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7


"긍홀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요."
8복은 간결한 표현이나 전체의 연속성에 있어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신적 금언 입니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일련의 8복 중 첫째 것은 후속되는 모든 복 의 뿌리와 토대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첫번째 것을 잠시 제쳐두고 거기에서부터 연달아 발전되는 열매들만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연속적 8복의 나머지 항목들이 쌍쌍으로 빼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 다. 그런데 이 각각의 쌍은 하나가 보다 내면적인 인격적 특징으로서 개인 신앙의 깊 은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하나는 타인과 관련된 행동 분야를 가지고 있습니 다.
예를들면 애통하는 자와 온유한 자가 한 쌍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긍홀히 여기
는 자"와 한 쌍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와"화평케 하 는 자"가 한 쌍을 이룹니
다.

이러한 순서를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주님은 구약성경의 형태에 따라, 첫 째 되는 큰 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그 다음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 씀하시면서, 이 두번째가 첫째와 같은 것, 첫째의 연속이라고 지적하셨는데, 8복의 연속성은 바로 이 위대한 원리(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세한 적용인 것입니다.
베품없는 신앙. 신앙 없는 베품은 둘 다불구자입니다. 전자는 열매 없는 뿌리, 후 자는 뿌리 없
는 열매입니다. 최상의 감정, 가장 겸손한 신앙, 가장 고귀한 열망, 자 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극히 심오한 자각 등 무한히 값진 이 개인적 신앙의 요소들 이, 만일 온유, 긍훌, 화평케 함 등과 불가분리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별반 가치 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위해 인간에 대한 봉사를 무시한다 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그리스도교 반대자가, 그리스도교가 이웃에 대한 그러한 무관심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교를 공격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공격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체계를 오해한 것이며, 그리스도교를 주님의 완전한 교훈 대신 제자들의 불완전한 실천에 의거해 그릇 판단하는 행위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 일련의 8복에서 핵심부에 자리 잡은 인격적 특성으로서 전적으 로 서로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매우 평 범하고 흔하고 실천적인 종류의 설교가 될 것입니다.

1. 주님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인격 자체-긍휼

8복의 여타 모든 항목들이 그렇듯이 이 특질도(그러나 마지막 것은 아마 예외) 행 위보다는 내적 성향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행동도 수반되지만 행동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입니다.
현명하고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그떻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언제나 행동을 둘째 위 치에 놓으십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 이것은 고상한 모든 도덕률의 원리
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도덕률보다 더 철저하게 이 원리 를 밝혀준 것은 아직 없었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캐는데 있어, 단순한 긍흘의 행위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이 위대 한 말씀을 제한하고 어설프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것의 일체 강조점을 행위에 두지 않고 상태에 두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행동보
다 우리의 자세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이 복음의 주요 강조점은 여 러분과 제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들인 가에 두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살펴보면, 우리 주님은 성격과 기질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주님은 행동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만 이에 앞서 성격과 기질을 말씀 하고 계십니다.
기독교인은 그가 무엇인가를 행하기에 앞서 어떤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인으로 행동할 수 있기에 앞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존재(being)는 행위 (doing)보다 더 중요하며, 자세가 행위보다 더 의의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성품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성격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기 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애쓰거나 행동하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면 우리의 행동은 그 결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을 달리 표현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를 통제하 게끔 되어 있
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기독교가 우리를 통제하겠큼 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 전체의 관점에서도 그러하지만 팔복의 관점에서 볼 때도 이와 다른 식으 로 생각하면 전적으로 잘못입니다.
예를 들면"내가 참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 하며 이것을 적용해야 하겠다"라고 말하면 잘못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설 정한 방법이 아닙니다.
나의 기독교가 나를 통제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내가 진리의 지 배를 받아야 하는 것은 내 속의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입 니다.
바울은 진리를 잘 표현했습니다."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 스도께서 사신 것이다"(갈 2 : 20)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나를 지배하시 는 것이지 내가 주님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나의 태도를 통제하고 여러가지로 기독교인이 되려고 애쓰고 있는 자연인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영은 나의 생활 중심에서 나를 통제하고 있으며, 나의 존재의 바로 근원에서, 나의 모든 활동의 원천에서 나를 조종합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서는 8복을 읽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생활의 표면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일종의 도금이나 합판 장식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인격의 바로 중심에서 발생하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신약성경이 중생이나 거듭남에 대하여, 그리고 새로 지음(창조)과 새 성품을 받는 것에 대해 언
급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것은 그의 모든 생각과 그의 모 든 전망과 그의 모든 사상을 통제하며 그 결과로써 그의 모든 행동까지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활동은 이 새창조의 결과요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이 새 성품의 결과가 되는 셈입니다(로이드 존스)」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긍휼히 여기는(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에몬은'불쌍히 여기다,
동정을 베 풀다'를 뜻하는 동사 엘레에오(헬1655)에서 파생되었으며,'자비로운(자), 동정심 있는(자)'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긍휼은 우선 첫째로 남, 특히 고난과 궁핍 중에 있는 사람. 아니 더 나아가 서는 비난을 살만한 악한 사람을 향해 느끼는, 어떤 습관적인 감정과 그를 보는 태 도입니다. 남을 곧이 곧대로 대하면 결국 보다 엄격한 행동 방식과 사고 방식이 나 올 수 밖에 없지만 긍휼은 이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긍휼을 은혜와 비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서신에 은혜와 긍휼이라는 말이 나오며, 이 두 용어 사이에는 흥미있는 특징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최상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은혜는 죄를 지은 사람들과 특 히 관련되고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특히 관련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은혜가 죄를 전제로 하고 내려다 본다면, 긍휼은 특히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불쌍한 생각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의욕이 합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긍휼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이 긍휼, 곧 자비에 대해 몇 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자비로운 사람의 첫째 특징은 남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의 자비로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악평하거나 동료를 평가함에 있어 험담을 일삼지 않고, 끝없이 그리고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남에 대한 책망에 있어 온 화하며 남의 행위와 동기를 관대하게 해석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와같이 자비롭습니까? 자신을 검토해 봅시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사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평범한 것에 깜짝놀랄만한 권능 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오래 묵은 평범한 것을 자신의 삶 및 행위와 직접연 결시키는 것입니다.
이 평범하고 오래 묵은 길을 일주일 동안 시험 삼아 걸어 보십시요. 그러면 그러한 생활 방식이 당신과 맞물러 당신을 단단히 사로잡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 다. 그 오래묵은 진리는, 그 진리에 순종할 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며, 우리가 거 기에 복종하려고 노력할 때 평범한 진리이기를 그칩니다.

