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준

W. 와킨쇼는 웨슬리의 천재적 특징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하였다. 즉 학자, 저술가, 자선가, 조직가, 지도자 등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설교가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고 단정하였다. 사실상 이것은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시종 전도자였고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교에 있어서 설교가 제일차적 수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웨슬리는 늘 설교하기를 즐겼고 가능하다면 하루에 몇 번이던지 간에 설교하였다. 그가 "나는 설교함으로 존재한다"고 고백한 것은 설교에 대한 사명이 얼마나 철저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는 어떤 무신론자와 만나 토론한적이 있는데 웨슬리는 그의 비판적 질문과 자신의 대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당신은 날마다 조석으로 민중에게 설교한다는데 그들에게 무엇을 하는 것인가? 나는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들이 덕스럽고 행복하고 자발적인 봉사자가 되게 한다; 당신은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늘로, 심판자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에게로, 그리고 새 계약의 중보자이신 예수께로 인도한다; 어떤 종교를 전파하는가? 사랑의 종교, 복음으로 밝혀진 선의의 율법을 전파한다;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는가? 그것을 용납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기쁨을 주고 그들이 하느님과 같이 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생활 속에서 만족을 찾으며 임종할 때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갔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고전 15:55, 57)고 확신에 찬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설교가 뿐만 아니라 소위 '복음 설교자'(a gospel preacher)이었다. 그는 자기의 동역자인 설교자들에게 "영혼을 구원할 것 밖에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 그들을 늘 각성시켰다. 그는 스스로 먼저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동생 찰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자네와 나의 사업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직자의 임명을 받았을 때 이것을 우리의 유일한 사업으로 결단한 것이다. 이 사실에 헌신하지 않은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고 생각한다."

웨슬리가 스스로 복음 설교자라고 한 것은 당시 소위 "감미로운 화술"을 복음 설교라고 주장한 자들과 동일시할 수 없다. 그 때는 오늘과 마찬가지로 마치 많은 약속을 포함한 감미로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설교로 인정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에 반하여 어떤 약속 없이도 주님의 교훈에 대하여 진지하고 온전하게 복종하는 설교가 사람들을 더욱 기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통속적인 복음 설교자들은 그들의 설교에 신자의 거룩한 삶(聖潔)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복음을 무익하게 만들었다. 어떤 복음 설교자는 비도덕적 행위로 인해서 세평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설교하였다. 이것을 본 웨슬리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 설교자들에게 비참하게 기만 당하는 것에 대해 탄식한 일도 있었다. 그들과는 달리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신앙과 생활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복음 목회자들에 대한 소고"란 글을 쓴 적이 있다. 이것은 '복음 목회자'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사용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교회에 '복음 목회자'(gospel minister)가 있다고 환성을 지르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런 목회자가 없다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교인들은 실상 그 말의 뜻도 모르고 수다를 떤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무지한 신앙인은 매 한 가지가 아닌가 한다.

웨슬리는 이 무지한 교인들을 깨우치기 위해 먼저 '복음 목회자'가 아닌 것을 밝혀준다. 즉 영원한 섭리를 설교하는 자도, 하느님의 주권, 자유로운 은총, 선택하시는 사랑을 말하는 자도 복음 목회자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한 시간에 말해 버릴 수 있다고 해서 복음 목회자가 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자도, 말씀의 약속을 다루는 자도, 전력을 다하여 호소함으로써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유인하는 자도 반드시 복음 목회자라고 할 수 없다. 심지어는 신앙에 의한 義認을 주장하는 자도 - 이것은 구원의 복음의 요점이기도 하지만 - 이 보다 진일보하지 않으면 '복음 목회자'라고 물릴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북음 목회자의 부정적 측면을 말한 다음 웨슬리는 참 복음 목회자 모습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의 신학적 원리 중의 하나인 神人協同說(Synersism )에 근거한 것이다. 신학적 용어이기 때문에 난해한 면이 있으나 우선 여기에 소개한다. 즉 하느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고난 속에 인간의 참여, 하느님의 약속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응답과 인간의 죄의식, 신앙에 의한 義認과 聖化에 의한 새로운 삶 등의 관계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이 통합되고 선포될 때에만 완전한 복음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복음적 목회자는 구원에 있어서 하느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을 함께 강조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의 역할이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여기서 웨슬리가 주장하는 진정한 복음 목회자(설교자)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다.

웨슬리는 그 당시 통속적으로 복음 설교자라고 하는 자들의 비본질적 복음 설교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었는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소위 '복음 설교자들'은 그들의 청중을 부패시키고 취향을 하락시킴으로써 건전한 교리를 맛볼 수 없고 입맛을 버리며 영양을 섭취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건전한 포도주를 마시게 하지 않고 과자만 먹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강심제를 주고 날마다 삶을 이어가게 합니다. 사람들은 조만간에 식욕을 잃고 말씀의 순수한 우유를 마시거나 소화시킬 수 없습니다. 결국 이러한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감정의 흐름이 멈출 때 그들은 생명, 힘, 영혼의 활력을 잃게 됩니다. 그들은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강심제'만 달라고 외칠 따름입니다." 이 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사실로 다가오기 때문에 200여년 전에 한 말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우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웨슬리를 복음 설교자라고 규정할 때 그것은 통속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성서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웨슬리는 실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도자나 설교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시에 웨슬리는 전도자에 대한 통속적인 고정관념으로 부터도 거리가 멀었다. 기독교 역사의 계보에서 그의 위치를 찾아본다면 그는 베드로와 바울,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 버나드와 프란시스, 루터와 칼빈, 박스터와 번연 등과 같은 차원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한거름 더 나아가서 그들이 보여준 신앙과 생활, 지성과 영성, 자기부정과 교회개혁 등 두 가지 다른 중요한 요소들을 통합하고 조화시킨 위대한 '복음 설교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감성이 없는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나는 말하는 그대로 느꼈다"고 하였고 "나는 내가 확실하게 느끼는 것을 설교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존 뉴톤은 언젠가 말하기를 자기는 느낌 없는 진리와는 관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웨슬리도 뉴톤과 같은 선 상에 있었다. 허튼 신부가 평한 것과 같이 웨슬리의 설교는 "그의 마음과 함께 그의 건전하고 명석한 머리에서 직접 나왔다." 웨슬리가 복음 설교자로서 지닌 능력의 비결은 이러한 열과 빛의 유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두 요소의 긴장 속에서 하느님의 영은 위대한 역사를 이룩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