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민 교수 (총신대학교 교수) 2004.12.24 조회 : 371  

믿음은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의 고백적 믿음이 삶의 현장에 실재화(actualize)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면 순종해야할 명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믿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시키는 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도록 하는 수단이다. 그 결과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동참하게 된다. 따라서 순종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즉 그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사랑으로 요약된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계명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으로 집약해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사랑의 인격체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빌2:7-8)은 사랑의 주체로서 행동적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말씀과 행위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그의 가르침의 대부분이 그의 행하신 것에 대한 설명이다. 따라서 우리가 따라야 할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며, 현실 상황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곧 믿음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도 모든 신앙의 내용은 사랑이 전제되고야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없는 영적 경험들, 심지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고전13:1-3). 릭 워렌(Rick Warren)이 말하듯이 사랑이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경우도 말씀에 대한 순종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 이웃에 대한 종 됨으로 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한 가장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두에게 가장 충성된 종이며 모두에게 종속된다." 이것은 믿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가운데 구현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했다면,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장한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라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사랑의 실천에는 아주 미숙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동안 이단으로부터 복음의 교리를 수호하는 데는 그토록 단호했던 교회가 믿음의 실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교회가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는 희생과 사랑을 많이 강조해 왔지만 주로 말이 앞선 감이 없지 않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 믿음의 본질은 아니다.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요17:14, 16)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가운데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마5:13-14).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선언하신다. 바꿔 말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빛일 수밖에 없고 소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빛과 소금으로 비유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은 그래서 선택적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현실 가운데서 소금이 녹아지듯이 희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 토대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소극적인 측면은 이웃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는 것과 적극적인 실천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전자는 법이나 도덕의 실천이고, 후자는 구제 혹은 나눔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비도덕적이 되는 것은 대부분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만약 자신의 욕망을 절제한다면 도덕적인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명령을 부여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영원한 가치'의 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이웃에게 손해를 주지 않는 정도의 수준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보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셨고, 우리에게 그것을 명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고 다른 외형적이고 가시적 목적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중요한 사명을 잃어버린 것임에 틀림없다. 종말의 징조는 세상의 타락보다는 교회의 세속화라고 말할 수 있다(딤후3:1-5). 세속화란 세상과 동화되어 악을 행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사랑의 적극적 실천을 외면하는 것도 해당된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 욕망에 매어있기 때문이고 이는 곧 세상에 속한 옛사람의 태도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믿음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약1:27)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령 받은 초대교회에서는 '믿는 무리들'이 각자의 소유를 나눔으로써 궁핍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행4:32-35).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실천자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명령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요 은혜 받은 믿음의 공동체가 가져야 할 본래 삶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