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MUSA  

여는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문서가 널리 보급되지 않으면 사탄의 말과 퇴폐한 글이 널리 퍼져 사람들을 그릇되고 부패한 길로 이끌어 가서 세상을 타락과 멸망의 장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헌신과 희생에 의한 진리의 말씀의 광범위한 전파는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들 치유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건설하여 사랑과 평화의 삶을 누리며 영원한 소망이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이다.


I. 전도 전략적 차원에서 본 한국교회 문서전도

한국 교회는 선교 초창기부터 문서를 통한 전도에 역점을 두었음을 볼 수 있다. 1873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에 부임한 죤 로쓰목사는 고려문 부근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을 보고 한국인에 대한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교한데 대한 애석한 생각을 가진 로쓰목사는 한국인 선교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성경 번역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1874년에 그는 매킨타이어 목사와 같이 "한영회화"와 "한국지"그 역사와 생활 습관"을 출간하였고 1875년에는 ''예수성교요령"을 편찬하여 한국 선교에 대한 열심을 보였다. 선교에 있어서 피선교지의 역사와 문화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이 분야에 대한 출판에도 큰 비중을 두어야할 것이다. 로쓰목사는 고려문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의주사람 백홍준, 이응찬, 이성화 등을 만나 교분을 갖고 그들과 더불어 성경 번역 사업에 착수하였다. 나중에 서상륜, 김청송 등이 가담하여 처음으로 한글 목활자를 만든 다음 연활자로 주조하여 누가복음, 요한복음,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을 출판하였고 1887년에는 드디어 신약전서가 ''예수 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백홍준과 김청송은 복음서를 가지고 서간도에 가서 그곳 한인들에게 전도하였고 1884년에는 로쓰 목사 자신이 그곳에 직접 가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역사적인 한인 교회가 본국이 아닌 타국에서 먼저 탄생했다. 1883년 이른봄에 이성하는 조국을 복음화 하려는 웅지를 품고 복음서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가려고 압록강 대안 구연성에 머물면서 국경의 정황을 살피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여관방을 비운 사이에 주인이 복음서를 보고 사서임을 알지 일부는 강물에 버리고 일부는 불에 태워 버렸다. 후에 이 보고서를 접한 로쓰목사는 "성경에 던져진 강물을 마시는 사람은 생명수를 마시는 것이 되고 불탄 복음서의 재는 한국 교회를 자라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라는 한국 복음화에 대한 염원어린 말을 남겼다. 후에 이 지역에는 5개의 노회가 설립되었고 8.15 해방전에 이미 10만을 넘는 교세로 확장되었다. 이성하를 뒤이어 백홍준도 복음서를 지고 국경에 와서 정황을 보니 경계가 너무 상엄하여 도저히 복음서 그대로는 국경 통과를 할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책을 해체하여 장장을 이어 멜방을 만들고 또 파지를 사서 그 속에 복음서를 감추고 멜방으로 메고 국경을 통과한후 다시 그 멜방을 풀어서 책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한국교회 최초의 성경 반입이었다. 그는 사주, 강계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하여 일종의 기도처 같은 모임을 갖고 많은 세례 지원자들을 얻었다. 그는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로쓰 목사의 편지를 전달하고 세계 지원자들에게 세례 베풀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정부의 정식 선교 허가를 받지 못한 언더우드 목사는 신혼여행을 핑계삼아 의주에 가서 압록강 배 위에서 33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을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 불렀다. 이들 중에는 한국 교회 최초의 목사가 된 한석진도 들어 있었다. 백홍준 장로는 로쓰 ,마펫,게일 등의 선교사를 안내하여 순회 전도를 하다가 평양감사 민병석에게 미움을 사서 체포되어 2년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임오군란에 공을 세운 이수정도 함께 가서 미국 유학을 한 농학의 권위자 쓰다 박사와 교분을 갖게 되었다. 이수정은 쓰다 박사의 집에 걸려있는 "마음이 간나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신기한 글귀를 보고 감동을 받아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1884년에는 중국,일본어와 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그해 한국 선교사로 오는 호라스언더우드 및 헨리 아펜셀라 선교사가 일본에 들러 이수정역 마가복음을 들고 선교지에 부임하게 되었다. 이수정역의 마가복음이 없었더라면 이 두선교사들은 무기없이 싸움터에 나가는 군인과 같았을 것이다.
