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준

1. 세계는 나의 교구

존 웨슬리는 회심 이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복음 전하는 사명을 확신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교회는 교구제도로 되어 있기 때문에 교구에 속하지 아니하거나 교구의 사제 또는 감독의 허락 없이는 설교할 권리가 없었다. 웨슬리는 교회의 법을 어기고 출교 당하였으므로 영국교회 강단은 물론 어디서나 설교할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자기의 사명에 대한 확신은 철저하였다. 그는 하느님께서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악한 자들을 교도하며 덕 있는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을 맡기셨으므로 인간의 제도가 금지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명령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만일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웨슬리는 영국이나 어느 기독교 지역에서 자기가 선교할 수 있는 교구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 다음 1739년 제임스 허비라는 사람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선교에 관한 대헌장(大憲章)을 선언한다.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간주합니다. 이 말은 내가 존재하는 어느 지역에서나 구원의 소식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타당하고 정당하며 내가 맡은 의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일을 위해 나를 부르셨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 헌장은 감리교를 세계적인 교회로 발전시킨 밑거름이라고 하겠다.

웨슬리는1739년 8월에 브리스톨의 감독 조셉 버틀러 박사를 만났다. 그가 감독에게 조언을 부탁하니 감독은 말하기를 자기 교구에서는 할 일도 없고 설교하도록 임명 받지도 않았으니 속히 교구를 떠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웨슬리는 자기의 완강한 입장을 밝혔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그가 받은 사명은 지상에서 가장 선한 일 -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이것을 위해 적당하다고 판단되는 곳에서는 무한정 체류할 작정이고 그 곳이 바로 브리스톨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안수 받은 성직자는 우주적 교회(the Church Universal)의 성직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동시에 자신이 받은 안수는 대학의 연구원의 신분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지역에 관계 없이 말씀을 증거할 위임을 받은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고 선포한 웨슬리는 50년 간 불철주야로 선교에만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다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사령부와 같은 본부가 필요하였다. 그는 1740년 런던 파운더리에 있는 낡은 대포 공장을 싸게 매입하여 700파운드를 드려 수리하였다. 그는 이 곳을 선교본부, 여행 후의 안식처, 기독교 문고의 창고, 설교자들을 위한 마사 등을 위해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1743년 북부 지역의 선교를 위하여 오펀 하우스(Orphan House)를 개관하고 그 곳도 즐겨 활용하였다.

웨슬리의 선교 활동은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1739년 10월에 웨일즈로 갔는데 거기의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드릴 자세를 갖추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웨일즈 보다 스코틀랜드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1747년 8월에 그 곳을 처음 방문하였는데 그 곳 주민들은 오랜만에 열정적인 사도와 집회를 가지게 되었고 군부대에서 웨슬리의 설교를 들은 군인들은 그를 초인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1790년을 마지막으로 모두 22회를 다녀왔는데 그는 항상 최고의 환대를 받았고 저명한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가 스코틀랜드에 미친 영향은 소수의 감리교 집회를 창설하는데 그치지 않고 장로교를 부흥시키는데 까지 나아갔다.

웨슬리는 인간을 그리스도로 인도한다는 단순한 동기로 동분서주하였다. 존 스미스라는 사람은 웨슬리가 영국의 사도로 자처하면서 활동하는 것에 관하여 비판한 적이 있다. 그는 이에 대하여 자기 입장을 아래와 같이 표명하였다. 즉 "나는 영국의 사도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 아니 전 세계의 사도입니다. (나는 어디서나) 한 사람 또는 천 사람이 지옥으로 달린다면 나의 힘을 다하여 그들을 멈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성직자로서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간청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영원한 불 속으로 빠진 다음 '주님, 그는 나의 교구에 속하지 않습니다'고 변명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데 만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785년 웨슬리는 주장하기를 아마도 자기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께 인도된 사람들의 수는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많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사실상 1791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외국을 제외하고 영국에만도 그의 신도회에 속한 신자의 수가 7만 2천에 달하였다. 이것은 그가 받은 하느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진력한 열매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선교를 위한 방랑 생활

웨슬리는 자기의 선교적 사명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나는 계속 일해야 한다. 나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맡겨졌고, 따라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인간은 그늘에서 쉬려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인용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좌우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휴식이란 원수처럼 보였던 것이다. 영혼구원을 위한 전쟁에 참여한 웨슬리에게 휴식이란 사치한 것에 불과하였다.

웨슬리는 순회 설교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를 남겼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당대의 성직자들보다도 더 먼 거리를 여행하였고 더 많이 설교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약 25만 마일을 여행하였고 4만회의 설교를 하였으며 200권의 책을 집필한 열정가였다. 우리는 이 초인적 업적에 대하여 다만 놀랄 수 밖에 없다. 웨슬리를 수행하던 한 젊은이는 그의 끊임 없는 활동에 도저히 보조를 맞출 수 없어 결국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 때 웨슬리의 나이는 63세였고 젊은이는 30세였다.

웨슬리의 활동 법칙은 가능한 한 회중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어떤 기후나 환경도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과 빛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로막지 못하였다. 그는 1769년 3월 14일 스트라우드에서 아침 5시에 설교하고 그 곳에서 가까운 류키스베리에 정오까지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 곳으로 가는 길 도중에 있는 시번 강이 홍수로 범람하였고 이미 약속되어 있는 워체스터로 갈 시간도 촉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물에 잠긴 길을 걸어가서 사방에서 모여든 회중들에게 설교하였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그들의 모습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는 워체스터에 오후 6시 도착하여 마차역에서 설교한 다음 난폭한 무리들에게 욕설과 추행을 당하였다. 이 날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참으로 길고 고달픈 하루였다.

