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의 독창성은 그의 교훈의 새로움(novelity)에 있다기 보 다 교훈들을 새로운 관계로 확립하고, 교훈들에 심오한 것을 부여하고, 교훈들을 놀라운 동기 위에 세우고, 그 교훈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전달해 주는데 있습니 다.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도 온유한 자들에 대해 복을 선언한 적이 있으나 주님 의 말씀은 그들의 것보다 훨씬 더 의미가 깊습니다.
주님은 그 성품에 대한 그의 묘사와 그가 그것에 결속시킨 약속에서 한 온전한 자 에 대한 그의 개념의 독특성을 주장합니다.
세계의 이상은 전반적으로 주님의 이상과 아주 다릅니다. 세계의 이상은 보다 눈에 잘 띄는 이른 바 영웅적인 미덕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세상은 풀잎 사이에 숨어 오직 향기로 밖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못하는 제비 꽃보다 현란한 노랑색의 커다란 해바라기를 더 좋아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것(지위, 권리, 입장 등)을 획득하여 지키는 강자는 복이 있다"라 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기자도 역시 주님처럼 이 진리를 말한 적이 있으며 그 말씀에 문자적으로 똑 같은 약속(땅을 차지한다는 약속)을 부여한 바 있습니다(시37:11).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는 다윗의 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째로 이 그리스도교적 온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 다음 둘째로 그 온유가 어디서 나오는가, 셋째로 그 온유가 어디로 귀결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온유한 자의 성품 그리스도교적 온유는 무엇인가?

"온유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우스(헬4239a)의 의미를 먼저 설명하겠습니 다. 이 단어는 '진정시키는' 약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짐승을 길들이거나 짐승이 화나거나 흥분할 때 달래거나 진정(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 람이 분노, 난폭, 매정, 잔인하지 않고 유순하고 친절하고 상냥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본능과 충동, 격동 등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자 입니다.
이 단어의 통상적 용법은 인간에 대한 태도, 특히 자신을 평가 절하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며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마음의 성향 및 행동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의 그리스도교적 개념에는 이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신약성경 히브리 역본에는"가난한 자"와"온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같이 아니입니다. 이것은"온유한 자"가"가난한 자"와 동일한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니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라는 의미로부터 그 뜻이 변하여 깊은 곤궁과 곤란 속에서 겸손하게 여호와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도움을 얻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종교적 칭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니는'가난한, 억압받는,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겸손한'을 뜻하는데, 제 1 복에서는 자신의 문제인 "가난한"이란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고, 여기서는 타 자(他者)와 관계에서 자신의 문제인'억압받는, 괴로움을 당하는, 겸손한'이란 의 미가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온유는 나 자신에 대한 자세인 동시에 타자, 곧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관계 에서 나의 자세의 표현입니다.

