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신5:17

제목 : 살인하지 말라

얼마 전 TV를 통하여 매우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습니다. 생활고와 빚에 시달린 한 주부가 세 자녀와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목격자에 의하면 한 아이가 “엄마, 나 죽기 싫어요. 제발 살려 주세요”라고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으면 그랬겠냐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자녀의 목숨까지 빼앗아간 그 어머니의 행동에 화가 납니다. 이제는 자식이 부모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언제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살아야 할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생명이 있는 동물과 물고기, 새들을 만드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직접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 즉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다른 생물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마16:26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입니다.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 신분이 비록 비천하며, 몸이 병들어 연약할찌라도 우리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죽겠다’라고 불평하며 낙심하는 것은 결코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몇 년 전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라는 대학생이 쓴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만 300만부 이상 팔렸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오토다케는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그가 대학생이 되기까지 점차 성장하는 동안 팔과 다리는 겨우 10센티 정도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다케는 달리기,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기며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친 후,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 정경부 정치학과에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팔다리가 없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팔다리가 없는  오토다케 청년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오늘 십계명 중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이 계명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말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하게 다른 사람을 직접 죽이는 살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이 계명을 지켰다는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의 기원과 동기

먼저 성경에서는 살인이 어디로부터 기원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는지 요8:44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 중에서 특히 ‘마귀-욕심-살인한 자’라는 단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인죄는 다름아닌 마귀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마귀가 사람을 미혹하여 그 마음속에 욕심을 불어넣고, 이로 인하여 미움과 다툼이 생기게 하여 마침내 생명을 빼앗고 피를 흘리게하는 살인에까지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이 처음에는 매우 작은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는 자신의 유익만을 먼저 추구하여 자기의 만족을 채우려고 하다보니 다른 사람과 마찰과 충동이 생깁니다. 이 때  미움이 생기게되고, 미운 감정이 점점 발전하여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현장으로 가 봅시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기에 곡식을 거두어 하나님께 제사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으므로 어린 양을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창4:5에 보면 그 때 아벨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안색이 변하였을까요? 먼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와 미움이 가인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마침내 동생 아벨을 죽이는 무서운 살인의 죄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우리가 아는 바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로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미움과 살인은 같은 의미입니다. 만일 우리가 10년 전부터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왔다면 그 사람은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살인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놀라는 표정이 아니군요?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살인죄를 범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 죄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셨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살인죄에 대하여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미움도 분명히 살인죄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미움의 감정은 미움의 대상자보다 먼저 내 심령이 죽고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속에 미움의 생각을 버립시다. 미움의 생각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용서요 사랑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아멘’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살인죄를 범한 결과

이제 살인죄를 범한 결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살인의 죄를 범한 자에게는 세상의 법으로도 사형이나 무기징역과 같은 가장 중한 벌이 가해집니다.


창세기 4장에 기록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을 살펴보겠습니다.

11절 :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 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동생을 죽인 가인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저주받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12절 : “땅이 저주를 받아서 밭을 갈아도 땅이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14절 : “다른 사람으로부터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인의 죄를 지은 자에게는 이토록 무서운 심판이 예비되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인의 종류

이제 6계명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살인의 종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직접 살인’과 ‘간접 살인’입니다. 직접 살인이란 폭력을 이용하여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의 생명을 서서히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간접 살인도 있습니다. 간접 살인에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손상시키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를 부과하여 삶의 의욕을 잃게 하는 것, 무절제한 삶, 음주, 흡연, 마약을 하는 행위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요소들이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 성도들은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문처럼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아야 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도모하며,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적극적인 의미의 6계명

이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마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마22:36)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함께 하시겠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제6계명은 내 생명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아프면 아무리 돈이 없고 어려워도 좋은 병원을 찾아가서 치료받고, 약을 사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무관심이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된다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째 이런 일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원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 아담을 지으신 후에 그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않아서 여자 하와를 ‘돕는 베필’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한 사랑의 고백이 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내 몸과 같이 서로 사랑하며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하자마자 부부사이에 금이 생겼습니다. 선악과 잘못에 대하여 아담은 아내 하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자란 정말 믿지 못할 존재입니다.)

이것이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입게 되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삶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사랑하며 살아갈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찾아오시도록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약5:20에서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참 생명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속에 영접하도록 초청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이 일에 수종든 성도마다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 몇 가지 사안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살은 죄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맞습니다. 맞고요” 다른 계명은 비록 내가 연약하여 어겼을지라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 회개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자살은 다시 회개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살한 사람의 이름이 4명 등장합니다. 구약에 사울왕과 그의 신하 아히도벨, 단7일동안 이스라엘의 왕노릇한 시므리-이상 3명이며, 신약에는 가롯 유다 1명입니다. 이 이름 가운데 여러분들에게 생소한 이름도 있을 줄 압니다만 공통된 점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생명이라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요 우리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요,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경멸하는 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살하게 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가족, 친지, 이웃 등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남겨줍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다하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낙태

요즈음 10대 미혼모의 임신과 낙태 수술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의 쾌락과 방종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낙태는 분명히 살인행위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된 순간부터 완전한 생명체입니다. 비록 어머니 뱃속에 있지만 그 태아는 분명히 살아있기에, 생명이 있기에 개월(個月)수가 점점 지나면서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비록 출산되기 전의 아기라도 그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낙태수술은 대체로 음성적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지지만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