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준

1777년 1월 26일 주일, 웨슬리는 런던의 올 핼로우스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당시 교구장은 옥스포드 대학 신성 클럽(Holy Club)의 동지였던 토마스 브로턴이란 탁월한 인물이었다. 이것을 시발로 하여 그는 브로턴의 교회에서도 1776년 이후 여러 차례 설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그에 대한 편견이 점차적으로 감소되고 박해는 사실상 중단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폭도들은 조용해지고 교회와 정부의 관리들도 그가 광신주의자가 아니라 나라의 정신적 발전에 기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생애 최후 20년은 심각한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웨슬리의 영향력은 매우 커졌고 그가 방문하는 곳 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교회들은 그의 위대한 업적을 점차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적대감이 감소되었고 그에게 명예까지 부여하였다. 그는 퍼스의 명예 시민이 되었고' 그에게 아브로스의 프리덤'(The Freedom of Arbroath)상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가장 큰 상은 그에게 교회의 문이 얼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의 정신적 변화를 뜻하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부흥되었음을 처음으로 시인하는 것이었다.

"로이즈 이브닝 포스트"(Lloyd's Evening Post)지는 1772년 1월 20일자에서 웨슬리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세 나라를 자기의 교구로 삼고 선교활동에 열정을 쏟은 것과 그의 폭 넓은 독서를 통해 교리적인 측면을 초월하여 교양적이고 개방적이며 관용적인 글을 일기에 기록한 것은 영국교회를 위하여 매우 환영할만 일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선교의 후반부에서 자기가 안수받은 영국 국교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그의 바램은 기성 교회를 개혁하고 각성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는 긴급한 선교적 사명 때문에 성공회의 전통을 약간 어긴 일도 있었으나 상당수의 추종자들이 국교에 속해 있는 것을 묵인하였고 국교 반대론자들과 협력하면서도 국교에 대하여 지조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 하였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교구 교회에 참석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고 성직자들이 자기와 협력할 자세가 되어 있으면 항상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교회를 재생시키는 것이었지 그것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1777년 시티 로드에 있는 새로운 기도실 정초식의 설교에서 자기가 국교와 분리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영국에 여러 차례 종교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교회 발전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흥운동에 참여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기성교회에서 분리하여 분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로교인, 독립주의자, 재세례론자, 퀘이커교도 등이 모두 그랬다. 그들은 분리 후 자기들의 작은 교파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교회에 남아있는 교인들도 그들에 대하여 편견을 가졌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위해 출발한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자기와 추종자들이 부흥운동은 전개하되 국교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할 사명이 있다고 하였다. 감리교인들은 과거의 분리 역사를 공부하고 토론도 하였지만 분리해야 할 뚜렷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그들을 추방하기 전에는 국교의 성직자들이나 평신도들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던지 간에 개의치 않고 인내와 지조로서 국교와 계속 관계를 맺겠다고 하였다.

웨슬리와 성공회의 관계는 1750년대부터 조금씩 순조로워지기 시작하여 여러 지역의 강단에서 설교를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회기적인 사실은 런던에 있는 교회들이 그에게 개방된 것이었다. 그 때가 1783년이었다. 그는 1788년에 자기 아버지가 목회하고 자기가 태어난 엡워드 교회에서 설교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웨슬리와 성공회와의 공식 관계는 부드러워졌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및 런던의 감독과 우호적이고 지속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1777년 11월에 웨슬리는 새로 임명된 런던의 감독 로버트 로우스를 만났다. 그는 옥스포드의 시문학 교수였다가 감독으로 전보된 사람이다. 웨슬리는 그를 이렇게 칭찬하였다. "그의 행동 전체에는 기독교 감독에 부합되는 면이 있다 - 부드럽고 정다우며 예의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의 대화 전체는 그의 품격에 맞는 위엄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웨슬리의 겸손은 그를 당황케 하였고 만친 석상에서 상좌에 앉기를 거절하였다. 그 갑독은 "웨슬리씨, 내가 저 세상에서 당신의 발 밑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하였는데 웨슬리는 이 이야기를 기록할 때처럼 감동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이제 교회 인사들과 함께 사회 인사들도 웨슬리를 기꺼이 맞아 주었다. 브리스톨에서는 시장이 그를 그의 기도실의 설교자로 초청해 주었고 그를 자택에서의 만찬에 초대하였다. 맥클스필드에서는 시장이 초대하여 교구 교회까지 함께 행진하자고 하였다. 그는 오후 5시에 뉴왁의 새로운 집회소에서 설교하게 되어 있었는데 시장은 자기와 수명의 시의원이 도착하기까지 잠깐 지체해 달라는 전갈을 보내 왔다. 겐시에서 웨슬리와 코크는 지사와 함께 식사하였다.

우리는 웨슬리가 말년이 다가오면서 그의 신도회에서 뿐만 아니라 성공회에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끝까지 여행하는 전도자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교회들이 자기에게 설교를 부탁할 때도 옥외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와 옥외에서 행하는 두 형태의 목회를 견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설교를 계속하는 중에 종말이 다가왔다. 존 웨슬리는 임종시까지 대중을 위한 전도자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비록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기쁨을 맛보았고 하는 일도 수월하였지만 그는 사람의 칭참에 의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임종 직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5, 60년 동안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나의 미숙한 방법으로 동료 인간들에게 작은 선이나마 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제 나와 죽음 사이에는 몇 발자국밖에 남지 않은 듯 합니다. 내가 구원을 위해 무엇을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한 일 가운데 기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호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이상으로 웨슬리의 생애를 마치고 그의 사상으로 넘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