(1)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온유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 즉 마음의 성향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유의 그러한 대신적(對神的) 측면은 무엇입니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이 어떤 양상을 띠든간에,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 을 제아무리 아프게 찢고 제 아무리 외롭게 만든다 하더라도, 불평 없이, 부루퉁함 없이, 거역 없이, 반항 없이 온유한 마음으로 겸손히 이를 참고 수용하며 이에 복 종하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복되다고 선언하신 가장 깊은 온유의 개념입니 다. 슬픔이 우리에게 닥칠 때, 우리가 천부적인 자연적 힘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지 않 다
면, 우리는 모두 까다로운 아이가 매맞을 때 길길이 날뛰듯, 발로 차고 쥐어 뜯 고 소리지르거나 그 슬픔을 모욕과 상해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본문의 이 축복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면, 우리의 슬픔을 묵묵히 받아들임으로써 그 축복을 획득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슬픔은 엄숙한 기쁨 아 니면 그와 아주 유사한 어떤 것으로 변할 것입니다.
몰이 막대기를 뒷발로 차는 소는 오직 두 가지 결과를 가질 수 밖에 없없습니다. 몰이 막대기를 제거하지 못할 뿐더러 복사뼈에 상처까지 입게 되며, 짓무른 상처 속에 날카로운 끝이 더 깊이 박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칼을 휘두르시도록 허용하십시요.
주님은 칼을 휘둘러 상처를 깨끗이 도려내십니다.
주님의 칼에는 독이 없다.
하나님을 향한 온유는 첫째로 하나님의 뜻을 참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 온유는 의심없이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온유의 좌소는 의지입니다. 의지를 굽힐 때 사람은 완전을 향해 진일보하 게 됩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주시고 빛과 어두움을 주시며,때로는 손을 내미시고, 때로는 손을 거두어 들이시며,때로는 권위있는 목소리로 명하시고, 때로는 달콤한 사랑의 끈으로 잡아 끄시는 등,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행위 속에는,
우리의 의지를 한 조각의 가죽처럼 유연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온갖 손길에 순응하 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예: 도공과 진흙).진정한 온유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우리의 최고 선으로 굳게 붙잡으며 하나님 의 그 뜻에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순응하는 것을 낙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습니다(약 1 : 21). 예를 들 어 봅시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사무엘로부터 하나님께서"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이지 아 니했습니다. 그는 결국 악신이 들려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 했습니다(삼상 17장 이하).그러나 다윗은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하고 그 아내를 취한 범죄에 대해 나단 선 지자로부터 책망을 들었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고"내가 여호와께 범 죄하였노라"고 회개했습니다(삼하 12장).
(2) 둘째로 그리스도교적 온유는 인간을 향한 우리의 자세 즉 마음의 성향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 면 그러한 온유의 대인적(對人的) 측면은 무엇입니까?
온유한 자는 자기의 본능과 충동, 격정 등 감정을 제어하는, 즉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된 인격자입니다. 이러한 인격자는 곧 하나님의 통제와 훈련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온유한 마음은 유순하고 너그러우며 온갖 자극적 상황에서도 함부로
성을 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자제할 줄 압니다. 냉정하고 침착하며,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부드럽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온유하다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도 끄떡없이 자신을 제어하고 평 온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을 것이며, 복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의 짖음에 똑같이 짖음으로 응대하는 개와 같습니다. 그 렇게 짖어보아야 밤은 더욱 무서워질 뿐이며 자기 목만 쉴 뿐입니다.
선으로 악을 대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무시를 당하면 당할수록, 해 를 당하면 당할 수록 , 악의와 조롱에 싸이면 싸일수록 더욱 끈기있고 끈질기게 사 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를 말하기는 쉬우나 행동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 명백백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태양이 불을 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 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내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싫어하고 종종 우리에게 해악까지 끼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적대감과 분노와 악의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악을 향해 선의 태양 빛을 끈 질기게 비추는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 : 1이하에서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 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으로 행하 라"고 권면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겸손하며 결코 자만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 게 생각합니다(롬 12 : 3).
그는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돌보아줍니다(빌 2 : 3, 4).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자기를 위하여 남에게 아무런 요 구도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존경을 받지 못해 분노를 터뜨리며 쓰라린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푸념을 터뜨리고 아우성을 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권리나 이권, 지위를 위해 불평하고 다투며 싸웁니다.
남이 떠받들어 주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요.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마십시요.
요구하면 할수록 얻는 것은 더욱 적을 것입니다.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멀리할수록 당신이 원하는 것을 받을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평화를 위하여 동일한 권리가 없는 자 롯에게 동일한 몫을 제공 하고 그것도 선택의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권을 주장하지 아니하셨습니 다.
온유는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 인내하고 오래 참습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사 우리를 위해 본이 되셨습니다.   "그는 죄를 범치 아니하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 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맡기셨습니다."(벧전 2 : 21­23).
죄를 범하여 매를 맞으며 참으면 그것은 아무런 영예가 되지 못하지만 선을 행함 으로 고난을 받으면 이는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입니다(벧전 2 : 20).

