문화와 직장생활의 구조 및 기업문화 전반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항력의 측면에서, 한국교회는 술 답배의 문제를 새롭게 정리하여야 한다.

술 담배를 둘러싸고 벌어지기 쉬운 교리적인 논쟁은 여기에서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술 담배문제를 논하는 우선적인 이유는 그것이 한국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과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상황에 비추어 매우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라는데 있다.

그러나 혹자는 왜 술 담배가 기독교인으로서, 또 책임 있는 사회인으로서 사는 문제와 관계되느냐는 질문을 여전히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한국사회의 현 상황에서 술 담배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먼저 살펴본 후에 그 영향력과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는 삶 사이의 상관성을 분석하여 볼 것이다. 이러한 관찰과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적인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태도를 모색하려 한다. 또한 사회윤리 구현에 얼마나 공헌하고 있는지 의심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감안할 때, 금주 금연을 내세웠던 한국교회의 전통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술 담배가 문제인가?

한국사회에서 술 담배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무엇보다도 술 담배를 통하여 이익을 보는 곳은 대한민국 정부라고 할 수 있다. 한국담배인삼공사의 막대한 수입과 기타 담배와 관련된 세금과 주류세 등을 통하여 얻어지는 세입은 자못 많다. 그러한 세입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꽤 크다고 볼 수 있겠다. 오죽하면 교육비에 투자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소주에 세금을 부가하며, 담배에 세금을 더 많이 매겨서 문화를 진흥할 생각을 하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술 담배를 하는 사람들은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납부함으로써 교욱과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애국자들인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술 담배가 만연하는 것은 이러한 범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술 담배가 이른 바 사회화의 상징적인 행위로까지 생각될 수 있을 정도의 문화적 상황에서 살고 있다. 즉, 우리가 사회적으로 무리 없이 어울리며 살기 위해선 술 담배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요즈음은 건강을 생각하느라고 조금 뜸해졌다고들 하지만 폭탄주 문화가 그 좋은 예이다. 혹자들은 폭탄주 문화의 근원으로 군대를 탓하지만, 지금은 그 근원을 탓할 때도 아닌 것 같다. 듣자하니 국회의원들도 그러하고, 또한 그들을 비판하는 일반 직장인들도 그러하고, 심지어 대학생들도 그러하다. 여대생들마저 이러한 문화에 기꺼이 동참하여 남녀의 평등성을 몸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 폭탄주까지는 안 간다고 하더라도 한 회사나 학교 혹은 공동체의 회식을 꼭 술과 함께 한다는 것은 술 담배가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처럼 술 담배가 횡행하는 문화적 상황은 자연히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그러한 행위를 모방할 수 있는 학습체계를 제공하고 있다. 학교와 학원에서는 선생님들이, 가정에서는 아빠가, TV와 영화에서는 동경하는 연예인들이 멋있게 마시고 뿜어내는 모습은 곧 그들에게 하나의 학습과정인 것이다. 또한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광고물 속에서 유명 연예인이나 외국 광고 모델들이 술 담배로 초대하는 것 역시 청소년들을 비롯한 대중의 심리를 자극하여 모방학습을 하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문화적 상황은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의 성년 됨의 기준을 바꾸어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술 담배를 해야 어른으로서 인정받는 비공식적 문화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특별히 또래 집단의 압력(peer pressure)은 그 어떤 사회적 압력보다도 강력한 것인데, 이러한 압력이 술 담배에 관해서는 항상 적극성을 띠게 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예컨데 자신의 남성다움이나 성인다움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술 담배를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압력에 쉽게 굴복하는 것은 친구와 동료로 구성되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지 않을까 하는 기본적인 두려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갈수록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는 여성층이 가부장적 사회제도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남성과의 동등함을 과시한다는 차원에서 음주와 흡연을 하게 되는 것도 주초 인구의 증가율에 한몫하고 있다. 또한 필사적인 교육열과 대학입시의 과중한 압력으로 인한 청소년층의 스트레스 해소 및 탈출수단으로서 술 담배는 매력을 대해가고 있다. 국가가 술 담배를 직간접으로 권장하는 비정상적인 사회제도와 술 담배가 한 사람의 성인됨과 사회화됨을 가늠하여 주는 기형적인 대중문화의 어울림이 우리의 삶의 기본자리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술 담배는 어떠한 의미에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필수품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 청소년 및 여성의 흡연율과 음주율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감안해 볼 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국교회의 사회윤리적 책임과 술 담배