1884년에 호라스 언더우드 목사와 헨리 아펜셀라 박사를 필두로 하여 개신교 선교사들이 속속 한국에 부임하였다. 그때 로쓰 번역 성경은 있었으나 그 번역은 북방 사투리와 미숙한 번역으로 인하여 표준 성경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1887년에 새로운 번역에 착수하였다. 번역 위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성경이 완역되기까지 어떤 위원들은 500회 이상 모이기도 했다. 1900년에 드디어 신약성경이 출판되었고 1905년까지 98,498권의 신약이 팔렸다. 1910년에는 구약이 출판되어 1년 사이에 8,000권이 팔렸다. 그때 한국교회는 성경 갖기에 큰 비중을 두어 "신자마다 성경갖기''운동을 펴서 1918년에는 2,379,751권의 성경을 팔았다. 이 성경은 한글(언문)로 출판된 가장 큰 책이었다. 언문이라고 천대받던 글자를 활용하여 성경을 출판하고 대중들에게 보급한 것은 한글발전의 새로운 이정표였고 소수 귀죽이 아닌 대중을 복음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성경 보급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것은 권서 제도의 도입이었다. 1928년에는 전국에 177명의 권서들이 있었다.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성경과 쪽복음을 팔면서 전도도 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열심히 성경을 보급한 결과 1936년까지 18,079,466권의 성경과 쪽복음이 보급되어 교회성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렇게 활기를 띠었던 성경 보급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크게 위축되고 많은 시련을 받았다 .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성경 보급은 활기를 되찾아 가일층 활발해지고 기존 성경 보급방법 이외에 군인들과 학생들에게도 성경과 영한성경을 보급하였다.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문서 전도에 역점을 두었음은 종사 선교사들의 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처음 8년 동안 장로교 선교사 30명중 10명이 문서 선교에 종사하였다. 다행히 그들은 저술과 어학에 은사가 있는 분들로서 성경 이외에는 많은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1887년 아펜셀라 선교사는 오링거 선교사를 초청하여 한글, 한문, 영문을 인쇄할 수 있는 인쇄소를 설치하고 삼문출판사라 칭하였다. 이 출판사를 통하여 격주각지 교회,The Korean Repository,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및 그리스도 신문 등의 정기간행물이 발간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하여 간행된 그리스도 신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읽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에서도 읽었다. 정부는 그리스도신문 450부를 신청하여 전국 관리들에게 읽게 했고 왕실에도 2부씩 배달했다. 후에 이 신문은 임금으로부터 감사장까지 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교회는 복음의 뿌리를 서서히 내려가면서 1907년의 대부흥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에 뒤이어 1909-1910년에는 ''백만구령운동''을 계획하여 모든 교회와 모든 선교부가 참여하였다. 이때 문서전도가 우리 주목을 끈다. 대회는 백만구령운동 주제가를 지어 온 교회로 하여금 부르게 했고 많은 참가자들을 자원하여 자비로 "전도일"을 바쳐 방방곡곡,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전도했다. 그때 많은 전도지와 복음을 인쇄하여 보급했다. 대구에서는 500명의 성경공부 반원들이 16,000권의 복음, 평양에서는 800명이 26,000권, 선천에서는 1,100명이 35,000권을 보급했다. 전도일 헌일은 재령에서 10,000권의 마가복음을 사서 매일 100명씩 어깨띠를 두르고 지역사회에 나가서 전도했고 의주에서는 345명의 여자들이 2,300일을 바쳐서 1,200권의 복음을 배부했다. 전체적으로는 100,000전도일을 바쳤고 700,000권의 복음과 수백 만장이 전도지로 전국의 거의 모든 가가호호를 방문했다. 평양에서는 10일 동안의 전도 운동에 73,000장의 전도지를 배부하여 700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1880년에 설립된 기독교서회는 기독교 교리라는 책자와 복음전도지 10종의 출판을 시작으로 기독교 각 분야의 많은 서적들을 출판하여 문서선교의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1894년 정변 때 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었는데 그때 선교사들이 서회에서 출판된 문서를 가지고 가서 전도하여 그중에서 12사람을 개종시켰다. 이 일은 문서선교의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서회의 운영은 도서 판매 수익 및 개인, 단체, 선교부, 교회등의 찬조금으로 운영되었다.