(2) 자비로운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기꺼이 돕고자 하는 마음, 주고자 하
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 긍휼의 실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고 숙식을 준비시켜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여 기서 말하는 긍휼입니다. 참으로 그 사태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 다.

(3)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 심지어 원수에 대해서도 적대하거나 반감을 가
지기 보다는 오히려 동정하여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입니다.
이런 긍휼 곧 자비에 대한 최고의 실례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 반역하는 인간 을 불쌍히 여겨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 간의 상태를 해결해 주신 거입니다.

여러분 긍휼의 영을 가진다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죄지은 사람이나 대적자 에 대해서 느끼는, 그리고 그들이 여러분의 권세 아래 있음을 발견할 때 나타나는 그러한 영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긍휼한가 아닌가를 아는 길은 여러분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 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자, 나는 이점에서 내 권리를 행사해야겠다, 법대로 처리해야겠다, 이 놈 잘 걸려들었다 라고 말합니까?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대적자에 대해, 복수의 영을 품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 중 에 있는 적대자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영, 친절한 영을 품고 있습니까? 긍휼에는 사회와 도덕에 대한 범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범죄까지도 쾌히 용서하려 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복을 상속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에서 반감이나 적대 감정, 조롱 섞인 회의감, 그러한 어떤 앙금도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적인 심약한 태도로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어'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행할 바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용서 가 아닙니다. 그것은 긍훌이 아닙니다.
가장 비열한 인간들과 흉악무도한 원수들도 우리에게서 긍훌을 받을 권리가 있습 니다. 저항 없이 고요히 서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행하신 일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서로 행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팔은 도 움의 손길을 한껏 내밀어야할 것이고 우리의 마음에서는 긍훌과 자비가 용솟음쳐 야할 것입니다.
긍훌은 소극적 온유의 적극적 측면입니다. 수동적 온유의 미덕만을 발휘하는 것으 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긍휼이라는 적극적인 미덕이 있어야만 합니다.