청소년과 여성을 망라한 한국인들의 흡연 음주율이 증가하는 것, 곧 더 많은 사람들이 술 담배를 가까이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신앙적인 관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술 담배의 폐해에 대하여 객관적인 기준에서 많은 견해를 발표하고 있다. 특별히 담배에 대해서는 마약류로 판정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간접흡연의 폐해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인정되어서 법적으로도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이 제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야 비로소 비흡연자의 기본적인 권리안 건강권에 대한 인식이 공론화 되고 있다. 이제는 술의 무절제한 남용으로 인하여 피폐화 되는 우리의 가정과 직장의 문화에도 시선을 집중시킬 때이다.
어떤 이들은 술 담배가 가지는 사회화의 기능, 즉 술 담배를 통하여 스트레스를 풀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나아가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신앙과 술 담배를 관련시켜 이야기하는 것을 보수적인 신앙인의 반사회적이며 시대착오적인 반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술 담배란 신앙인이 문제삼기에는 너무도 하찮거나, 신앙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적인 성향이 어떠하든지 간에 한국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고려할 때, 술 담배를 권장할 논거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인적인 건강의 보존이라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술 담배는 결코 긍정적인 입장에서 논의될 수 없다. 이러한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개인의 기본권이라는 논리로 흡연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간접흡연의 폐해나 비흡연자들의 불쾌감에 대하여 무지한 것이거나 의식적으로 무시하려는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자신의 흡연 및 음주 습관이 자신의 2세들에게 자연스러운 학습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음도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사회적 책임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 한다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
신앙,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짐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의 삶을 살아감을 뜻한다. 따라서 신앙인이란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결코 자기 중심적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가한 것이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철학을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자들이 곧 기독교인인 것이다. 이상적인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인 자신의 몸에 대하여 책임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 공동체와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다.
신앙적인 책임의 영역은 자못 우주적이다. 개인적인 건강관리에서부터, 하나님의 피조 세계인 생태계의 보존이라는 부문이 모두 신앙적인 책임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왜 술 담배가 이러한 신앙의 책임적인 맥락에서 유독 문제가 되는가? 개인적인 건강관리의 문제라면 술 담배만큼 나쁜 음식들도 많지 않은가? 이와 같은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술 취하는 것은 나쁘다고 했는지 모르지만 술 조금 하는 것과 담배 조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느냐는 반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술 담배가 여전히 문제되는 것은 우리의 현실로서의 한국사회를 심각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술과 담배의 역기능이 매우 심각한 수준일 뿐만 아니라, 그 심각한 역기능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사람은 책임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술 담배는 중독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 중독성이 있다는 것(애연 애주가들은 중독이 아니라 버릇이라고 주장할 것이지만)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 밖에 있는 외부의 힘에 의존함을 뜻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 이외의 힘에 의하여 자신의 삶의 주요한 부분을 좌우 받는다고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애연가들이나 애주가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신화''가 있다. 그 신화는 담배와 술이 자신의 삶에 가져다 주는 긍정적인 기능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 차있다. 이러한 신화는 많은 청소년들과 또한 일시적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많은 이들을 유혹하여 결국 술 담배에 의존케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이른 바 애연 애주가들은 이러한 현실에 눈을 가리고 자기 기만에 빠질 때가 많다. 즉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며, 언제든지 안 하고 싶으면 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술 담배를 끊겠다고 작정하는 사람들의 실패율이 높은 것은 왜일까?
특별히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중독성의 문제는 심각하다. 성인들의 흡연 음주 문화에 의해서 학습화된 청소년의 음주 흡연은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 이전에 이미 자신의 삶을 좌우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학문제를 풀려면 꼭 담배가 있어야 하고, 깊은 사색을 하려면 담배가 있어야 하며, 가까운 친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려면 술을 마셔야 한다는 신화는 교묘히 우리의 삶의 주요한 부분을 나날이 술 담배에 의존케 하는 사회적 중독증으로 인도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기독교의 사회 윤리적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금주 금연이 강조되어 왔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경제가 오늘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우리의 삶이 이웃을 향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사랑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지혜로운 소비생활''이 필수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금주 금연 운동은 이 사회를 향한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 될 수 있다. 물론 술 담배만이 우리의 지혜로운 소비생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술 담배의 중독성과 그로 인한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지혜로운 소비생활을 위한 신앙적 결단은 이 사회와 국가를 향한 한국교회의 실천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문화의 모색과 주체로서의 교회역할: 신앙과 사회적 책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요사이 교회 주변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견들도 들려온다.
"술 담배에 대한 극단적이며 배타적인 태도가 한국교회의 선교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었는지 아는가? 결국 영혼의 세계는 사모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인 기준으로 인해 교인 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많은 부담을 무릅쓰고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술 담배라는 하찮은 문화적 문제로 양심에 꺼림을 받게 함으로써 결국은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의 결과는 결국 개신교의 정체 내지는 쇠퇴와 가톨릭의 약진이라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한국 개신교회가 술 담배에 대해 가져왔던 전통적인 입장에 관한 위와 같은 비판들은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기독교인으로서 윤리적인 삶을 포괄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면서도, 유독 술과 담배를 한다는 것만 도덕적 성결의 증거로 내세웠다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바리새인적 태도로서 술 담배를 참된 교인됨의 기준으로 삼았다면 그것도 잘못된 일이다.
나 자신도 고등학교 시절에 술 담배를 하는 친구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나, 그의 기도가 응답되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사실 우리가 참 신앙인이 되는 것과 책임 있는 사회인이 되는 데는 술 담배 이외에도 걸림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술 담배도 우리가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는 데 현실적으로 심각히 고려해야 할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어렵다. 금주 금연이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정서라는 측면에서도, 술 담배로 인하여 파생되는 부가적인 경제적 부담의 측면에서도(예컨대 미국의 경우 술과 담배로 인하여 야기되는 노년의 질병으로 인하여 소비되는 의료비가 학생들의 교육에 투자되는 비용보다 많다고 한다), 청소년 건강 문제 등에서도 우리는 술 담배의 문제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조금 더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술 담배의 중독성으로 인한 인간의 주체성 침해와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까지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음주 흡연자들의 술 담배에 의존하거나 탐닉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우상숭배라는 관점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강조하고 싶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내 주변의 이웃 단 한 사람에게라도 거리낌이 된다면 과감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러한 특권을 포기하거나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이웃의 범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이웃의 범위는 확대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되면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은 모든 자들, 특별히 강도 만난 자들이어야 한다.
사실 이 시대의 사람들, 직장인들, 특별히 청소년들은 소비문화 및 향락문화라는 강도를 만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적 결단과는 별로 상관없이 이 세상의 소비향락 문화가 짜놓은 틀 안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나는 이러한 문화의 상징 중 하나가 술 담배 문화라고 본다. 성인으로 보이려면 이것을 해야 하고, 고민거리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이것을 찾게 되고, 기쁜 일이 있어도 이것을 찾으며, 대화를 하려고 하여도, 홀로 깊은 사색에 잠기려 하여도 이것을 동반하여야 한다는 이 틀은 과연 누가 마련해 놓은 것인가? 과연 이러한 틀과 신앙적인 관점이 사이좋게 동반자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에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위하여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중의 하나는 술 담배를 대체할 수 있는 문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나라사랑과 자기 성결적 삶의 맥락에서 술 담배에 관한 부정적인 정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점과 나름대로는 술 담배 없이도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즐거움을 나누며 표현할 수 있고, 깊은 명상에 잠길 수도 있는 대안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과학적으로도 술 담배가 주도하는 문화의 폐해가 인정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겨레사랑은 보다 겸손한 모습으로, 그러나 보다 확신을 가지고 대안적 문화를 제시하여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는 가족단위의 놀이와 공동체 놀이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금주 금연 운동과 한국교회의 사회적 공헌