1927년 서회 도서목록에는 525종의 각종 책이 실려 있었고 1937년까지 4천6백만 부의 각종 도서를 출판했다. 1923년에는 윤치호, 이상재 등 뜻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 창문사를 설립하여 신생명이라는 월간지를 펴내었다. 이 잡지의 특징은 철학, 신학, 교육, 문학 등의 글을 실어 기독교 문학 창달에 이바지 하고자 하였으나 통권 21호로 폐간되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밖에도 교파의 입지가 굳혀지면서 각 교파가 각기 필요한 서적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장로교회에서 총회종교육부를 두어 어린이 찬송가, 동화법, 신약설교사전, 장로회연감 등의 단행본과 월간 종교시보도 펴냈고 감리교회에서는 총리원에 교육국을 설치하여 주일학교조지관리, 주일학교교수원칙, 구약문학개론 등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문서전도의 의미를 한번 정립하는 것이 한국교회 문서 전도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전도의 목적이 그런 것처럼 전도의 목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영혼의 구원을 받게 하는데 있다. 이러한 구원은 전도자가 영혼을 극진히 사랑하여 희생과, 헌신적으로 말씀을 증거 할 때 피 전도자가 감명을 받게되고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서 전도를 보급만으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보급에 사랑과 희생과 헌신이 따라야 한다 .종이에 활자로 인쇄된 전도문서의 내용에 구속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피전도자가 인식하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때 구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런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전도자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피전도자는 전도 문서만 접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도문서를 전달하는 사랑의 삶이 문서 내용과 일치 하다고 인정될 때 피전도자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로쓰 목사, 이성하, 백홍준도 이런 자세로 전도했기 때문에 구령에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이 선교 전략의 열쇠이다. 한국교회 문서 전도는 이런 과정에서 볼 때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문서전도를 더욱 효과 있게 한 것은 한글의 보급이다. 선교사들은 당시 천대받던 한글로 성경과 찬송을 찍어 읽게 했고 한글을 모르는 나이든 여자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 읽을 수 있게 했다. 이 한글 보급 운동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확산되어 한글 해독자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문서 선교의 대상이 그만큼 확대된 것이다. 문서 전도는 교육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II. 한국 교회의 문서 전도현황

한국전쟁 이후 많은 선교부들이 속속 한국에 도착하여 전후 구호 사업과 문서전도 사업에 힘썼고 기존 문서 출판 기관인 성서공회, 기독교서회 및 각 교단 출판 기관이 문서 전도에 힘썼다.
1960년대이래 기독교 문서 전도의 기본이 되는 성경 번역과 출판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때까지는 한국교회가 개역성경에 의존해 왔으나 이때부터 성서공회는 새번역 신약과 공동번역 성경을 출판하여 시대와 언어의 변천에 따라 요청되는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였다. 1983년에 표준성서협의회는 표준성경 신약을 출판하였고 생명의 말씀사는 1985년에 현대인의 성경을 출판하였다. 성서교재간행사는 최근 현대어성경을 출판하였다. 성서공회는 곧 새로운 번역을 출판할 예정이고 표준성서협의회도 표준성경 구약 문장 수정 작업이 진행중이다. 한국교회 성장이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처럼 성경 출판도 1990년에 성서공회는 신구약을 합쳐 3,481,675부의 성경을 출판하였고 또 외국어 성경 100개 언어에 3,343,568부를 출판하여 수출하였으며 1989-1990년에는 113,660,000원을 지원하여 중국인을 위하여 90,000부의 성경을 중국에서 출판하였다. 한국교회는 세계 제2의 성경을 출판하는 나라이다.