나아가 여기에서 또 하나 간단하게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즉 그것은, 남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이 7중 다이아몬드관(冠)( I복부터 7복까지)에 그리스 도가 박아 놓으신 보석 가운데 무려 세 개가. 증오와 부정에 대한 온유, 연약함과 사악에 대한 긍휼, 적대와 다툼에 대한 화평의 조성 등 악에 대한 선의 자세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인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가히 파악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살고 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미덕은 상기와 같은 악 덕들을 전제로 하는 미덕이라는 것입니다 ! 세상은 이처럼 악이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오늘날 우리가"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다는 것은 진정 사실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유일한 힘은 모든 악을 선으로 갚는 끈질긴 온유와 긍휼입니다. 이것이 악을 변화시키고 극복할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사람들은 본장에 수록된 그리스도의 이 교훈들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곧잘 말 합니다. 그들이 만일 두 주간 정도만 이 가르침대로 살아본다면 그들이 신약성경의 (신학을 좋아하지 않은 자들이 하는 것처럼),'산상 수훈이 나의 나의 종교라고 말 하기 전에 그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을 아마도 중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좌우간 그것은 실천이 지극히 미약한 종교입니다.

2. 팔복에서 긍휼이 차지하는 자리

기독교적 신앙을 전적으로 떠나서도, 인간 본성의 구조 속에는 주님이 여기에서 복 을 선언하신 긍흘의 감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래적으로 마음도 후 하고, 말도 후하고, 행위도 후해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자비롭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이 자연적 본능적 감정이 아닙니다. 자연적, 본능적 긍훌지심은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윤리나 도덕, 법를은 거의 상 관하지 않고 안이하고 적당주의식, 눈가림 주의식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삶에서 일관성있게 실천되기 위해서는 보다 고상한 사상의 뒷받 침이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주님이 말씀하신 긍휼은 본능 이상의 것, 단순한 감상 이상의 것, 가련하고 슬픈 일을 볼 때 나타나는 인간 마음의 자연적 반응 이상의 것입니다. 사실상 이 긍휼은 8복의 사슬 가운데 선행하고 있는 모든 인격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의 것들을 다시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심령의 가난","애 통", "온
유,""의에 주리고 목마름"- 이것들이 이 긍휼의 강에 물을 흘려보내 는 샘입니다.
이 샘에서 홀러나오는 물을 가지지 않고 인간적 감상과 본능의 지표수만을 받아들 인다면, 긍홀의 강은 오래지 않아 곧 말라서 불모지에 생기를 주지못하고 목마른 입술을 축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와 복에 선행하는 약속들을 살펴봅시다."천국이 저회 것임이요,""저 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들은 긍휼의 강으로 흘러오는 또 하나의 원류입니다. 다시 말해, 진정하고 지속적이고 믿을만하고 정복의 힘이 있는 긍휼지심은, 두 개의 근 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 자신의 연약성에 대한 자각, -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슬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유한 순종과 남으로부터 오는 반감에 대한 부드 러운 수용, - 보다 완벽한 의를 향한 열렬한 갈망과 삶과 인격의 더욱 빛나는 순결에 대한 열망 등,이런 체험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형제에 대한 평가를 더욱 부드럼게 만들고 형제와의 관계에서 따스한 자비가 가득하게 만듭니다.

