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준

1. 1734년에 웨슬리의 아버지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더 이상 목회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에는 자녀 중에 성직자가 있으면 절차를 밟아서 그 목회를 승계할 수 있었다.(요즘 한국의 신흥 대형교회들은 법도 없이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감히 하느님의 교회를 세습하고 있으니 참!) 존의 형 사무엘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는 존이 계승하도록 아버지께 권하였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세 부자 사이에 수개월 간 편지가 왕래하였다. 형은 존에게 안수 받는 것은 영혼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니까 교회를 맡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존은 자기가 안수 받을 때 목회를 위하여 서약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서약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형제 간의 논쟁은 존이 포터 감독에게 자기의 안수와 직무의 관계를 묻는데 까지 나아갔다. 포터 감독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성직자로서 현재의 위치나 또는 다른 위치에서 하느님과 그의 교회를 보다 잘 섬길 수 있다면 반드시 어떤 교구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형을 침묵시키게 되었고 존은 옥스포드에 그냥 머물게 되었다. 1735년 4월 25일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엡워드 교구는 다른 사제가 맡게 되었다.

2. 1735년 9월에 웨슬리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인 옥스포드 대학의 존 버튼 박사에게서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 죠지아 주 지사인 제임스 오글숍이 사제를 구하니 그리로 가면 어떻겠느냐는 일종의 초청장이었다. 주 지사가 원하는 것은 그 곳에 난폭한 인디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존은 그 초청에 응하였고 동생 찰스도 주 지사의 비서로 일하도록 주선하여 함께 조지아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가 조지아로 간 근본 동기는 인디안 선교 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앙 생활을 더 철저히 하려는데 있었다. "나의 으뜸가는 동기는 나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것이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 머무는 동안 역사적으로 유명한 교부들의 책을 탐독하면서 많은 신학적 지식을 습득하여 합리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웨슬리는 신앙의 확신을 찾는 길은 조지아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만일 그 곳에서 실패하면 그에게는 다른 선택이란 없어 보였다.

1735년 10월 14일 웨슬리는 그레이브센드 항에서 미국으로 가기 위해 시몬즈란 호화선을 탔다. 그는 배에 오르자 마자 기독교인들을 조직해서 전도하는 열정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뒤 갑판에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자리가 너무 협소하여 회중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다. 웨슬리는 여기서 일생에 처음으로 옥외집회를 하였고 또한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즉흥 설교도 처음 하는 경험을 하였다. 하느님은 이렇게 미래 전도자를 훈련하신 것이다.

3. 시몬즈 호에는 데이비드 니취만이란 모라비안 교회의 감독과 선교사 몇 명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웨슬리에게 새로운 신앙의 단면을 보여 주었다. 즉 복음주의적 신앙 경험, 삶의 기쁨,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 평화를 느끼는 것 등이다. 그들이 항해하고 있을 때 태풍이 불어와서 돛이 불어지고 갑판에 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 승객들은 모두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모라비안 교인들은 시편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웨슬리는 한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섭지 않습니까?" 대답은 "감사하게도 무섭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신의 부인과 아이들도 무서워하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는 대답이었다. 필립 왓슨 교수는 말하기를 "이 대답은 태풍보다 더 강하게 존 웨슬리를 흔들어 놓았다"고 하였다.

웨슬리가 죠지아에 도착하자 오글숍 지사는 스판겐버그라는 모라비안 지도자를 다려왔다. 그는 추후에 모라비안 교의 총수인 진젠도르프의 뒤를 이어 독일 혜른후트에 있는 모(母) 공동체의 후계자가 되었다. 웨슬리와 스파겐버그는 곧 친숙해 지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웨슬리에 큰 자극을 주었다. 스파겐버그는 웨슬리에게 매우 예리한 질문을 퍼부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압니까?"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 당신이 그의 자녀임을 확증하여 주었습니까?" "당신을 그리스도를 압니까?" 웨슬리는 이 질문 공세에 대하여 엉거주춤하게, 별로 확신도 없이 빈말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웨슬리가 회심으로 가는데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인디언 선교를 매우 낭만적이고 목가적으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세속적인 세계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신앙 발전을 위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나아가서 그가 인디언들을 접촉하였을 때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대부분 술주정뱅이, 도둑, 사기꾼, 거짓말쟁이들이었다. 그들은 대화가 불가능하고 무자비하며 부모와 자식들이 서로 살해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인디언 선교에 실패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영국 성공회의 신부와 신학자로서 교회의 불합리한 훈련과 업격한 의시주의를 강요하였다. 이것은 교회적으로 볼 때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근면했고 헌신적이었으며 자기 희생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나치게 편협하였고 분별력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자기의 선교 활동이 실패일로로 치닫고 있음을 알았다.

웨슬리는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는 오글숍 지사의 조카인 소피 윌리암슨 양과 사랑의 교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피는 웨슬리를 저버리고 다른 남성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여인의 배신에 화가 난 웨슬리는 일종의 보복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교회에서 예배를 집례할 때 소피에게 성만찬을 베풀지 않았다. 아마 그는 그 순간에 자기가 만인을 위한 사제라는 의식 보다는 배신감이 앞선지도 모르겠다. 옥스포드 출신이고 강사인 냉철한 지성인도 사랑의 배신에는 별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여하간 이 사건은 곧 법적인 문제로 비화되었고 그는 조지아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4. 그는 사무엘 호가 영국 땅에 다가올 때 자기가 조지아에서 맛본 패배감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하기 위하여 미국에 갔었다. 그러나 누가 나를 개종시킬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약한 마음에서 건져 줄 자가 누구인가? 나는 맑게 개인 여름 종교를 가지고 있다. 나는 재변가요, 뿐만 아니라 위협이 다가오지 않을 때 나는 자신을 믿는다. 그러나 죽음이 나의 얼굴을 바라볼 때 나의 마음은 근심에 가득 찬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고 말 할 수도 없다. ...오호라 누가 이 죽음의 공포에서 나를 건져 줄 것인가?"

웨슬리는 2월 1일 딜에 착륙하여 그 날 일기에 조지아 선교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내가 조지아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기독교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의 조국을 떠난 지 2년 4개월이 되어 간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배웠는가?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려고 미국에 건너갔던 나 자신은 하느님에게 회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영국에 돌아와서 자기의 삶을 반성할 때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 쌓아 올린 상아탑이 매우 세련된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런 과정이 본질적으로는 무익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의 향방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라텐베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조지아에서 만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자력으로 형성된 것이었고 조지아 이후에 우리가 만난 사람은 하느님이 재창조한 것과 같았다." 웨슬리의 인생 드라마 제1장은 조지아에서 막을 내리고 이제 다음 단계로 비약할 준비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교회의 엄숙주의적 모순을 점점 감지할 뿐만 아니라 16세기 개혁자들이 강조하였던 '신앙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 곧 칭의稱義를 주장하게 되고 개인적인 회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일 모라비안 교도들과 접촉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위의 새로운 신앙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의 선교적 사명을 재검토하고 그것을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 묻게 된 것이다. 그는 1738년 2월 3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낯선 땅에 갔던 일은 나의 사전의 생각과는 상반된 것으로서 나의 계획은 효과를 보지 못하였지만 나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많다. 그는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나를 시험하였으며,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만일 '우리의 모든 방법으로 하느님을 인식하면' 그는 우리의 이성이 실패하는 바로 그 곳에서 운명으로, 또는 그가 아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길을 지시하실' 것이다." 조지아에서 실패한 웨슬리는 하느님이 그에게 취하실 제2단계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