1950년대에 설립된 생명의 말씀사, 기독교문사, 암사, 종로서적 및 개혁주의 신행협회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설립된 150개의 출판사가 연간 9,100여종(신간 1,100종)의 책을 300개의 서점들을 통하여 전국에 보급하고 있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보조에 의하여 출판을 해왔으나 70년대 들어서면서 서서히 자립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완전 자립출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성장과 경쟁 발전에 힘입은 것이다. 문서전도가 원대하게 수준 높이 발전하려면 경영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발생하는 수익은 문서전도에 재투자하여 기독교문화 창달에도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70-80년대는 한국기독교 출판의 부흥기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간에 괄목할만한 출판은 주석류와 백과사전류이다. 60년대 만해도 김응조 목사의 신구약성경강해, 단권주석 및 박윤선선저 성경주석이 고작이었던 것이 이 기간에는 바클리 주석, 이상근저 성경주석, 렌스키 주석, 칼빈주석, 플핏 주석 등이 출판되었고, 사전류로는 성서대백과사전, 기독교백과사전 등의 대작이 출판되었다. 최근의 출판동향을 도면 1978년에는 톱이 설교 분야 284종으로써 전체 출판의 23%를 차지하고 교육 분야 202종으로써 17%를 차지했으나 1989년에는 반대로 톱이 교육 분야 275종으로 26%를 차지했다(기독교대연감 1986-1989)신간 도서목록, 기독교문사)이것은 독자들이 단순히 설교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정기간행물은 주간신문에 기독신보,크리스챤신문,기독교신문,교회복음신문,들소리신문,장로신보,기독공보,기독교연합신문 및 새누리신문으로서 발행 부수는 모두 합하여 38만부에 달한다. 월간지는 기독교사상,현대종교,월간목회,신학지남,신앙계,신앙세계,빛과소금,새벗 등 32개 월간지이며 총보급 부수는 46만부에 달한다. 일간지는 1988년에 창간된 국민일보로써 보급 수는 90만 부이다.
한국교회 100주년을 즈음하여 기독교인과 일반 국민들 공히 독자로 하는 일간지가 출간되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등에 관하여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입각하여 보도하고 목소리를 발하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이 신문이 한 교회, 한 교단이 아닌 범한국교회 아니면 적어도 신학적 입장을 같이 하는 연합 교단지였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문이 기독교적 견해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나 전도적인 보도를 하는데 있어서 전체 한국교회를 대변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경건생활 정기간행물써는 일용할 양식, 매일성경, 오늘의 양식, 오늘의 삶, 가이드 포스트, 생명의 삶, 큐티와 만나, 다락방, 날마다 주님과 및 영한 New Daylight가 있으며 총발행 부수는 24만 2천부이다. 경건생활지를 읽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보다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데 힘쓸 것이다.
1955년에 가정문서선교회(Every Home Crusade)가 설립되었다. 영어 명칭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모든 가정을 회개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가정문서선교회는 다른 선교회 보다 특징이 있다. 전도문서를 출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람을 훈련시키고 동원하여 전도문서를 가정마다 전달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결신자 관리는 "기도"지를 통하여 양육하고 지도하여 결신자에게 가장 적당한 교회로 인도한다. 창설이래 가장 이상적인 문서 선교를 해왔다. 그러나 그 운영을 외국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했을 뿐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지 못하고 지금은 문서나 동원사업이 크게 위축된 상태이다. 이러한 선교부는 자립책을 모색하여 한국교회의 힘으로 지속되어 나갔으면 한다. 문서전도와 동원 전도를 하는 전도 기관으로서는 대학생선교회(C.C.C.), IVF, YFC, 네비게이토 및 JOY선교회를 들 수 있다. 이 선교부들은 대학생 및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전도문서들과 정기간행물들을 발간하여 학생 복음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가 범교회적으로 문서전도 운동을 대규모로 전개한 것은 88올림픽 전도대회였다. 모든 교단과 교회와 선교기관이 동원되어 전도문서를 준비하고 전도자와 상담자를 훈련시키고 선수촌에 종교관을 설치하여 상담 목사와 전도원을 배치하고 세계 각국에서 온 선수들과 관중들에게 전도하였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문서전도 활동은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 인구의 4분의 1인 천만신자를 지닌 교회의 규모로 볼 때 문서 전도 활동은 그렇게 활발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교회는 있는 지혜와 힘을 모아 문서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펴 나가야 할 것이다.