온유는 용서하며 결코 앙갚음을 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바울의 권면대로 행합니다.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엡 4 : 32)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렇게 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 을 이기라(롬 12 : 19­21)고 했습니다.

숯불을 그 머리에 쌓는 것은 사랑의 행위로 그의 원수를 정복하는 것을 비유적으 로 표현한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가난한 자의 측면을 가지고 있어서 깊은 곤궁과 곤란 속에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또 그렇게 함으로서 도움을 얻습니 다.
아, 만일 '산상수훈은 나의 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것을 자신 들의 신앙으로 삼았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우리의 온갖 삶에서 마찰과 불화가 얼마나 많이 제거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전 사회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고 지상은 낙원이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 해 봅
시다.

온유와 관련하여, 또 한가지 고려할 점이 있습니다. 이 미덕은, 우리 주님의 실례가 보여주듯이 불요불굴의 용기와, 세상의 죄악에 대한 격렬한 저항과 조화를 이룬다 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수준에서는, 개인적 잘못에 대한 끈기있는 수용에 한계가 없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공공의 죄악에 대한 우리의 도전적 자세에 한계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의 성냄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의분(義憤)은 온유로 나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노하셨다고 하면서 난폭한 분노를 터뜨려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분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분노가 아닙니다.

만일, 인도주의라는 신성한 대의 명분을 위해 서로를 향해 언제든 대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논쟁적 신학자들과 성난 박애주의자들 및 사회 개혁가들이 이 온유의 정신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선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인류의 오류와 불행이 시정될 가능성은 오늘날보다 훨씬 높아졌을 것입니다.
온유는 떠들지 아니하고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기의 사명을 다합니다(살전 4 : 11).

부드러움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힙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위한 전쟁에 나설 때, 짤랑짤랑 소리나는 빛나는 갑주를 입거나, 날 카로운 검을 소지하거나 격렬하고 열정적인 논쟁의 화살을 들거나 하면 안됩니다. 오직 모든 것을 정복하는 온유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모든 증기 해머로 빙산을 난타해 보십시요. 타격에서 발생하는 비교적 적은 열기로 일부 조그마한 부위가 녹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그것은 얼음 덩어리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빙산을 북극 조류의 말없는 흐름 속에 띄워 남쪽으로 고요히 내려보내 보십시요. 햇볕이 그 냉기를 타격해 없애고 빙산은 마침내 따스한 대양 속으로 사 라지고 말 것입니다.
온유는 정복자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온유는 심약, 겁쟁이, 우유부단, 얌전함 같은 어떤 연약한 자질이 아닙니다. 최강자 의 성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한 자"입니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 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 11 : 29).
온유는 생래적인 자질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질입니다.

2. 이 온유의 출처   이 온유가 어디서 흘러 나오는가?

