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사53:1~12

제목 :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얼마 전 대구 지하철 화재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가슴 아픈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잠시 후에 자신이 죽게 될지도 모르고 연기가 나는 지하철 안에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앉아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 ‘인생이란 잠시 후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하는 참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고 난 전동차의 기관사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고 하였다는 발표는 온 국민을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긴 사고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둡고, 뜨거운 열기와 유독성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지하철 역구내 화재현장에서 한 명의 인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119 구조대의 헌신적인 구조 활동은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몇 일전 TV 뉴스 시간에 당시 구조 활동에 참여했던 구조대원 중 10여명이 병원에 입원 중이거나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동안 안타까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과 유족들의 슬픔에 가려서 이들의 고통은 세인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구조대원이 인터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짧은 인터뷰의 내용을 보면서 지하철 사고에 대한 책임을 면해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숭고한 희생과 봉사 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그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아이가 학교에 다녀오더니 울면서 “엄마! 미워~”라고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 가버렸습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이 되어서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아이는 “나 이제부터 학교 안 갈꺼야”라고 말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바로 이틀 전에 학교에서 학부모와 선생님이 만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자기 아이의 담임선생님을 만나기 위하여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얼굴에 화상을 입어 보기에 흉측한 모습이었습니다. 엄마가 학교에 갔을 때 아이의 친구들이 화상을 입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는 “네 엄마는 괴물같다”라면서 놀리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엄마는 다 젊고 예쁜데 엄마는 왜 그렇게 생겼나는 것입니다.

아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앨범에서 예쁘고 젊은 여자의 사진을 하나 꺼내어 아이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그 사진을 받아 본 아이는 ‘왠 모르는 여자의 사진이냐?’는 식으로 시큰둥한 표정이었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이 여자는 바로 엄마의 젊었을 때 사진이란다.” 그러나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엄마는 계속하여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엄마가 젊었을 때에는 여기 사진처럼 예뻤다. 그런데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아 너를 낳았지. 그 때 너무 행복했단다. 그런데 네가 태어난 지 얼마 후의 일이란다. 네가 방에서 쌔근쌔근 잠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밖에 나와서 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았겠니? 소방차가 급히 달려오고 많은 사람들이 불을 끄기 위하여 난리를 피웠지. 그런데 그 집 안에 바로 네가 잠들어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어. 나는 너를 구출하기 위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붙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집안으로 뛰어들었단다. 네가 누워있던 방 쪽에서 너의 우는 소리가 들렸어. 나는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너를 가슴에 안고 뛰어나오는 순간 불이 붙은 나무가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단다. 옷에 불이 붙어 너무 뜨거웠지만 너를 구출하기 위하여 불을 끌 생각을 하지 않았단다. 다행히 밖으로 나와서 너의 생명을 건졌지만, 내 얼굴은 그 때 입은 화상으로 지금처럼 흉측한 모습이 되고 말았단다. 비록 내 얼굴이 이렇게 되었지만 나는 네가 예쁘고 건강한 모습으로 잘 자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단다.”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엄마가 나 때문에 예뻤던 얼굴이 이렇게 되었군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엄마를 미워하였던 것을 용서해 주세요. 이제는 친구들에게 엄마를 자랑스럽게 말할꺼에요. 우리 엄마보다 더 예쁜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므로 자식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이 아니라도 우리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난 아무리 다른 사람이 착하고, 사랑스럽다 해도 자기 목숨을 반드시 잃게 될 것을 알면서 희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롬5:7~8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인도 아니요, 선인도 아니요 죄인일진대 누가 우리를 위하여 죽어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날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십시오. 또한 그 분의 사랑을 보답하기 위하여 그 분이 기뻐하시는 선한 사업에 힘쓰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쓴다고 해도 늘 부족할 것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피비린내 나는 십자가 얘기는 좀 그만 하자. 그것은 원시적인 생각이야.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야.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다른 것은 집어 치우자”

참으로 고상하고 교양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뜻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에 대하여 이해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극치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요즈음 여자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십자가가 악세사리로 쓸 정도로 자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흉악한 사형수의 목을 치는 단두대와 같고, 강한 전류로 목숨을 뺏는 전기의자처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제도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부터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조금도 그 고통이 감해지지 않으며, 서서히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조차 이 십자가를 가장 잔인한 것, 최후의 것,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후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틴 대제가 이 제도를 폐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불명예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고백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고전15:3의 말씀대로 ‘성경대로’ 죽으신 죽음입니다. 그의 죽음과 나아가서는 어떻게 죽으실 것이라고 하는 것까지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자신의 입술을 통하여 예언되었습니다.

시22:16에서는 그의 손과 발이 못 박힐 것을 예언하였고, 18절에서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를 정죄하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주어 조롱당하게 하고 채찍에 맞게하며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리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은 여러 사건과 모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의 기사를 살펴봅시다. 그들이 제사를 드릴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이삭이 나뭇짐을 지고 갔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자기가 매어달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날 밤에 어린 양의 뼈를 꺾지말고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요한은 로마 군병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않은 사실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다른 모형이 놋뱀 사건에서 발견됩니다. 가나안땅으로 가는 도중에 불뱀이 나타나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놋뱀을 보는 사람마다 낫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마다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 사건을 언급하셨습니다. 요3:14에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 언급은 이와 같이 매우 확실한 것입니다.

신21:23에 “나무에 달린 모든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예수를 저들의 메시야로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되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죄인인 우리의 구원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롬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죽게 된다는 사실은 모세의 율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2:16 이하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명령을 어기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었을 때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범죄하기 전의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영생체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원래 심어두신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어기고 죄를 범하여 죽게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이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기 시작하였고, 사람이 종일토록 땀을 흘려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인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아담과 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까지 발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5:12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에게 죄가 유전되어져 왔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그 자식들에게 그리고 모든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도 마음속에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부모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떤 인간도 이런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사람의 마음은 완악하여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죄를 짓습니다. 이것은 ‘자범죄’에 해당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표현에서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영원한 죽음과 저주를 당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였던 인류에게 크나큰 사랑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하여 당해야 할 사망의 저주에서 구출되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5:17~19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한 말씀이 바로 이 위대하고 놀라운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두움과 사망 가운데 신음하는 인류에게 참으로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소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너무 쉽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나 자신의 공로가 있어야 하지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나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입술로 고백하십시오.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나아가서 나 중심으로 살았던 엣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하여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6:2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을 믿으면 그 순간부터 죄악된 나 자신의 옛모습도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때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체험하는 것이요, 십자가를 체험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죽으신 그 죽음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죄용서와 구원받은 기쁨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출처/윤성화 목사 설교 중에서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