한국의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술 담배 문화는 개인과 사회의 건강 문제로부터 유흥산업의 비대한 팽창으로 인한 불건전한 경제구조 조장이라는 관점에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가 이러한 불건전한 문화조성과 경제구조의 조장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러한 국가의 역할 및 구조에 대한 재조정을 요구해야 하고, 또한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장기적으로는 담배인삼공사와 같은 기관의 해체, 단기적으로는 민영화의 문제를 조속히 제기하여야 한다. 또한 잎담배 농사 등을 생업으로 하는 농민들을 위한 대안 마련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업들은 교회만의 역량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에 건전한 시민운동 세력과의 연대를 심각하게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연합(경실련) 등과의 사안별 협력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협력은 궁극적으로는 지방자치단체 및 중앙정부 차원에서 절주 금연을 유도하는 구체적인 정책수립으로 열매 맺어야 할 것이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이하여 교회가 건전한 정치역량을 배양할 필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조정 작업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민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은 흡연과 음주의 폐해를 널리 알리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앞장서서 정신의학적인 입장에서, 사회 문화적인 입장에서의 음주 흡연의 문제점을 홍보 교육하며, 또한 절주 금연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에 직간접적인 투자를 보다 구체화하여야 한다. 동시에 술 담배에 의존하지 않고도 서로 교제를 나누며, 활성화할 수 있는 대체 문화의 육성 및 보급에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술 담배 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붙여서 정죄하는 태도보다는 그들 스스로 금연 절주 운동에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도 조성하여야 한다.

한국교회가 시급히 착수해야 할 사역의 하나는 음주 흡연에 대한 신화 및 문화로부터 우리의 청소년들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 중에는 술 담배가 결코 자기 신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자신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보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복음의 도전이 적어도 드들로 하여금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갖게 할 것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습관''에 대한 방어적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기꺼이 나의 자유를 포기, 또는 유보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리게 해줄 것이다. 그러한 결단이 일순간에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지금 우리가 청소년들을 위한 방어막을 조성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부터 절제하는 것과 대중매체를 통하여 무분별하게 쏟아지고 있는 술 담배 광고에 대하여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억제하거나 폐지하자는 운동을 펼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