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형목사 (중앙신학대학원 대학교)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위한 새로운 방법­-로마서 7장에 나오는 바울의 갈등에 대한 정신역동적 이해-­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의 딜레마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하면서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라고 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매일 새롭게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그렇게 새로워지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자라는 것이 우리의 한결같은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과연 처음 신앙생활의 기쁨과 감격을 유지하면서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변화되지 않는 내 자신을 보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옛 성질을 죽이면서 살아가는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제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진정한 샬롬이 있으며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풍성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이요 그리스도의 사역자라는 말을 진심에서 우러나와 하고 있는가?
이런 물음에 자신 있게‘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는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면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했던 그 고백을 하였을 것이며, 사도 바울이 빠졌던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신앙 안에서 제대로 성숙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며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했던 고백의 내용, 즉 모든 인간 안에서 죄의 종노릇 하는 세력의 실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주제로 의견을 나누고자 한다.

1. 사도 바울의 경우

로마서 7장에 보면 유명한 사도 바울의 고민이 기록되어 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쫓기를 원하지만 실제 행동은 그 반대로 나타나니 도무지 왜 그런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문제의 현상을 기술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을 한다. 그런 다음 결론적으로 이렇게 정리한다.“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는데,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1-24).
이렇게 딜레마를 호소하면서 도무지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이 탄식을 하던 그가 갑자기 돌파구를 찾았다면서 그가 발견한 문제의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언 듯 보기에 참 좋은 해결책인 것 같은데 문제는 우리 삶의 실제에서는 그렇게 되질 않는다는데 있다. 아무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 거하고자 하나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육신의 법이 우리를 사로잡아 죄의 법 아래에서 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래로 영적인 성장이나 신앙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풀지 못한 실제적인 난제일 것이다.

2. 원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

사도 바울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두고 앞에서 언급한 그런 기술을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가 다 인정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죄의 세력이라고 묘사한 어떤 제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힘이 각 사람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미녀와 야수라는 영화에도 그대로 잘 묘사되어 있다. 야수로 변한 왕자의 마음속에 야수와 같은 성질이 있는 것이며 이것이 승화가 되어야 진정한 왕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력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새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현상이라도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볼 수 없는 것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상상하고 그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해서는 현대 정신분석과 이를 근거로 발달한 정신역동이론이 아주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정신과 마음에 관한 많은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된 상태이다.
이 정신역동이론에 입각해서 사도 바울의 문제를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신역동이론을 바탕으로 한 해결책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다.