사슬처럼 연결된 진귀한 8개의 복 가운데서 이 세번째 복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를 살펴보면 온유의 복은'영의"가난"과"애통"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통 해 하는 자에게 약속된 "위로"를 뒤따르고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 복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자아 성찰적인 것이었으 나 온유의 복은 하나님과 남을 향한 행동과 성향입니다.
그리고 온유의 복은 바로 앞의 두 가지 복에 대한 내적 체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 성냄, 보복, 반역 등의 불꽃에 냉수를 끼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앞의 체험들을 통과하여 우리 자신을 정당하고도 겸손하게 평가하며 통회 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발 아래 엎드리고, 그의 은혜로운 손에 붙들려 티끌 가운데서 일어나 그의 품에 안기는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파악하고 통회하며 용서와 정화와 위로를 받은 자, 오직 그 만이 온갖 자극과 여하한 환경 속에서도 온유한 심령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의 죄악을 찾아내었다면, 그리고 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내 마 음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라는 의식이 가득찼다면, 오, 확실히 나는, 나를 죽이는 악을 내게서 제거하는데 주요 목적이 있는 하나님의 연단에 대해, 발을 구르며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내게 임한 그 슬픔 속에서, 그리고 온갖 손실과 실망 속에서, 또 내 삶과 가슴의 온갖 공허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위대한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 나님은'네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너의 모든 우상으로부터, 내가 너를 깨끗케 하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슬픔이 주어지는 목적, 가장 고상한 목적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에게 정 화의 도구를 너무 많이 주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불만을 터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통회하는 심령에 주시는 위로를 실제로 받았다면 하 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내든 쉽게 기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헤아려보고, 우리 가 주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가를 발견해 낸다면 형제의 멱살을 붙잡고 '내 게 진 빚을 갚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누가 만일 내게 부당하게 대하고 내게 해를 끼치며 나를 비웃거나 냉대한다 하더 라도, 거기에 화를 내는 나는 누구란 말입니까? 라고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 형제들이여,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 성을 보다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다행히도 천부적으로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지극히 심오한 동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바르고 참된 동기에서 이 미덕을 배양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동기를 보다 강화시키려면, 세번째 온유의 복이 8복의 꽃사슬에서 어느 위치를 점유하는지 고려해 보아야 하며, '영의 가난'과 '애통'이 온유에 선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재는 예리한 시금석이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 을 알고, 통회 중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하나님과 인간을 향해 온유해질 것 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인간을 향해 온유하지 못하다면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노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에 대한 의식을 삶의 항구적 기쁨으로 누리지 못하는 한가지 커다란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사 랑 가운데서 행하십시요.'

3. 온유한 자의 복   이 온유는 어디로 귀결되는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말씀은 시편에서 인용하여 구성한 말씀입니다. 시편 37 : 11에 보면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에 해당하는 클레로노메수신은 클레로노메오의 미래이다. 이 단어는 '상속한다,소유하다, 취하다, 보유하다'와 같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이구절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나 약속으로 받는 것, 즉 새로운 약속 의 땅을 소유하는 것 또는 상속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법에 복종과 의로움(신4:1; 16:20 및 시37:11)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
인 것처럼, 축복 선언에 나오는 가르침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라는 새
로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의 그 말은 약속의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평화로운 점령 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구약시대에 가나안 점령은 이스라엘의 충성에 좌 우되는 사안이었습니다.
진정한 통치권과 정복은 온유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온유가 온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와,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한 여호수아가 이를 반영하여 줍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리고 메시야 왕 자신의 점령 계획표인 이 산상수훈을 살 펴볼 때, 이러한 말씀은 육적인 유대인들의 뜨거운 메시야 대망사상에 분명히 한 바케스의 찬물을 끼얹는 행위나 다름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질적 뿐만 아니라 군사적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있어 서 메시야는 그들을 전쟁의 승리로 이끌어 줄 분을 뜻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 의 미에서 무력에 의한 정복과 싸움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메시야는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로마 군단에 대한 이런 무력적 폭 동으로 땅을 수복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의 생각을 물리쳐 버리는 말씀으로, 사실은 '온유하라 그러면 참으로 땅을 소유할 것이다. 가이사랴 의 총독관저에 빌라도가 있든 없든 그건 상관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사고방식과 크게 대조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이 사상은 로이드 존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비참하게도 오늘 의 교회의 사고 방식과 매우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죄와, 그리고 그리스도께 적대하는 것들과 싸운다는 관점에서 생각 할 때 큰 조직체(기구)을 방편으로하여 싸운다고 생각하는 비극적인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대항하는 강한 대적들이 있고 교회가 분열되어 있으니 우리는 모두 연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 조직된 대적들과 대결하기 위해 한 개의 거대한 조직(기구)를 가져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아니다, 온유한 자들이 복이 있고 땅을 소유한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온유한 자들은 그들의 조직을 의지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세력과 능력과 제도와 물량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8복에 부속된 모든 약속이 그러하듯 이 이중적 관련성 을 가집니다. 이 약속은 현재에는 물론 미래에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이 엉성하고 허술한 해석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에서 불충분하게 입증되는 이 약속의 확실성이, 미래의 완성에 대 한 어떤 희미한 소망에 의해 보충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참 제자가 됨으로써 받는 이 선물들은 현세와 내세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 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내세에는 상황이 변하며 우리가 지상에서 체험하는 것과는 다른 많은 요소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행복의 본질은 이 세상에서나, 그리고 희미하게 빛나는 저 멀 리 영원에서나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이중적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어떤 임시 변통적 해석이 아니 라 본
질적인 실제 사실입니다.