웨슬리는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고 기후의 조건에 관계 없이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사전에 계획 없는 집회로 인해 곤혹을 치르곤 하였다. 1786년 7월 5일 그는 벨퍼라는 곳에서 미리 약속도 없이 설교해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지금 노팅햄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대로를 포기하고 불편한 소로를 택하여 그 곳에 도달하니 회중들이 시장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쉴 사이도 없이 큰 나무 아래 서서 설교하였다. 그가 증거한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이었다. 그는 예수님처럼 식사할 시간마저 없었던 것이다.

웨슬리의 계속되는 여행 중에 어떤 것은 엄청난 거리를 포함한다.1745년 2월 그는 런던을 떠나 뉴캐슬-어펀-타인을 향하였다. 그와 일행이 가는 길은 진창과 물, 눈과 얼음 그리고 해빙 위에 안개가 서려 마치 유리처럼 미끄러웠다. 그들은 안내자의 인도받기 전까지 길에서 헤매었다. 그들은 6일간에 280마일을 여행하였는데 악천후 속에서 하루 평균 55마일을 다닌 셈이다. 웨슬리는 회고하기를 자기가 평생 이런 악천후를 경험한 것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런 일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마치 없었던 일과 같다고 하였다.

웨슬리가 그토록 먼 거리의 여행을 하였다면 당시의 교통수단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대부분 말을 이용하였으나 필요 시에는 걷는 일도 불사하였다. 그는 걷는 것에 단련된 사람이었다. 조지아로 가기 1년 전에 그는 옥스포드 주변에 있는 여러 교회에서 설교하기 위하여 1천 마일 이상을 걸어 다녔다. 1738년에는 유럽 대륙의 대부분을 도보로 여행하였다. 1758년 6월 아일랜드 캐슬바에서 새벽 4시에 떠나려는 순간 말에 고삐와 안장이 없음을 발견하고 그는 도보로 출발하였다. 동행자들은 그의 속도를 따를 수 없어서 뛰어와야 하기 때문에 쓰러지는 일까지 있었다. 그의 나이 84세 때 킹스우드에서 브리스톨까지 걸어가는 것에 친구들이 불평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때를 회상하면서 말하기를 건강이 좋은 감리교 설교자가 4, 5 마일 걷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도보의 명수인 동시에 말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고든 워커의 작품인 브리스톨의 뉴룸 앞뜰에 있는 말 탄 초상은 진정 웨슬리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말탄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다. 라텐베리는 그와 말의 밀접한 관계에 대하여 "복음적 반인 반마(半人 半馬)"(evangelical centaur)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엄프리 리는 웨슬리 전기에 "주님의 말 타는 사람"(The Lord's Horseman)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웨슬리 자신이 선언하기를 "나는 평생 말을 타야 한다"고 하였고 또한 대부분 그런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목회 초기부터 안장을 서가의 의자처럼 사용하는 법을 터득하였다. 그는 말을 타고 주로 역사, 시, 철학에 관한 책을 읽었다(우리는 전철이나 기차에서도 책을 읽지 않는데 말이다). 그는 고삐를 발목에 올려 놓은 다음 책 읽기에 열중하였으나 수 만 마일을 여행하는 동안 말이 비틀거리거나 쓰러진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말을 항상 최선을 다해 돌보았고 그의 설교자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조하였다고 한다.

말년의 웨슬리는 자가용 마차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말 안장 위에서 오랜 시간을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차는 품위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낡은 마차이었다. 1772년 그는 새 마차를 주문하여 그것을 서재, 사무실, 도서실 및 기도실로 이용하였다. 그는 배를 타는 경우에도 바다가 잔잔할 때에는 마차에서 사무를 보았다고 한다.

전도자의 숙소는 그리 안락한 곳이 아니었다. 특히 여행 중에 쉬는 곳은 때때로 호화 주택에 초대받는 경우도 있으나 많은 경우에는 극히 초라한 곳이었다. 한 번은 어떤 곳에서 2주간 동안 딱딱한 침대에서 자게 되었는데 마지막 날 새벽에 함께 자는 동료에게 농담하기를 "넬슨 형제, 기뻐하시오... 한 쪽 가죽은 아직 벗겨지지 않았으니까요"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실상 그는 딱딱한 침대를 좋아하였고 이미 그것에 익숙해 있었다.

웨슬리는 1788년 생일에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기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 밤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는 밤이나 낮이나 근심에 싸일 때 잠을 재촉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영국 역사상 윈스턴 처칠과 함께 웨슬리가 지닌 휴식의 비결이었다. 그가 젊은 시절에는 약체이었으나 늘 건강에 신경을 쓴 나머지 전도자에게 필수적인 건강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이다.

1771년 웨슬리가 아직도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때에 풀래처가 그에 대하여 논평한 말을 끝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그는 백절불굴의 근면성을 지니고 나라를 순회면서 죄인들을 참회시키고 예수의 피로 치유하는 전도자가 된 것이다. 근 70세의 고령에다 3만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과중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 없는 열심과 노력으로 영국, 아니 기독교 세계에 있는 모든 성직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기를 비난하는 대부분의 교수들이 일어나기 전에 복음의 나팔을 불고 20마일을 달렸다. 그는 그 날, 그 주간, 그 해를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구세주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폭 넓은 섬김을 꿈꾸며 그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