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종교적 배경

당시 문화는 크게 셋이다. 첫째는 유대교(Judaism), 두번째는 헬레니즘(Hellenism), 세번째는 로마의 제국주의다. 그 중에서 유대교는 기독교의 뿌리가 되었고 헬레니즘은 기독교가 성장한 지적 토양이 되었으며, 로마의 제국주의는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 즉 로마의 안정된 정치와 법률, 건축술, 조직력 등은 敎會 구조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이 세 문화는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적이 된 것은 역설적 사실이다.


1.유대교(Judaism)

1세기의 팔레스틴 인구는 150-200만 정도였으며, 유대인이 약3/1정도(50-60만) 되었다. 그러나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유월절 때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유대인의 숫자가 무려 270만이나 되어 당시 예루살렘의 모습이 어떠함을 볼 수 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유대교엔 크게 세 종파가 있다.


(1)바리새파(초자연주의자)


당시 바리새파의 수는 6천명이 약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바리새파의 기원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마카비 전쟁 전후 일어났던 하시디안 ,즉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그것이 바리새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135-105 B.C.)이다. 그 뜻은 (파르쉬)(분리하다)란 뜻으로 그들의 배타적 성격을 볼 수 있다.


(2)사두개파(자연주의자)


숫자로는 바리새파보다 소수이나 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이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그 시작은 다윗 당시의 사독(왕상1:32343845)에게서이며 A.D.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3)에쎈파(금욕주의자)


聖經엔 이 에쎈파(the Essenes)에 대하여 놀랍게도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프스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플리니(Pliny)등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약 4천명쯤 되었으며, 유대의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었으나 중심은 사해의 서쪽 광야였다고 한다. 이 종파는 B.C.2세기부터 A.D.70년까지 계속되었다.


에쎈(Essenes)이란 원래 (호씨오스  거룩)이란 말에서 왔다고 필로는 말한다. 그들은 흰옷을 입었고 독신을 강조했다. 어떤 그룹에서는 자녀를 위해 결혼을 허락했으나 대개는 양자를 데려다가 길렀다. 생활은 손 씻는 결례, 세례, 기도 등 수도원적 생활을 했다. 기독교와 비슷한 점이 많아 어떤 비판적 학자들은 기독교의 고향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쿰란(Qumran)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에쎈파의 회원이 되려면 도합 3년 간의 견습기를 거쳐야 하며 서약을 한 후 세례를 받은 후에야 된다. 그들은 율법 준행이 바리새파보다 더 엄격하고 다른 사회에서 들어온 음식은 먹지 않았다. 에쎈파는 제사장과 그들을 보좌하는 레위인, 이스라엘 자녀들과 할례를 받지 않은 문(門)의 개종자들이 있다.


(4)서기관과 랍비들


유대교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율법에 대한 깊은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계급, 즉 서기관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각 회중들마다 자신의 사본을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구약, 그 중에서도 율법을 베끼는 전문가들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聖經학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서기관의 유래이다.


서기관의 대표적 인물은 에스라(느8:9)이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흔히 율법 교사, 또는 단순히 교사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은 물론 유대와 갈릴리 각 지방에도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어 聖經에 보면 (바리새인의 서기관)(막2:16)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행23:9)라고 표현하고 있다.



2.헬레니즘(Hellenism)

기독교의 지적 토양을 준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헬레니즘, 그 중에서도 헬라의 철학이다. 이것은 신 플라톤의 철학이 어거스틴(Augstine)을 통하여 신교(新敎)의 교리적 체계를 세운 것과 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이 아퀴나스(Aquinas)를 통하여 구교(舊敎)의 교리적 체계를 세웠다는 이 단 한 가지만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헬라의 문화 일반에 관한 연구나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흔히 주장되는 신비종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철학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1)플라톤주의(Platonism)


플라톤주의는 주전 4세기에 살았던 플라톤(Platon)에서 연유된 사상적 체계를 말한다. 그는 쏘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로서 이원론적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즉 세상의 물질세계는 보이지 않는 이데아(Idea)의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함으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의 세계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변하는 비실재(非實在)의 세계에서 참으로 실재(實在)하는 세계에 이르기 위하여 반성(reflection)과 명상(meditation)과 고행(asceticism)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지식은 구원이며 죄는 무지(無知)라고 하였다.


플라톤주의는 新約 聖經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이원론(Dualism)은 1세기에 일어났던 영지주의(Gnosticism)와 3세기 플로티누스(Plotinus)에 의하여 소개된 신플라톤주의에 의해서 반영되고 있다.