1) 이중적인 인간
인간은 누구든지 이중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곧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영화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밝고 긍정적인 면이 있으며,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어둡고 부정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다.
이 두 부분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내 속에 있는 어두운 부분이다. 이 것만 없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인데 이 어두운 면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을 본다. 예수도 이런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경고를 발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7-20).
우리 안에 있는 이 어두운 부분은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세력,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괴물 같은 존재, 내 안에 있는 사탄의 세력, 내 속에 존재하는 타인, 내가 떼어놓을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 등이다.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나서는 이 어두운 부분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나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속에 있기 때문에 내가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여 어떻게 하던지 없어버리려고 애쓰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어두운 부분의 정체
우리 안에 있는 어두운 부분을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라고 했는데, 이 악한 생각이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정신역동이론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프로이트는 에너지 현상으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신 현상을 설명한바 있다. 근본적으로 이 에너지는 모두 몸의 작용으로 일어나는데 신체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신체 에너지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신체 작용, 마음 작용, 사고 작용, 두뇌 작용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 감정 작용으로 일어나는 마음 에너지의 현상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살면서 마음의 본질이 되는 감정을 너무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감정을 무시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인간관계와 개인의 문제와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문제는 바로 이 마음의 문제, 감정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 몸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왜냐하면 감정은 몸의 반응으로 항상 일어나기 때문이다. 몸이 감각을 하는 곳마다 감정은 동반되며, 이성이 사고를 하는 순간마다 감정이 바탕을 이루어 사고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성이 발달하기 이전에부터 몸의 형성과 함께 감정은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감정은 원초적 사고라 할 수 있다.
둘째, 감정은 몸의 떨림으로 일어난다. 몸의 떨림은 신체 에너지의 작동이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이미 에너지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격분, 기쁨, 화, 슬픔 등을 보면 알게 된다.
셋째, 모든 감정은 상황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일어나는 자연스런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에베소서 4:26). 그럼에도 편의상 우리는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으로 나눌 필요가 있는데 그 작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소위 긍정적인 감정(밝은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일어나게 되면 몸에 좋은 호르몬 작용을 동반하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한 후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이것이 모든 밝은 감정의 특징이다. 밝은 감정의 경우는 달리 표현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신의 표현 방법을 찾아서 몸을 통해 표현되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문제는 어두운 감정이다. 밝은 감정이 일어나면 좋은 효과를 일으키며 저절로 해소되는데 반하여 부정적인 감정은 일어나면 부정적인 호르몬이 분비되어 신체에 나쁜 영향을 끼쳐 몸과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 또 이 어두운 감정은 그 원인을 알고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여 해소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알고 해소해 주지 않으면 일어난 어두운 감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어두운 감정은 몸 안에 남아서 심리적 신체적 장애를 일으키고, 대인 관계의 문제를 일으킨다. 신체 질병 가운데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 해소되지 못한 어두운 정서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 많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감정은 암 조직에 비유할 수 있으며 잉크 방울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의 암세포가 점점 몸에 퍼지듯이 그렇게 응어리진 감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수 있으며, 잉크 한 방울이 전체 물을 잉크 색깔로 물들이듯이 우리 감정을 물들이게 된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힘들어하고 나를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생각과 마음과 몸에 쌓여 있는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살아서 하나의 세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또 다른 법은 바로 해결되지 못한 채 내 속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어두운 감정의 복합체이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두운 감정의 근본에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형성된 감정의 잔재들이 깔려 있다. 이 감정의 잔재들 가운데는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고 이해 받지 못한데서 생긴 미움과 슬픔과 증오와 화와 분노와 적개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나의 몸 상태, 마음 작용, 사고 작용과 행동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세력으로 작용한다. 소위 말하는 무의식의 실체가 바로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이다.