그림자가 햇빛을 따라다니듯, 확실히 현세에도 온유에는 땅의 상속이 뒤따릅니다. 물론 문자적 의미에서의 상속은 아닙니다. 이 그리스도교적 미덕에, 모종의 물질적 이득을 끌어당기는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소유에 있어서는 세계가 강한 사람, 유능한 사람, 힘과 박력과 야망이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당신이 군중 사이를 뚫고 나가고 싶다면 팔꿈치를 가능한 한 날카롭게 내밀고 발로 옆 사람의 발가락을 가능한 한 힘껏 밟으라. 그러면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군중의 모퉁이에 있는 온유한 사람은, 거기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러한 물질적 의미에서 우리가 땅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거기에 어떤 실질 적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땅의 평수로 측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풍요로운 외적 조건, 탐욕의 꿈을 한껏 충족시킨 부요, 슬픔의 아픔을 초월 한 재물은, 어떤 사람에게든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온전한 지복은 말할 필요도 없 거니와 세상이 알고 있는 어떤 초라한 행복조차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업으로 받는다(상속한다)"는 의미를 캐기 위해 더욱 깊숙히 파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간에 진정,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 고요하고 평온한 수용 과 그 뜻에 대한 순종, 그리고 남을 향한 이 부드러운 사랑의 자세는 필연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옵니다.
이 마음의 평화는 하나님이 우리를 물질적 빈곤 중에 처하게 하신다 하더라도 거 기에서 가장 차원 높은 유익을 획득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적 제사를 통하여 먹을 어떤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감사, 사랑, 신뢰, 헌신 등 정신적인 것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사람들도 이와 같이 살아가며 이를 통해 번영을 누립니다. 비록 지
상적 소유물은 매우 적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 지상적 이득을 진정한 차원에서 소유하므로 행복합니다.
많은 악인들의 부요보다 의로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적은 것이 더 낫습니다. 바울 은"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만족하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빌 4 : 11 이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온유한 사람들이 토지를 획득한다는 의미입니까? 그들이 비 록 단 한 뼘의 땅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현재 땅을 상속할 수 있다는 겁 니까? 그렇습니다. 온유한 자들은 세상을 소유한거나 다름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표현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 : 10)라고 했으 며, 또한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례(침례)나 생명 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이요"라고 했습니다(고전 3 : 21이하).
지상은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며, 그들은 지상에서 하나님 을 뵈옵고 그들에게 있어 지상은 섬김의 장이요 인격적 성장의 수단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이 약속에는 미래에 있을 또 하나의 성취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 일반적으로 흐르는 듯한 사상 즉 완전한 형태 의 하나님 나라가 새롭게 된 땅, '의가 거하는 새 땅'에서 실현된다는 진리와 일 치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는, 하나 님과의 교제 및 동화라는 궁극적 상태에서도, 어떤 외적인 우주가 존재하여 그리스 도인들이 그 위에서 활동하고 거기에서 아직껏 상상하지도 못한 희열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쨋든 우리는 자기 죄를 인식하고 애통해하며 온유하게 사는 자들, 그리스도의 용 서와 정화의 위로를 유일한 소망으로 마음에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자들, 온유하게 수용하고 온유하게 참으며 온유하게 순종하는 자들은, 현세에도 광야를 장미처럼 피어나는 희락의 동산으로 만들 것이고, 고요한 평화의 샘을 얻을 것이며, 금후 내 세에 만유에 대한 주권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온유가 이깁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모든 것)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계 21 : 7). 그래서 마음이 온유한 자들은 마음이 온유한 왕과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참조 : 딤후 2: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