(2)영지주의(靈知主義))


영지주의(Gnosticism)란 이름 그대로 헬라어의 지식(知識)을 뜻하는 그노시스 )란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들은 영지(靈知)에 의해서 구원받는다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천하고 타락한 이 세상을 창조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하나님에게서 여러 단계로 그의 신성(神性)이 발산되어 마지막으로 물질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물질은 악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물질 세계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나온 사상은 첫째로 금욕주의이고, 두번째는 영(靈)은 깨끗하고 실제하나 물질은 더럽고 실제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에 대해 바울은 (골2:821)에서 지적하고있다. 놀라운 것은 한국 敎會에 이 영지주의 사상이 여러 형태로 흘러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3)신플라톤 주의(Neo-Platonism)


플라톤의 원리들은 에집트의 리코폴리스(Lycopolis)에 살았던 플로티누스(Plotinus, A.D.204-269)에 의해 소개 및 발전되었다. 또한 플로티누스는 폐르샤의 이원론(二元論)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신플라톤주의라 함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상으로 보는 이원론과 폐르샤의 빛과 어두움 둘로 보는 이원론 사상에 기초한 종교철학(宗敎哲學)을 말한다.


따라서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영(靈)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본다. 그들에 의하면 구원이란 감각에 의존하는 모든 육적 욕망을 제거하고 영의 생활을 하는데 있으며 그것은 죽을 때 이루어진다고 했다. 신플라톤주의가 플라톤주의와 다른 점은 영적 생활이 지적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무한자(The Infinte)와의 신비적 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본 점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와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의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교리와 조화할 수가 없다. 그것은 육체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歷史)속에 오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4)에피큐리안주의(Epicureanism)


에피큐리안주의란 341-270 B.C.에 살았던 에피큐러스란 사람의 사상적 체계를 말한다. 에피큐러스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작품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원자(原子)가 우연히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 에피큐러스의 우주관은 현대의 무신론적 물질주의 진화론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세계엔 목적(目的)도 절대선(絶對善)도 없다고 했다. 있다면 최고의 가능한 선(possible good)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쾌락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쾌락이란 고통이 없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이 사상을 흔히 육체적 쾌락주의로 보는 것은 사실과는 다른다. 반대로 보다 지속적이고 완전한 만족을 주는 즐거움을 택하라고 가르침으로서 정신적 쾌락에 강조를 둔다. 이 에피큐리안주의에 대해서는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할 때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5)스토아 철학(Stoicism)


사도행전에서 에피큐리안주의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은 스토아 철학이다. 이 스토아 철학은 지중해 동부에 있는 키프러스의 제노(340-265 B.C)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다. 그는 인격적 신(神)을 인정치 않았으나 우주가 절대이성(Absolut Reason)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그는 이성에 일치된 생활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하면서 개인적 감정은 실체가 없는 해로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완전한 자기 절제를 목적으로 내세웠다.


이 스토아 철학은 고상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와는 다르다. 여기엔 자유의지나 악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악은 선의 일부에 불과함으로 그들에게는 개혁이나 변화가 배제 된다. 그들의 신(神)은 비인격적(非 人格的) 존재임으로 인간의 일에 인격적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윤리관이 많은 점에서 기독교의 윤리관과 유사하지만 그들의 전제와 실천은 서로 다르다.


(6)냉소주의(Cynicism)와 회의주의(Scepticism)


냉소주의(冷笑主義)는 플라톤의 철학과 같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소크라테스는 단순한 욕구를 가진 사람만이 어려운 역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냉소주의자들은 최고의 덕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욕망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들은 모든 표준과 법을 포기하고 완전히 개인주의자가 된다.


최초의 회의주의자는 엘리스의 피로(Pyrrho of Elis,365-295 B.C.)이다. 그들은 경험에 의지하기 때문에 궁극적 표준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경험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모든 판단은 상대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가벼운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겁게 느끼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회의주의자들의 논리적 면은 완전한 지적 마비로 끝난다. 아무튼 냉소주의나 회의주의는 표준을 포기하는데서 시작한다. 전자는 윤리를 다루었고 후자는 지성(知性)을 다루었다. 기독교가 이들과 크게 다른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절대적 표준이라고 믿는 점이다.



3.로마의 제국주의(帝國主義)

유대교와 헬레니즘과 함께 기독교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로마의 제국주의이다. 특히 그들의 법률과 모든 제도는 초대 敎會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의 건축 양식이나 음악 같은 예술은 중세기에 그 꽃을 피우기까지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로마의 세계적인 통일은 온 세계를 한 이웃으로 만들어 주었다. 즉 세계의 평화와 교통의 편리,언어의 통일은 기독교의 福音을 전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에 큰 영향을 준 3대 요소, 즉 유대교와 헬레니즘과 로마의 제국주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은 이 세 요소가 기독교 발생에 큰 영향을 주었으면서도 두고 두고 기독교의 원수가 되어온 사실이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敎會는 오랫동안 이 세 문화적 공해(公害)를 제거하기 위하여 몸부림쳐 온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新約성경을 기록한 언어(코이네:) 헬라어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래 (코이네:)란 뜻은 (일반적인:common)이란 말이다. 이 언어는 300 B.C.에서 A.D.500까지 사용된 말이다. 헬라어에는 고전 헬라어와 일반 헬라어 두 종류가 있었는데 코이네 헬라어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한 후 통용시킨 말이다.


본래 이 코이네 헬라어는 고전 헬라어에 비해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쉬운 글로 알렉산더가 문화의 교류와 정신세계의 통일을 위해 보급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福音을 전 세계에 보급하는데 사용될 줄은 알렉산더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도 깊고 넓어 아무도 측량할 수 없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