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기 교수

나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서운 아버지 때문에 불안과 공포가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고, 남편사랑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일 중독자로 들에 나가 살았기에 어머니의 사랑에도 허기를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봄이 되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까지 들에서만 살았습니다. 유일한 사랑의 원천이자 투정의 대상이던 어머니를 봄이면 빼앗겨 버리는 어린 내 마음 속에는 이미 비뚤어진 운전사가 들어와 앉아 있었습니다. 서른 일곱 살이 넘도록 몸은 자라도 마음은 제 나이만큼 자라지 않는 성인아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유증으로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억압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내 나이 서른이 넘을 때까지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들이 있습니다. 자존심 센 사람, 말이 없는 사람, 착실한 사람, 얌전한 사람, 소극적인 사람, 꿔다놓은 보릿자루, 사람들 앞에 서면, 특히 여자들 앞에만 서면 다리를 후들후들 떤다고 해서 붙여진 재봉틀이라는 별명까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는 것만 같았고,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의식에 사로잡혀 살았기에 나의 얼굴표정은 언제나 굳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유학생활 7년째, 그 무렵 가장 두려운 일은 지도교수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나의 태도를 오해한 교수님이 한 번은 내게 무섭게 화를 내며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태기, 자네는 무엇 때문에 나를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하는 건가? 날 그렇게 싫어하면서 어떻게 내 밑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가 없네. 자네를 5년 6개월 동안 지켜보았지만 자네에게서는 인간의 마음을 치유할 자질이 보이지 않아. 영혼을 치유할 자격이 없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이론적인 학문을 공부해 보는 게 어때? 머나먼 이국 땅에서 모진 고생을 해가며 해 온 공부인데 이제 와서 그만두라니.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결국 나는 그 매정한 교수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면서 사정했습니다. 선생님, 전 선생님을 미워하거나 싫어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무서웠을 뿐이지요. 내가 무서웠다고? 내가 자네한테 어떻게 했는데 무서워했단 말야? 교수님은 자신을 무서워했다는 내 말에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그 교수님과 나는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온 얘기를 들으면서 교수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태기, 그런 세월을 어찌 살았는가? 자네 아픔이 내 가슴에 사무쳐오네. 그 교수님은 제자의 아픔을 진정으로 공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어둡게만 살아오던 나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나의 참된 자아를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둠 속의 내가 태양이 비치는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교수님의 사랑은 숨어있는 나의 힘을 다시 불태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그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주 크고 놀라운 가능성의 그릇을 가진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제한되고 초라한 자아의 모습만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합니다. 가슴을 치면서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라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가능성을 전혀 꽃 피우지 못하는 사람을 관찰해 보면, 그 마음속 깊이에 그의 삶을 방해하는 내적인 상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은 사랑입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음식물에서 얻는 물질적 영양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와 신앙에서 얻는 사랑의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사랑은 삶을 이끌어 가는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의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주고받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매슬로우(Abraham Maslow)도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의 성장이 중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인간이 관심을 받아야 할 어떤 대상으로부터 무관심을 당할 때, 또는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서 관심을 받지 못할 때, 마음속에 실망감이 자리하고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가능성의 그릇은 부모에 의해 크게 자랄 수도, 깨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그릇은 부모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랄 때 커져갑니다.

플라톤은 한 가정의 두 기둥을 남편과 아내로 비유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 사이에 맺어진 사닥다리를 타고 자라는데, 그 사닥다리가 사랑의 끈으로 묶여져 있으면 아이들도 안정감 있게 자라고, 사닥다리가 흔들리면 아이들도 불안정하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안정된 삶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올바로 배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산을 받은 자식이 온전한 가능성의 그릇을 마음껏 활용하면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성훈련 모임에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 남자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집사의 직분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때부턴가 기도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청산유수처럼 기도하고 싶었으나, 아버지라는 말만 하고는 입이 막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다니는 일이 고통스러워졌습니다. 신앙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직장에서는 상사들에게 독설을 내뱉기 일쑤였고, 무슨 일이든 처음엔 불타는 의욕으로 달려들다가도 금새 싫증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는 4남매의 장남이었습니다. 장남에 대한 남다른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공부가 쳐졌습니다. 그의 부모는 걸었던 기대만큼의 타박을 그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학교에서 유난히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고 집에돌아온 그에게 가혹한 벌을 내렸습니다. 식구들은 모두 밥을 먹는데 식탁 옆에서 베개를 들고 서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날 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밥을 굶었습니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배고픔은 동생들 앞에서 처참하게 뭉개져 버린 자존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이 그의 자아상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그는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이면 매번 똑같은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앞에만 서면 숨이 탁탁 막히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점차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주눅이 들어갔습니다. 무슨 일인가를 시작하려 할때마다 마음속에서, 너 같은 놈이 뭘 할 수 있다고 일을 벌이는 거지? 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한 직장 상사가 아버지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직장상사를 병적으로 무서워하고 적대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성 훈련 과정에서 그의 마음에 맺혀 있는 상처를 풀어주기로 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와의 대화를 시도하도록 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뜬 아버지였지만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 굽이굽이 맺혀 있던 부자지간의 이야기를 남김없이 나누었습니다. 그때 그는 원망스럽게 아버지를 부르며 끊임없이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다음과정으로 그는 눈을 감고 예수님을 자신이 만든 상상의 방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또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얼마 후 그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방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그를 꼬옥 껴안아 주면서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팠니? 라고 위로해주고, 아버지를 향해서는, 어떻게 아이의 마음에 이 같은 응어리를 심어줄 수 있단 말인가? 라며 조용히 질책하시더랍니다. 그 경험 이후로 그의 얼굴빛이 훤하게 밝아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의 삶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35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수요 밤 예배의 대표 기도를 자청하고 나선 일입니다.

