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영교수  

어떤 때 우리는 아주 귀한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 느끼는 그 기쁨은 얼마나 큰가? 한 생명의 탄생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기쁨을 준다. 그 순수한 생명이 주는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생명을 우리의 가장 귀한 선물로 받아들인다. 그 기쁨은 어느 것보다 크고 대신할 수 없는 신비이다.

예전에 나는 한 국제 입양 기관에서 입양을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로 일한 적이 있다. 내 주요 업무는 입양의 모든 과정에서 입양하는 부모들과 입양되어 온 아동들을 돌보는 일이다. 입양을 신청한 부부를 상담하고, 그들의 가정을 방문해서 그 가정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가정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그들은 모두 진심으로 입양을 원하며, 어떤 이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끝까지 책임을 지고 아이를 잘 기르겠다고 약속한다. 어떤 이들은 복지사가 오기 일주일 전부터 집안을 샅샅이 청소하고도 불안에 떨며 입양 심사에 통과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 집에 아이가 도착할 때까지 그 부모들의 기대, 조바심, 초조함 등을 함께 겪는 나로서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그 부모들의 아픔과 노력과 조바심, 그리고 그들의 기도와 애타하는 모습을 통해 많이 깨달을 수 있었다.

부부가 입양을 결정하기까지는 많은 고뇌와 좌절, 남모르는 슬픔이 따른다. 자신의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이 땅위에서 이어갈 수 없음을 뜻한다. 수 없는 노력과 실패와 좌절이 있은 후에,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이 반드시 자신의 아이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일단 입양을 결심한 후에는 벌써 그들의 모든 노력과 기대와 기쁨은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 집에 오게 될 생명을 향한다. 그때부터 그들은 이제까지의 슬픔이나 좌절을 벗고, 벅찬 기대를 안고 자신의 집을 찾아올 선물, 가장 귀한 선물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아기가 도착했을 때의 그들의 눈물과 그 감격은 또 얼마나 큰지. 바로 온 천하를 얻은 기쁨이다.

우리 자신은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생명이 너무나 쉽게 버려지고 있다. 나 자신이 오늘 누군가에게 선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발견은 큰 기쁨을 준다. 그것은 무엇을 얻기 때문에 얻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다. 내가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에 얻는 기쁨이며,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기쁨이다. 나 자신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유대인 랍비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쥬샤(Zuscha)라는 분으로 그의 임종이 다가와 제자들이 그를 찾아봐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어떠할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이 나이 든 랍비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글쎄, 난 정말 모르겠네. 하지만 한가지 확실히 아는 건 있지. 내가 거기 당도하면 ''너는 왜 모세 같지 않았느냐?'' 아니면 ''왜 다윗 같지 않았느냐?'' 이렇게 질문 받지는 않을 걸세. 나는 ''너는 왜 쥬샤 같지 않았느냐?'' 라고 질문 받을거야."

이 질문의 포인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일 수 있을 때 가장 우리의 삶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음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나무는 나무이기 때문에 그 나무의 목적과 소명을 다하는 것이고, 꽃은 꽃이기 때문에 그 창조된 목적을 성취한다. 우리는 남이 아닌 우리 자신일 때, 우리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고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가는 그보다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이어서 기쁜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나는 누군가와 이 기쁨을 나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우리가 태어남으로써 누군가의 기쁨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위해서 온 선물이고 서로를 위한 선물이다. 나 외의 누구도 성취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삶에 온 우리의 목적과 소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