- 자기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시커먼지를 안다면,
- 죄의 유흑에 얼마나 쉽게 넘어가는지를 안다면,
- 내가 행한 미덕 가운데 내 탓으로 돌릴만한 것이 얼마나 적은지를 안다 면(그러한 미덕들은 주
로 내가 유혹을 받을 기회가 적었던데서, 그리고 미덕을 발휘할 만한 우연한 기회가 주어겼던데
서 비롯되었다),
- 내가 남에게는 엄격한 판단을 적용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한 가를 안다면,
- 나의 혀에서 비난의 말이 나오려 하다가도 머뭇거릴 수 밖에 없을 것이 며 형제의 헹위와 인격
에 대한 가혹한 판단은 침묵에 싸이고 말 것입니 다.
지극히 훌륭한 성도는'공공연한 외적 폭발을 제외하고는, 가인과 유다가 가진 것 가운데 내게 없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를 자각하고 있다면 스스로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인가 ?" 그리고 남에 대한 정죄의 말은 입 밖으로 내려는 순간 목구멍 을 가시처럼 찌르게 될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 이러한 자아 인식, 자아에 대한 겸손한 평가,
- 죄에 대한 통회 자복,
- 하나님에게 대한 자기 의지의 순복,
- 내가 소유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의에 대한 갈망 등등의 길을 거쳐,
- 주의 선물에 의해 나의 빈곤이 풍요로 바뀌고,
- 그의 은혜로운 손길에 의해 나의 눈물이 얼굴에서 씻겨 나가며,
- 나의 겸비한 의지에 보다 충만한 축복이 쏟아지고,
- 내가 갈망하는 의가 내게 주어지는. 그러한 위치에 내가 만일 들어섰다 면,
- 무가치한 자들에게 거저 베푸는 것, 내가 이미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주 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늘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서 너희를 사
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 : l-2)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긍휼을 받은 자만이 깊게, 철저하게, 보편적으로, 항상 긍훌을 베풀 수 있습니다. 빛은 물체에
닿는 각도와 똑 같은 각도로 반사됩니다.
많은 어두운 심령들을 밝게 비추고 그늘진 여러 곳에 밝음을 줄 수 있는 광채가 우리의 얼굴과 삶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천상적 광선의 원천으로 완전히 돌려 거기에서 나오는 빛을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러한 사상 가운데는 실제적인 명백한 권면이 두 가지 들 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의 열매가 무엇인가를 알 자는 것과, 인간들에 대한 우리의 긍홀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긍휼의 분량 에 대한 정확한 척도라는 것을 깨닫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긍휼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수한 자선 사업과 박애주의적 행위가 실천에 옮겨지고 있지만, 그 중, 자 선을 행하는 개개인들에 관한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인식 및 신앙과 동 떨어진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세계 곳곳을 흐르는 비그리스도교인들의 자선 행위의 물 줄기가 그리스
도의 샘에서 흘러 나왔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견상, 그런 행위들이 그리스도의 생과 무관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리스 도의 샘으로부터 은밀한 공급은 있었습니다. 만일 신약성경이 없었다면 오늘날, 신 약성경의 가르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그 많은 자선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 탄생 이후 세상에 편만했던 자선의 원천은, 우리가 복음주의 적 그리스도교 신앙이라 부르는 그 위대한 진리입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만일 여러분이 보편적 죄성의 교리를 없앤다면,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덮어버린다면,만일 여러분이 그 십자가에서 지극히 무가치한 자들에게 끝없는 긍흘을 베푸시는 어떤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그것은 생명력 있는 진정한 자선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짓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보다 겸손하고 보다 진정한 이해에 이르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로 현현하는가에 대해 보다 고상하고 보다 진실한 신앙에 이르도록 합시다.
나아가 우리가 이런 이해와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소망의 닺인 그 진리를 삶 의 모형으로 삼음으로써, 우리에게 그런 이해와 신앙이 있음을 보여 주도록 합시 다.

3.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저희가 긍흘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엘레에데소나이는 동사 엘레에오(헬1655)의 미래 수동태로,'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혹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 그 동기는 명백히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 께서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지며, 수동태가 사용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 이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냅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때 B도 A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이 위대한 사상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주고 받기식 관계는 경우에 따라 사실 일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아닙니다.
모든 8복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따라서 다섯번째 복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비로 운 사람들이 얻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의식과 체험이 나의 자비에 선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 그런데 지금은 나의 자비가 하나님의 긍휼에 선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아닙니다. 나는 우리의 긍휼이 하나님의 자비에 선행해야 한 다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은. 한편으로는 내가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함으로써 마음 속에서 감사와 본받 을 마음이 일어나 긍홀지심이 생성되고.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내가 주를 본받아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깊게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말 하자면 나의 자비는 금지환의 호(弧)들 사이에 박혀있습니다.
이것은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그 보편 원리의 일례에 불과합니다. -"있는 자는 받 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구원이란, 어떤 사람에게 일단 주어지면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지속되는, 그러한 취소될수 없는 선물이 아닙니다(거듭남과구별하여 이해할 것). 구원을 받은 후에도, 구원의 보존을 위해서는,
그리고 가일층 그 성장을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확실한 감정과 행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은, 일련의 8복 가운데 이 하나가 단독적으로, 8 복 전체의 통합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여러 복들을 쏟아붓는, 완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다섯번째 인격은 위로부터 내리는 복을 받을 일련의 집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복은, 생명에는 생명, 죽음에는 죽음으로 갚는다는 그 위대한 법칙 에 따라, 문제의 그특별 은총 (Grace)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후에도 거칠고 가흑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무자비하고 베풂 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자비를 어떤 생생한 의식 속에 보존한다거나 어떤 복된 결과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종이 동료의 멱살을 붙잡고'빚을 갚으라'고 말했을 때, 그 주인이 노하여 그 빚 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습니다.
구원은 거저 주시는 선물로 우리가 받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선물에 상응 하는 감정과 행위로써 이를 보존해야 합니다.
자아를 목표로 삼는 자비는 자비가 아니지만, 자비를 베푸는 동기가 이미 받은 자 비이고 자비를 베풀도록 자극하는 것이 앞으로 받을 자비라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 한 이치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사도는"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했습 니다. 우리 자신의 무가치성과, 자비로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들을 생 각할 때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하나님을 본받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