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고전12:12~20            

제목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옛적부터 우리 한국 사람은 인심이 좋기로 소문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심이 매우 각박해졌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옆에 앉아있는 사람과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쉽게 말을 걸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음료수에 수면제를 타서 먹이고 지갑을 빼앗아 달아나는 일들이 간혹 생기기 때문에 상대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일화가 생각납니다.

오래 전 어떤 목사님이 시골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초청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지만 교통사정이 좋지 않아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어두워져서 어쩔 수 없이 동네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방 하나를 달라고 하였으나 빈방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주막 주인은 손님 한 사람이 투숙해있는 방에 들어가서 양해를 구하고 목사님과 함께 밤을 지내도록 해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직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은 시골이라 방에 들어가니 희미한 호롱불 저편에 왠지 인상이 좋지 않아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누워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방에서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잠든 사이에 혹시 가방을 훔쳐갈지 몰라서 가방을 이불 속에 넣고, 옷도 입은 채로 누웠습니다. 그런데 상대방도 목사님이 잠들 때까지 기다리는지 잠을 자지 않고 계속 뒤척이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공연히 헛기침도 하였습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웠습니다.

날이 밝자 목사님이 주막 주인에게 숙박비를 주고 교회로 가는데 한 방에 있던 그 남자가 계속 자기를 뒤따라왔습니다. 틀림없이 자기를 뒤에서 덮치고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급히 발걸음을 서둘러 교회에 들어오는데 그 사람도 교회까지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부흥회를 개최하는 교회의 장로님이었습니다. 그 장로님도 목사님인 줄 모르고 혹 강도나 도적이 아닐까 불안한 생각으로 잠을 자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상대방을 믿지 못할 때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도’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엡4:4에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며, 같은 소망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곧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즉 교인과 신자와 성도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인’은 일단 그 교회에 등록하기만 하면 교인이 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거나 믿지않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닮아 신실하고 구별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듣는 여러분들 모두 ‘교인’의 자리에 머무르지 말고, ‘신자’의 자리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진실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서로 교통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교통’이라는 말을 영어로 바꾸면 ‘communication’입니다. 이 단어를 ‘대화’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야 진정한 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한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말하고 한 쪽은 듣기만 한다면 마치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불러놓고 조회를 하는 것과 같고, 잘못한 자녀를 꾸중하는 것이지 결코 대화가 아닙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바로 교회의 본질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교회란 무엇입니까? “네, 성도의 아름다운 교통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렇게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 외에도 성도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교통을 통한 교제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사실 교회의 성도들만큼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진심으로 돕기 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때로 성도님들이 혈육보다도 더 가깝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성도의 교통은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가 바탕이며 서로 매어주는 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12:50에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도의 하나됨과 교통은 하나님의 뜻, 즉 진리의 말씀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시키면서 성도의 교제만을 말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때로 교회 안에서 기관별 활동이나 구역모임이 세상적인 친목단체처럼 변질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이런 교제는 결코 오래가지 않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깨어집니다.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섬기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고 고백하는 자들마다 서로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내가 먼저 섬기고, 내가 먼저 사랑하는 아름다운 삶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사명 너는 왜 잊어버렸나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너는 왜 잊어버렸나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십자가만 면류관만 바라보며 의의 길 간다더니

   위로하기 보다는 위로받고 사랑받기만 원하네 ♬

오늘 본문은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의 몸에 눈, 코, 귀, 입, 손과 발과 같은 지체가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각 다른 지체들이지만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할 때 온몸이 건강해집니다. 어느 하나라도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면 온 몸이 병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몸에 있는 심장은 우리의 주먹만한 크기로서 지름이 약12cm, 무게는 230~340g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심장이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는 너무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 다른 신체 부위는 밤에 잠을 자기도하고, 쉬기도 하는데 나는 잠시도 쉬어본 적이 없다. 이제 나도 좀 쉬어야겠다.” 그래서 심장이 잠시라도 자신의 하는 일을 멈춘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심장이 멎는 순간 온 몸이 죽게 되고 결국 심장 자신도 죽게 됩니다. 심장이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 온 몸을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을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요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만약 우리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간에 서로 미워하거나 분쟁을 일으켜 하나되지 못하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신약성경에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이란 사람에게 보낸 편지, 즉 사도 바울의 서신서입니다. 빌레몬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종이 주인의 집에서 주인의 물건을 훔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당시 종이 이런 죄를 범하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로마로 도망쳐 갔다가 그 곳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도 바울의 복음사역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하기를 오네시모를 종으로 여기지 말고 형제로 여겨 용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 안에도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자유자와 노예였습니다. 노예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천하여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였고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노예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그들도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함께 애찬을 나눌 때 귀족이나 자유자는 많은 음식을 장만하였으나, 가난한 노예들은 제대로 음식을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공평하게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타락하면서 부자와 노예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자들은 천한 노예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못마땅하였고, 자기들이 준비한 음식을 노예들과 나누어먹기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애찬을 나누기 전에 저들은 자기들이 준비한 음식을 미리 먹어버려 노예들이 먹을 것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쪽은 배부르고 한 쪽은 시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사도 바울이 크게 책망을 하였습니다. 22절에 보면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의 권리만 주장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하여 “부자는 와서 제 것을 먼저 먹고 마시고 가난한 사람은 시장하니~ (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는 사람마다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 자유자나 종의 구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두 한 몸이 되었고, 한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돈이 많다고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거나 대접을 받으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일단 교회에 들어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시민이요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저희 교회가 소재한 길음동지역은 지금 기존의 불량주택을 헐어내고 아파트 재건축이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파트에 입주한 주민들과 기존 지역주민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경제적인 격차가 다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안에서는 많이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거나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태도를 보이면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남을 도울 힘이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도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능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구제하는 것은 하늘에 저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곳에는 도적이 들거나 좀이나 동록이 해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만 모이지 마십시오. 같은 고향사람들끼리 모이거나, 친한 사람끼리 어울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쳐놓고 다른 사람이 들어올 틈도 주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특히 새신자가 들어오면 모두가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맞이하십시오. 저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따뜻한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야 진정한 하나됨이 가능하게 됩니다. 진정한 성도의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되어야 한다고 ‘무조건’ 하나되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나라에 있어서 가장 손쉽게 하나되는 방법은 독재정치입니다. 독재자가 강한 권력을 무기로 국민의 반대의사를 억누르면 우선 겉보기에는 평화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결단코 진정한 하나됨이 아닙니다. 모든 국민들이 동의하고, 올바른 민주주의적인 기초 위에 있어야 참 평화를 이룰 수 있듯이, 교회 안에서 진정한 하나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됨과 온전한 몸을 이루기 위하여 때로 아픔도 감수해야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는 심판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 죄를 지은 성도가 있을 때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책망하고, 때로는 공적으로 회개토록 하는 치리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덮어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아 오히려 그 사람에게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썩은 종기는 빨리 도려내어야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처럼, 죄는 빨리 회개하고 자유함을 얻어야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습니다. 빌2:2~5입니다. (다함께 찾아서 읽겠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시편119:23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우리는 이 악한 세상을 본받지 말고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성도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섬김과 교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주를 경외하는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와 함께 할 때 아름답고 완전한 성도의 교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도신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성도의 교통을 통한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넘치게 되어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