상한마음의 치유는, 내 병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어떤 운전자가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내 의식 속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나를 끌고 다니는 것일까? 등을 탐구하고 그 원인을 찾아내어 눌린 영혼을 해방시켜주는 작업입니다. 작은 느티나무 새순이 아름드리 큰 정자나무로 자라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환경조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씨앗의 건강조건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토양, 그 나무가 자라는 동안 겪는 기후, 주위에서 함께 자라고 있는 나무들 모두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주위환경 조건이 밀접하게 작용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강하게 느끼고 이웃과의 사랑을 가장 뜨겁게 체험할 수 있는 길은 성령이 역사 하시는 소그룹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영의 상처는 대부분 관계에서 시작된 것들입니다. 특히 가장 기초공동체인 가족관계에서 마음과 영과 신체가 멍들기 쉽습니다. 그런 반면, 관계에서 얻은 상처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소그룹 공동체에서 제일 쉽고 강하게 치유됩니다.

대부분의 상처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세 가지 증상은 불안, 절망, 분노입니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지식적으로 증상과 치유를 설명하는 것은 부분적인 치유행동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이 확신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분노가 사랑으로 바뀌는 것을 체험할 때에만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특히 하나님의 질서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정신으로 얽힌 소그룹공동체 안에서 치유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상한감정 치유의 7가지 효과>

첫째,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변화도, 성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가 어디로 항해할 지 모르는 상황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언제나 방황합니다. 가정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에도, 혹은 직장이 어렵게 돌아갈 때에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기 때문에 당황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쉽습니다.

치유는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분명히 보게 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결단하도록 도와줍니다. 다시 말해서 치유 과정을 통해 지금껏 자신을 괴롭혀온 어두움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 이제까지 어두움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는가를 자각하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자신을 끌고 다녀온 의식 속의 운전자를 발견해서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끌고 다니지 않도록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게 됩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옛날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상처를 치유 받기 전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서 대인 공포증을 느끼던 사람도 치유과정을 거친 다음에는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의 마음속에 맺혀있는 상처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를 향한 분노가 사라집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생겨납니다.

치유의 경험이 없는 사람과 치유의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 앞에서 판이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전자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반면, 후자는 저 사람에게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즉,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 것만큼 마음속 분노가 줄어들고, 분노가 약화되는 만큼 생명 에너지가 허비되지 않고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현대의학도 분노로 빠져나가는 생명 에너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셋째, 가정이 살아납니다. 사람들의 상처는 대부분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상처는 흔들리는 가정, 흔들리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흔들리는 가정에서 상처 입으며 자란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 문제 청소년이 되고, 그가 자라 어른이 되면 그가 속한 모든 곳에서(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단체든) 분노, 분쟁, 분열이 싹트게 됩니다. 가정에서 시작된 문제가 사회, 정치, 교육문제, 더 나아가서 종교문제에까지 파고드는 것입니다.

숨겨진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대개 사람들의 문제가 성장과정에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대부분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치유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부부관계가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신의 자녀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통감하게 되면, 자식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열매는 이처럼 행복한 가정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입니다. 목회자의 상처가 치유되면 목회자의 가정이 달라지고, 설교가 살아나면 교회 전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넷째, 건강한 영성을 얻게 됩니다. 마음의 분노가 점차 가라앉게 되면 상대적으로 사랑이 증대합니다. 분노가 도사리고 있는 마음속에는 영성이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마치 분노하는 마음속에 주님이 거할 자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상처의 치유는 분노의 마음을 사랑과 이해의 마음으로 바꾸어줍니다. 따라서 치유는 주님이 들어와 역사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정신이 건강해집니다.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은 산만합니다. 산만한 마음이나 분열된 마음에서는 어느 수준이상의 창의력이나 능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치유된 후에는 산만하거나 여러 갈래로 갈라진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창의력도 높아집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고 난 다음, 하는 일들이 잘 풀린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섯째, 육신의 건강을 얻게 됩니다. 육신의 병이 대부분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현대의학에서도 강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육신의 질병은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상처가 키워온 결과입니다. 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신체의 질병도 함께 치유되는 사례를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과 신체의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곱째,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됩니다. 성장과정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어두움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사람이라도 치유되는 순간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어두움에서 벗어나 밝은 새 삶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처럼 마음의 상처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아픔을 동일하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위로자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상처를 치유 받고 새 삶을 맛본 사람은 누구나 치유자가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