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준

1. 존 웨슬리는 자기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9시 15분경,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마음 속에서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변화'(the change which God works)에 대해 말하고 있는 동안,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따라서 그는 나의 죄마저도 소멸하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일기 1:476)

이 일기는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모인 작은 집회에서 사회자가 마틴 루터의 책 "로마서" 서문을 읽을 때 가진 회심의 체험이 그를 생의 위기에서 건져내고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음을 적고 있다.

이 일기는 웨슬리의 회심의 성격과 신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고 또한 논쟁적인 대목이기도 하다.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반적으로, 전통적으로, 열광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웨슬리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교회들은 열광적인 부흥회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신앙은 뜨거워야 웨슬리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경험한 마음의 뜨거움은 지금까지 그의 이성을 근거로 한 신앙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전환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주님임을 확신한 경험을 마음의 뜨거움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그는 감격과 감동의 초월적 경험을 한 것이다. 웨슬리 자신이 열광주의를 비판하였고 그의 신학이 성서, 전통, 경험, 이성 등 4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종합적이고 건전한 것이므로 웨슬리의 회심을 지나치게 열광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라고 하겠다.

2. 웨슬리가 회심의 지점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은 그리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동년 2월 1일 미국에서 영국 딜 항에 도착한 때부터 회심의 날인 5월 24일까지의 과정은 좌절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아이작 테일러는 귀국한 웨슬리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는 "정신적 불만과 공허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까지 금욕적 이기주의를 근거로 삼았던 거만한 신앙심을 잃어버렸다. 그는 누구를 지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지도 받을 심정으로 자기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웨슬리의 회심은 하나의 돌연변이 아니었다. 회심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가 바로 피터 뵐러(Peter Boeler)이다. 그는 모라비안교단의 교주인 진젠두르프를 만나 감화를 받고 그의 아들을 위해 개인 교사로 있다가 목사 안수를 받고 영국과 미국 선교를 위한 특사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뵐러는 특출한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매우 명석한 신앙인으로 입장이 다른 신앙인을 설득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웨슬리는 2월 17일 뵐러와 함께 옥스포드로 여행하며 주말을 함께 보냈다. 그 때 뵐러는 웨슬리에게 말하기를 '철학'을 버리라고 권하였다. 슈미트 교수는 뵐러의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이것은 중세기부터 영국의 사상적 전통과 당시 계몽주의 시대에 특별히 존경받고 추구되던 '자연 신학'을 철저히 포기하라는 의미이다." 당시 영국교회의 신학은 이신론(理神論) 곧 하느님은 창조 이후 자연질서를 통해 섭리하신다는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3. 존 웨슬리는 병중에 있는 동생 찰스를 보기 위해 3월 5일 옥스포드로 여행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뵐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와의 대화에서 자기 신앙의 결함을 알게 되었고 자기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칭의의 신앙'(justifying faith) 곧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의롭게 인정하신다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의인의 믿음'이 자기에게 없음을 알게 된 웨슬리는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교리를 설교하는 것은 비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뵐러와 의논하였다. 뵐러는 설교를 중단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당신은 신앙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설교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이 말은 설교자가 자기의 지식이나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 충고를 받아드려서 구원의 신앙이 자기의 영적 소유가 될 때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향해 계속 설교하였다. 그 이전에는 '오직 신앙에 의한 구원'이란 주제로 설교해 본 적이 없었다.

3월 22일과 23일에 웨슬리는 뵐러를 만났다. 그 때 뵐러는 웨슬리에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고 존은 기록하고 있다. 즉 그는 신앙의 본질이란 곧 인간이 하느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실한 신뢰와 확신이라는 것,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를 용서 받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화해된다는 것,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를 가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로 난 자는 누구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께로 난 자라는 것 등에 대하여 말해 주었는데 추호의 의심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뵐러가 주장하는 하느님의 '순간적 역사'(instantanous work)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또한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의 회심 기간이 사흘이나 걸린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이 기독교초창기에 하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뵐러는 그 당시 웨슬리를 만난 사실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뵐러는 4명의 증인을 다리고 가서 웨슬리에게 '순간적인 역사'에 대하여 간증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설득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뵐러는 그에게 묻기를 무엇을 믿느냐고 하였다. 잠시 후 웨슬리는 '나의 영이 당신 앞에 엎드렸으니'란 찬송가를 함께 부르자고 하여 찬송을 부를 때 웨슬리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뵐러를 자기 침실로 다리고 가서 신앙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신앙에 도달하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뵐러는 말하기를 웨슬리는 다른 사람 모양으로 큰 죄를 범한 죄인은 아니지만 구주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려주고 감동적인 기도를 함께 드렸다고 한다. 웨슬리는 자기가 신앙을 갖게 되면 그 것 밖에는 설교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4월 26일 뵐러와 웨슬리는 1시간 함께 산책하면서 마음의 대화를 나누었다. 뵐러는 말하기를 "웨슬리는 처절하게 울었는데 그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흘리는 진정한 참회의 눈물이었다고 하였다." 뵐러는 5월 4일 미국 캐롤라이나로 가기 위하여 런던을 떴났다. 웨슬리는 뵐러가 떠나는 날짜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오, 그가 영국에 온 이후 하느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 그러한 일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 그쳐서는 아니된다." 웨슬리는 뵐러에게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앙의 교훈과 감동을 받은 것이다.

4. 우리는 여기서 모두로 돌아가자. 실망과 낙담에 빠진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저녁 9시 15분 경 올더스게잍 거리의 작은 모임에서 그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고 있을 때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하느님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과정의 한 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이 말은 이 놀라운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결코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의 위대한 신앙인, 전도자, 신학자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섭리 아래 오랜 훈련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웨슬리는 위대한 신앙과 역사의식의 가문에서 태어나서 옥스포드의 지성적 훈련을 받고 교수 생활 등 화려한 삶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미국선교에서 실패하고 지적 신앙에서 오는 불확실성과 좌절에 시달렸으며 산 신앙의 증인들을 통한 도움을 받는 등 극심한 좌절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였다. 하느님은 웨슬리가 이런 다양한 과정을 거쳐서 18세기 영국의 구원사역과 함께 세계 선교를 위한 도구가 되도록 창조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