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교수  

박사과정의 ''대상관계이론''세미나를 수강하던 목사 가운데 한 분이 논문의 주제를 ''용서''로 채택하고 정신분석 접근에 대한 이해와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연구의 주제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자칫 추상적이 될 우려와 함께 몇 권의 책을 소개하였다. 흡족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인간의 인격과 정신건강, 삶의 질을 향상시키거나 저하시키는 데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What''s So Amazing about Grace?)」(IVP 출간, 윤종석 옮김)는 필자에게 새로운 생각의 활로를 제공하여 주었다.
얀시는 복음주의 저널의 작가로서 풍부한 경험과 필치를 바탕으로 용서에 대 한 생생한 사례들을 제시하고 교회를 향하여 도전하였다. 여행이 잦은 그는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물어 보면, 대부분 귀에 거슬릴 정도로 낙태금지를 외치고 동성애를 반대하고 인터넷 검열을 주장하는 각종 운동단체가 생각난다고 많은 이들이 대답하였다. 보수정치인들의 정치공약을 자신들의 신앙고백인 양 붙들고 그것들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시위와 로비를 벌이는 정치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경건의 능력은커녕 경건의 모양도 보이지 못하는 저들을 향하여 다수 미국인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고 평가하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에 의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향기를 발하는 그리스도인, 말없이 은혜를 행하면서 전하는 소금 그리스도인인데 오늘날 과연 그러한가 되묻는다.
얀시는 자신이 겪었던 많은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이 시대의 마지막 오염되지 않은 단어인 ''은혜''를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버리셨다.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엄청난 은혜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진다.
첫째 부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므로 받아들이지 않고 도덕적 인간의 굴레를 쓰고 판단하여 자신은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거나 은혜와 관계없이 살아간다.
두 번째 부류는 자신은 어찌 할 수 없으니, 마음껏 죄를 지은 후에 용서를 구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너절하게 살아가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이는 인간이 구속을 받은 것은 자신의 능력과 기술, 인격의 함양의 결과를 인하여 받은 상급이 아니라 도무지 받을 만한 자 격이라고는 세상 천지의 어떤 것을 다 모은 들 내놓을 수 없는 형편없는 존재에게 베풀어진 은혜의 결과이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특징은 ''용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에 창출해야 하는 문화는 곧 ''용서의 문화''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힐난하던 과거의 상처를 주었던 사람 을 용서하고 그의 허물을 덮어줌으로 실은 용서를 베푸는 자가 먼저 치유되는 것을 알 지 못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흑인들을 차별하고 학대하는 백인들을 향한 포용력을 지닌 채 "용서는 간헐적 행위가 아니라 영구적 태도이다"라고 했다.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사례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하던 사람들로 인하여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의 가치를 모르고 자랐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실수와 실패뿐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에게 필요한 처방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비하하고 학대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도 일이지만,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자기수용과 자기사랑의 능력은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혜의 깨달음을 통하여 가능하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를 깨닫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은혜는 거저 주어진다.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나 가리지 않고 주어진다. 값없이 주어진 은혜를 깨달은 후에 변화된 사람은 자신의 무한가치를 깨닫고 삶을 헛되이 살아가지 않고 귀하게 살아가게 된다. 세상, 이웃,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옳고 좋은 일을 많이 했느냐에 따라 상급을 받는다는 도덕주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시고 사랑으로 바라보시는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될 때에 나도 사랑하고, 너도, 이웃도, 더 나아가서 원수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 복음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인 나부터 용서하고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