3. 우리를 사로잡는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방법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게 되는 잘못이 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야 하고 우리는 그저 믿고 기도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다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모든 일을 이루셨다.
이제 이 구원을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우리가 그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으로 남게 된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국 열쇠를 네 개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들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라고 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해야 한다. 특히 앞에서 설명한 대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들어 놓은 감정의 응어리의 결집이라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철저히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우리가 만들어 우리 안에 있는 감정은 우리가 풀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인간이 해야 하는 일
첫째: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는 일: 하나님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거하는 일.
둘째: 나와 평화를 이루는 일: 하나님께서 내 모습 이대로 받아들이신 것처럼 나도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셋째: 다른 사람과 평화를 이루는 일. 내가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만큼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2) 나를 받아들이고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해 해야 할 일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2).
이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이렇게 마음이 새로워질 때 그만큼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감정의 응어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 쌓여서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감정의 응어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내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감정은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아주 소중하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 곧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특별히 어두운 감정인 경우는 더욱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문제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감정을 억압하도록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감정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으며 더 나아가 감정을 억압하며 전혀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먼저 감정을 알아차리고 느끼고 표현하는 훈련을 많이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내 감정의 상태를 지켜보는 일이 필요하다. 내 감정을 지켜보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 진정으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고로 언제나 내 감정이 무엇인지 깨어 지켜보아야 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지켜보는 훈련이야말로 감정의 응어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훈련이 된다. 이렇게 깨어 지켜 볼 때 그 다음 과정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첫째, 알아차리기--자기에게 일어나는 감정은 미세하더라도 알아 차려야 한다. 깨어있어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알아차린다.
둘째, 인정 및 수용하기--일어나는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마음에 일어난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셋째, 표현하기--일어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 준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적절한 방법으로, 그러나 혼자 있을 때는 일어난 감정 그대로 표현해 준다.
넷째, 공감하기--표현한 다음 자기 자신에게 아, 그래서 내가 기분이 상했구나 하는 식으로 공감을 해 준다. 공감을 해 줄 때, 그 감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섯째, 달래고 사랑하고 품어주기--공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얼마나 괴로웠겠니 하는 식으로 달래주고 사랑해 준다.
감정이 올라왔을 때 빨리 떨쳐버리고 헤어 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상처 난 마음을 달래는 심정으로 나의 감정을 충분히 느껴주고 충분히 표현해 주어야 한다. 그렇
게 충분히 마냥 내 감정에 젖어 느끼고 표현하게 되면 저절로 그 감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3) 더 깊은 곳으로 탐색해 들어가는 일의 중요성
이렇게 매번 일어나는 감정을 표현하고 공감해 주면서 현재 일어나는 사건이나 인간관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어두운 감정을 쌓지 않게 되지만, 내 속에 쌓여 있는 감정을 녹이기 위해서는 이 과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즉 주기적으로 같은 어두운 감정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이렇게 하는 것에 더하여 내 속으로 탐색해 들어갈 필요가 있다.
내속에 무슨 감정의 응어리가 있기에 이런 상황이면, 이런 인간관계에서는 꼭 이런 식으로 반응하도록 할까 하면서 탐색해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자신만의 고유한 감정체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성격이나 행동, 태도나 말투 등 자신의 전체적인 삶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만의 고유한 핵심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감정을 중심으로 감정체계를 형성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핵심감정은 엄마뱃속에서부터 6살 때까지 주로 형성되는 감정 체계로 한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배여 있으며, 한 사람의 사고와 정서와 몸짓과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이다. 이 핵심감정은 무의식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이 핵심감정이 우리를 사로잡아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 죄의 세력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철저히 감정을 품어주는 가운데 과거의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만나서 이 전 과정을 반복해 주면 내 속에 쌓인 핵심감정의 응어리는 풀어진다.
이렇게 감정을 품어주는 훈련에 숙달이 되면 이 과정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감정을 만나 표현하고 공감하고 달래주는 과정이 바로 내적치유의 핵심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나의 아픈 상처로부터 치유를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작업과 과거 감정의 응어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감정을 품어주는 작업은 내가 나를 품어주고 달래주는 작업이다. 문제의 당사자를 만나서 그 사람에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으면 효과적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렇게 꼭 당사자를 만나지 않더라도 이 과정을 밟아 내가 나의 감정의 응어리를 품어주면 내 속에 있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4. 예수의 사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 온전한 치유자이신 예수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서 온전히 살아간 분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아주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준 분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현해야 할 구원받은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의 사역을 생각할 때 십자가의 사역만을 크게 부각시켜 강조한 나머지 다른 중요한 사역에 대해서는 소홀히 취급한 면이 없지 않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십자가의 사건이 제일 중요하고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제자들을 키워 자신의 일을 맡긴 사역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훈련시킨 사건 역시 아주 중요한 사건인데, 이 사건 속에는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 것인가에 대한 길이 제시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훈련시킨 일은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제자 훈련은 아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까지 신뢰하는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그 정도로 제자들을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켰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5:13-15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겠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는데,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제자들은 예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인격으로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제자를 훈련시킨 제자훈련의 핵심은 그들을 변화시켜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한 데 있다. 이런 훈련은 단순히 말씀을 가르치기 만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곧 그들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신뢰할 수 있는 인격으로 변했기 때문에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다.
예수가 제자들을 변화시킨 비밀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당연히 예수의 온전한 인격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정신치료와 심리치료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곧“온전한 치료자는 온전한 인격자이다.”라는 말이다. 온전한 인격자로서 예수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일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아,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앞에서 언급한 우리 인간의 어두운 감정의 문제로 인해 생긴 부정적인 면은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받아주고 품어주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나를 온전히 품어주는 존재를 만나게 되면 저절로 그 어두운 감정은 녹아나게 마련이다. 온전한 인격자인 예수는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바로 그런 태도 제자들을 받아주고 품어주어 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온전한 인격자인 예수가 변화된 사도들을 만들어 냈듯이, 변화되어 성숙한 사역자가 변화된 성도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게 만든 예수의 제자 훈련의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정신역동이론에서 발달시킨 정서이론을 도입하여 복음에 접목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감정의 응어리에서 해방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온전한 인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 가는 사건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복음은 온전한 복음으로서 역사 하게 되며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풍성하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안동교회농촌목회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