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이해와 용서'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일 때마다 가끔 들여다보는 시집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 더 마음 절이는 것은 작은 웃음이다」
나의 약한 부분을 자주 건드리거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볼 때 미소를 잃어버릴 때가 참으로 많다. 잦은 부딪침이 일어날 때면 '왜 하나님은 하필 저 사람과 함께 일을 하도록 하셨을까?'라는 푸념과 불평불만이 쌓여간다. "이렇게 자존심 구겨 가면서 해야 하나, 아휴!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거야."
평소에는 고요히 쉬고 있던 죄의 공장이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가시 돋친 말이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을 들을 때면 힘차게 발전기를 가동시킨다. 어느새 상대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겨놓고 정죄의 화살을 수없이 꽂는다. 그리고는 그의 결점을 하나둘 들추어내며 나의 정당함을 변호하기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는 크게 보이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이지 않기에(마 7:3-4). 그러나 선하신 주님께서 사람들과의 부딪침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고 석공이 돌을 다듬듯 모난 부분을 깨뜨려 다듬어 가심에 감사하다. 또한 그 속에서 겸손과 인내를 배우게 하심에 감사하다.
며칠 전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아 함께 일하는 사람과 마찰이 있었다. 겉으로 그다지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외형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을 향한 미소는 잃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의 모습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 딱딱한 말씨로 변해가고 있었다. 애써 숨기려고 했지만 조금씩 가까운 사람에게 그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일터에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렇지만 마음의 부대낌은 저녁까지 계속 남아 있어 괴롭히고 있었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책꽂이 정리를 하는데 책 속에 끼여 있는 종이쪽지가 살며시 빠져 나왔다. '사랑하면 용서가 되고 용서를 하면 평화가 온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언젠가 국내 성지순례를 할 때 어느 분께 들은 말씀을 적어 놓은 글이었다. 그 글귀가 가슴을 시리게 했다. 먼저 용서의 손을 내밀지 못하고 먼저 이해하지 못한 나의 옹졸함으로 인해 사무실의 평화를 깨뜨렸구나!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얼마 후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주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깨를 짓누르는 십자가, 수없이 던져지는 모욕과 멸시, 주먹만한 돌이 날아오고, "퇘! 퇘!" 하면서 침을 뱉고 있다. 머리에 쓴 가시면류관 밑으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고통으로 인해 입술은 점점 더 검붉게 변해 간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애절하게 부르짖는 간구의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히려 저의 가시 돋친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더 많은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깨닫지 못한 이 무지한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소서. 그래서 강퍅해진 저의 심령을 녹이소서. 저의 교만함을 깨뜨려 주소서." 방안에는 어깨를 들썩이는 작은 아이의 흐느낌만 남아 있었다….
가룟 유다, 은 30냥에 스승을 팔아 버린 배반자. 주님은 되어질 일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가시와 같은 그를 제자로 받으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가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며 끝까지 사랑으로 대하셨으리라.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하라고 온몸으로 보여주셨는데, 나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해주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뜻에 나는 얼마나 성실히 반응했던가.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래, 이제 가시 같은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것은 나의 몫이야. 예수님의 생명을 찾아 나선 순례자, 주님과 하나 되기를 꿈꾸는 자. 그러기에 사람들로부터 날아오는 수많은 가시가 가슴에 박히더라도 온전히 기뻐해야지. 이제는 사람들의 칭찬과 위로를 찾기보다는 빛으로 조명하는 책망(엡 5:13)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직은 나를 무시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공급되는 사랑을 힘입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아닌 작은 웃음으로 대하고 싶다.
"주님, 가시 같은 이웃에게도 언제나 작은 웃음을 잃지 않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