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영교수  

상담을 하러 온 내담자들이 가져오는 이야기는 대체로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을 표현해 내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하고 의미를 줄 수 있는 경험을 담고 있는 것이다.
상담자들이 듣는 이야기는 주로 내담자들의 삶에서 겪은 문제와 고통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다. 대개 고통이란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얻지 못한 데에서 생겨난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자녀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이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바라는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가 있다. 때로는 부모들의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이 조건에 맞으면 자녀가 원하는 것을 주고, 이 조건에 맞지 않으면 그것에 맞추도록 강요하고 억압한다. 이럴 때 자녀는 고통의 짐을 지게된다. 자녀들은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주고 사랑해주는 부모를 기대하고 갈망하지만 이런 기대는 곧 무너지고 그들의 자유로움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부모와 자녀의 갈등을 유발하는 시초가 되기도 한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에는 부모들도 자녀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고, 성적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부모들은 욕심이 생겨나고 자녀에 대해 기대하는 것도 많아지게 된다.
요즈음 부모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도 자녀들을 조기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바쁘게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자녀들이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부모 자신인데도. 내담자들은 이런 저런 상처를 가지고 고통 속에서 상담자를 찾아온다. 상담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 이야기에서 내담자가 담고 있는 ''이중적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Bateson이라는 가족치료 선구자는 ''모든 서술은 이중적인 서술이다''라고 말했다. 즉 사람들의 표현에는 항상 이중적 면, 말하지 않는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절망의 표현 뒤에는 그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상담자가 이 희망에 대해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그에게 새로운 땅으로 향하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절망의 표현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정말 포기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절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을 표현하는 것은 어떤 구조의 요청과 같이 사인을 보내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사인을 즉 치료의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한다. 치료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그 사람의 절망을 함께 공감해주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줄 수 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함께 느끼고 들을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 먼저 상담자가 할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서 치료에 대한 갈망 역시 읽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상담자를 만나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이야기들은 매우 사적인 것들이다. 그가 희망이 없었다면 누구에게도 들려질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상담자들은 이 이야기를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되며 이 이야기가 그 사람을 어딘가로 지금과는 다른 곳으로 인도해가도록 이야기를 바꾸어가야만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상담자는 해결책을 찾아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설 수 있는 확고한 땅을 찾아주어야 한다.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개시켜 나아가면서 문제가 중심이 아니라 그 사람이 중심에 설 수 있는 새롭고 안전한 곳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의 희망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삶의 목적이나 미래의 희망에 대한 풍부한 서술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고통을 회피하기보다는 지금 고통이 말하고 있는 소리를 자세히 들을 수 있고, 그 안에서 그가 진정으로 바라고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들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내담자와 상담자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이것은 전투에서 새 고지를 점령하는 것과 같이 내담자가 삶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고통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전달하고자 하는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것이고 고통의 힘에 좌우되던 내담자가 자신이 설 안전하고 단단한 땅을 발견해 가는 작업이다. 이 작업이 어디로 내담자를 인도해 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고통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지금 붙잡혀 있는 곳에서 발을 떼어 한 발자국씩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고, 새로운 어떤 곳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