III. 2000년대 문서전도 전략

2000년대를 위한 구체적인 문서전도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위한 문서전도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문서 활동을 이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미래 학자들은 21세기를 산업후기시대 또는 ''제3의 물결''이란 강력한 말로 이 시대를 특징지었다. 이 시대에는 정보가 가장 큰 힘이 되어 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시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우리는 한국교회가 생산하는 문서를 두 부분으로 분류하여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첫째 부분은 기성 크리스천들의 발전과 성숙을 위한 문서들이고 둘째 부분은 불신자들을 크리스천화하기 위한 문서들이다. 기성 신자들을 위한 문서는 일반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하여 자연히 발전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알차고 수준 높은 교회가 되기 위하여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문서의 수준을 높여야 할 것이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문서전도 활동에 더욱 지혜를 짜내고 힘을 모아 추진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복음 전파도 정보화의 물결을 타고 과거보다 더욱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전도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문서활동은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중요한 한 부문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앞으로 문서전도도 커뮤니케이션을 열 커뮤니케이션(Hot-Communication)과 냉커뮤니케이션 (Cool-Communication)으로 분류하였다. 열커뮤니케이션이란 일차적인 정보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냉커뮤니케이션이란 피전달자의 사정에 알맞도록 정보 자료를 이성적으로 조절한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극장에서 영화구경을 하는 사람들에게 영화 화면 양면 가장자리에 코카콜라 자막을 계속하여 보였더니 영화가 끝난 다음에 극장 매점의 코카콜라가 동이 나도록 매진되었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전달자와 전달매체와 피전달자가 어떻게 연결되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가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현대 경영에 있어서는 광고비를 쓰지 않고서는 기업을 성공으로 이끌어갈 수 없다. 이 맥락에서 볼 때 선교비를 효과적으로 많이 쓸 때 복음화가 많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문서 전달자와 피전달자의 사정을 잘 알아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문서전도라 할 때 문서에만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문서보다는 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2000년대에는 정보 매체에 커다란 변화가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고 문서전도에 임해야 할 것이다. 통신과 컴퓨터의 발전으로 정보를 대량으로 축적하는 데이커 뱅크와 그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온라인 시스템이 발전하여 컴퓨터로 보는 화면책이 유행하게 될 것이다. 한국도 2000년대는 1가구 1컴퓨터를 계획하고 있다. 교회는 이런 매체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이상에 말한 것은 직접적인 문서 전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간접문서 전도에도 힘써서 직접 문서 전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해야할 것이다.
기독교는 인류와 역사에 해답을 주는 종교이어야 한다. 성경에 말한 대로 믿을진대 반드시 그럴 것이다. 기독교가 보다 더 수준 높고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인생과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인생과 사회를 반영하는 글인 문학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현대인이 각박한 산업사회에서 당면하고 있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기독교 가치관에 입각하여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글이 나와야 할 것이다. 현대인이 당면하고 있는 공해, 입시, 인간성, 상실 등에 대한 해답을 주는 글이 나와야 할 것이다. 문화를 주도하지 못하는 종교는 그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한국의 기독교는 대 일반 사회 문화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땅에 기독교적 문화를 창달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은 아직도 자기 충족을 갈구하는 단계이지 비기독교적 세계에 큰 영향을 못 끼치는 것 같다. 이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대학교와 신학교에 해당 부서를 설치하여 운영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