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교수  

화가가 자신의 성격과 감정, 희구하는 바를 혼신의 힘을 다하여 화폭에 담아내듯이, 상담가도 내담자와의 상담을 하면서 자신을 그 과정에 담아낸다. 예일대학교의 제임스 디테스(James Dittes)는 내담자의 간절한 요청과 그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목사의 반응이 있을 때 목회상담이 시작된다고 한다. 자기 혼자 힘만으로 자기의 삶을 바꿀 수 없다고 고백하며 이대로는 안 된다고 변화를 갈망하는 내담자의 호소가 있고, 항상 교인들의 소리 없는 외침과 눈에 보이지 않는 몸부림에 민감한 ''참여적 관찰자(a participating observer)'', ''귀를 기울이는 목자(an attentive shepherd)''의 삶을 살아가는 목사가 그들을 돕기 위하여 다가갈 때에 목회상담은 발생한다. 정확하고도 적절한 의사소통은 필수적이다. 일방적이고 자기몰입적인 대화를 하는 목사에게는 결코 수월하지 않은 과정이다.

상담은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 장기의 고수라 하더라도 처음 몇 수는 장기의 초보자도 다 알만한 의례적인 수를 둔다. 그러나 열 수쯤 교환된 후부터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수를 놓는 사람의 진면목이 장기수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홀 장기''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측불가의 수를 경험하는 역동성을 혼자서는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담도 처음에는 운동선수가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몸풀이 운동을 하듯이 날씨 이야기, 요즘 같으면 월드컵 축구이야기 등의 가치 중립적인 이야기로 시작할 수 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에 상담자와 내담자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었던 대화의 상황을 만나게 된다. 서로 당면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애를 쓰면서 서로 일체감을 갖게 된다.

그러다 보면, 상담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과거의 아픔과 상처 등이 상담과정에 투여될 수도 있다. 서로를 향하여 발생하는 감정, 불안, 초조감, 불쾌감 등이 걸러지지 않은 채 서로에게 표현되기도 한다. 내담자가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 감정 표현에 대한 정확한 관찰은 하지 못하고, 자신의 과거의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대상(주로 부모)을 향하던 감정을 내담자에게 분풀이하듯이 발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공감적 대화의 걸림돌이 된다. 효과적인 치료적 상담을 하기 위하여 상담가 자신의 자기치유와 자기성숙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상담을 통한 치료사역은 감정을 가급적 자제하고 냉정한 태도로 환자의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의의 수술과 전혀 다르다. 환자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필요 없이 수술부위를 제거, 봉합하는 경험과 기술만을 요구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을 상대방의 마음과 인식가운데 투여하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상담가는 감정적 존재인지라 정서적 상처에 노출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물론 상담가가 자신을 내담자에게 몰입하였다고 치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매순간의 상황에 임기응변의 명수가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상처를 싸맬 뿐 치료는 하나님이 하신다(I dressed his wounds, God cured him)"고 고백한 불란서의 외과의사의 고백처럼 겸허한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이 축적한 지식, 생의 철학,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경험을 자원으로 한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공감적 태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심리적 고통에 대하여는 함께 경험하려는 모험적 태도 등이 어우러져서 생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결국 상담은 종합 예술인 공연예술(performing art)과 같다. 공연 예술가가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작품, 그를 감상하고자 하는 관객, 예술의 매개체가 되는 장(場)의 세 요소가 적절히 어울릴 때 공연예술의 진가가 드러난다. 상담가의 인격, 경험, 의사소통기법의 원숙한 활용 역량, 신뢰와 공감능력, 기타 요소들이 어우러질 때 치유적 상담이 일어나는 것을 공연예술에 비기는 것은 지나친 비약적 상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