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준

웨슬리가 회심의 경험을 한 다음, 복음의 증거자로 출발할 때부터 그는 교회 내부의 저항에 부딪쳤다. 이 때문에 그는 옥외 설교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교회 밖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한 초창기에는 무수한 적수들이 폭거를 행사하였다. 복음에 대한 증오심은 난폭한 대중으로 하여금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였다. 그는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하였고 선교의 부산물로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웨슬리는 폭도들을 "민중의 야수들", "벨리알의 자손들"(벨리알-사탄)이라고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폭도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였는데 "다두의 동물"(the many-headed beast)은 사탄의 지시를 받은 다수의 군중을 의인화한 것이고 그 밖에도 "미개한 오합지졸", "무수한 어중이 떠중이" 라는 명칭을 부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표현들은 웨슬리가 말하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으나 18세기 군중들이 얼마나 고약하였는가를 생각케 하는 것이다.

물론 폭도들의 행패에 대상이 된 사람들은 웨슬리나 감리교인들만이 아니었다. 그 시대 자체가 폭동과 폭행으로 팽배하였던 것이다. 조지 왕조 시대에 군중은 고집스럽고 난폭하였으며 치안의 부재가 불러온 무제한적 자유로 인해서 폭동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1715년 親제임스 2세 폭동, 1753년 反유대인 폭동, 1780년 反가톨릭 폭동, 수회에 걸친 反감리교 폭동, 1733년 간접세법에 대한 폭동, 1736년 밀수범 교수형 반대 폭동, 1736년 음주 규제 반대 폭동 등 그 밖에도 크고 작은 폭동은 계속되었다.

웨슬리는 1743년에 스태포드셔에 갔다. 그 곳은 그 해 초에 反감리교 폭동이 일어난 곳이었다. 그는 어느 집에서 집회를 시작하였는데 폭도들이 그 집을 둘러쌌다. 집 안에 있는 신도들은 모두 엎드려 기도하였다. 폭도들은 물러갔다가 더 많은 수를 모아 가지고 돌아와서 웨슬리에게 밖으로 나아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대표를 집 안으로 불러 그를 설득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웨슬리가 보호를 요청하기 위하여 치안 판사를 방문할 때 호위해 주었다. 불행하게도 치안 판사는 잠자리에 있었고 폭도문제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았다.

웨슬리가 월살이라는 곳에 갔을 때 폭도들의 행패는 극에 달하였다. 그가 동네로 지나갈 때 그들의 입에서 폭언이 터져 나왔다. "그를 물에 빠뜨려 죽여라!", "그의 목을 매달아라!", 심지어는 "십자가에 매달아라!"는 소리도 들렸다. 어떤 자들은 "옷을 벗기고 그의 옷을 찢으라!"고 외쳤는데 웨슬리는 부드럽게 대답하기를 "그럴 필요가 없소. 원한다면 내 옷을 주겠소"라고 하였다. 그의 침착하고 정확한 대답은 폭도들을 친구로 변하게 만들었다. 하느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한 것이고 순교자들이 불 속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의심하지 않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폭도의 두목에게 구출 받은 일도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신부님, 나는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나를 따라오십시오. 아무도 당신의 머리칼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는 웨슬리를 자기 어깨 위에 올려 놓고 안전하게 강을 건네 주었다. 전도자가 웬즈베리에 도착하여 보니 조끼의 옷자락이 떨어지고 손의 피부가 약간 상하였을 뿐이었다. 그는 그 일을 회고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그러한 하느님의 섭리를 이전에 느껴본 적이 없다. 하느님의 손길이 모든 선한 일을 통할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가장 감명 깊었던 사건은 어떤 난폭한 시골 사람이 설교자 앞에 달려와서 손을 들어 그를 치려고 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돌연 손을 내리고 웨슬리의 머리를 만지면서 말하기를 "머리칼이 참으로 부드럽군요!"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자기의 오랜 경험을 통하여 폭도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얼굴을 맞대고 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의 솔직성, 침착성 및 냉철한 응변은 오합지졸의 흥분을 가라 앉게 하고 통제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탁월한 용기와 태연자약 위에 훌륭한 해학과 모든 사람에 대한 친절을 겸비함으로써 당시 폭도들의 야수적인 만행을 극복한 것이다. 브래디 박사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전도자 웨슬리는 놀라운 은총의 소유자였다. 그는 화내는 법이 없었다. 구타를 당하여도 참는 것이 공격자들의 광기를 해소하는 것이라면 항상 참을 용기가 있었다. 그는 돌이나 곤봉으로 얻어맞았을 때에도 조용히 피를 닦고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며 설교를 계속하였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제멋대로 행동하여도 그를 무례하게 하거나 화를 내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갓 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특히 동물들의 등장을 볼 수 있다. 런던에서는 수 많은 폭도들이 젖소를 끌고 와서 사람들 속으로 강제로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는 이리저리로 맴돌다가 드디어 사람들 사이를 통과하였기 때문에 조용히 예배드릴 수 있었다. 펜스포드에서는 고용된 폭도들의 집단이 황소를 끌고 와서 사람들 가운데 몰아 넣으려고 하였다. 웨슬리는 이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러나 그 동물은 사람들 보다 현명하여 우리가 한 시간 조용히 하느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좌우편을 계속 뛰어다녔다"고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귀족이나 신사들이 폭도들을 매수하여 웨슬리에게 방해하는 일도 있었다. 웨슬리가 1750년 세인트 아이브스에 갔을 때 시장에게 허락을 받고 장터에서 설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악명 높은 존 스티븐스가 자기 사람을 보내어 청중들 속에 말을 타고 다니게 함으로써 웨슬리를 방해하였다. 또한 웨슬리가 할리책스에서 설교할 때 어떤 신사가 폭도들을 모아 놓고 소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들에게 돈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전도자는 그와 경쟁할 수 없음을 알고 약 5마일 떨어진 목장으로 가서 조용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느낀 소감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 하느님의 지혜여, 사탄으로 하여금 이 모든 사람들을 주위가 산만하지 않은 곳으로 쫓아내게 하심으로 그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속에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셨다!"

웨슬리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성직자들의 박해였다. 그는 자기 양심에 상치하지 않거나 하느님이 자기에게 위임한 일이 지장이 되지 않는 한 국교에 충실한 성직자가 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사업에 협조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따라서 성직자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고 폭도들을 선동할 때 그는 크게 심적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악덕한 성직자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랭커셔의 주지인 조지 화이트였다. 그는 가톨릭 신부가 되려고 한 일 때문에 "변절자"란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는 폭도들을 매수하여 술을 먹이고 장갑과 몽둥이로 무장시켰다. 그들은 웨슬리를 때려 땅에 쓰러뜨렸고 동행한 사람들이 모두 그들에게 봉변을 당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수수방관하였다. 이와 흡사한 사건은 추후에도 계속되었다.

우리는 귀족와 성직자, 지주와 기업가들이 왜 웨슬리 운동에 반기를 들었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곧 그들의 "현상 유지"(status quo)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지배계급들은 의식화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데 웨슬리 운동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것이므로 노동자들의 각성과 윤리적 자각은 유물주의적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을 해방시키는 이상의 효력을 발휘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영국의 지배계층은 종교문제와는 별개로 웨슬리와 그 운둥을 탄압하는데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구의 사무실은 박해를 주관하는 본부가 되었다는 것은 국가교회의 타락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