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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장 1-14절
언젠가 '월간 조선'에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산악인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사람이 히말라야의 어떤 매우 어려운 고봉에 도전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산 등정 때 보통 그러하듯이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하여 몇 차례의 캠프를 거친 후에 정상에 가장 가까운 곳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하게 되면, 거기까지 함께 갔던 대원들 중에서 오직 두 사람만 정상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도전하게 되는 그날 아침이었습니다.
그 산악인은 자기 후배인 어떤 대원 한 명과 짝을 이루어 등반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그 준비란 것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어이, 나는 카메라 메고 갈 테니까, 넌 뭐 좋아해? 아무거나 너 잘 먹는 것 챙겨." -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8,000미터 급의 고봉을 등정하려는 그 중요한 날 아침에 그 두 등반가 사이의 대화는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정말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고 그저 눈만 마주쳐도 이미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출발한 그 두 사람은 등반 도중에 폭설을 만나 눈구덩이 속에서 이틀 밤이나 비박을 하는 등의 초인적인 투쟁 끝에 결국 그 고봉을 정복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가장 원활한 의사소통은 말보다 먼저 '마음이 통하는' 것이며 '사람이 통하는' 것이라는 원리는 바로 신자의 기도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신자가 기도드릴 때 '하나님과 먼저 통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무엇인지를 우리 주님의 오묘한 비유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기도는 소원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1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항상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자주 기도하라'는 뜻도 되고, 혹은 '계속 기도하라'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너무 귀찮게 굴지 않기 위하여' 기도 횟수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기도드렸으니 그것이 최대한도라고 정해놓고서 매일의 기도 횟수가 그것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따져볼 가치조차 없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즉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는 "항상" 드려야 하는 것이지 무슨 횟수의 제한 따위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항상 기도'하기 위해서 꼭 한 가지 극복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낙망'이야말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대표적으로 겪게 되는 시험이며, '항상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도중에 낙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체로 그것은 기도 응답이 기대했던 것처럼 속히 내리지 않을 때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낙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시고자 이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즉 오직 자기 생각과 욕심만 철저히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불쌍한 사람에 대한 어떤 자비심의 발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저 공정한 재판 그 자체도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재판관 치고는 정말 대단한(?) 성품의 소유자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자주" 찾아와서 자기 원한을 풀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부당한 복수를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과부는 그 철저히 이기적인 재판장을 움직일만한 아무 재력도, 연줄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 '자주 찾아가서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아니하던 그 재판장은 나중에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더 이상 번거로움을 당하는 것이 귀찮고 괴로워서 그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 이하 8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6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단지 그 과부의 끈질긴 소청 때문에 그처럼 바늘 끝 하나 들어갈 여지없이 보였던 재판관의 마음도 움직였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앞의 경우는 '불의한 재판관'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앞의 경우는 그 재판관이 눈이라도 깜빡할 이유도 없는 무력한 '과부'였지만, 여기서는 '그 택하신 자'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당신의 양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관계에서 "밤낮 부르짖는" 끊임없는 기도가 올려지고 있는데 하늘 아버지께서 못들은 척하고 얼마나 '오래 참으실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셨습니다.
물론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예수님께서 장담하시는 대로 반드시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다음에 이어서 덧붙이신 말씀이 정말 의외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을 말합니다.
당신의 택하신 자들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물론 '속히' 응답해 주십니다.
하지만 그 '속히'라는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대에서 말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시간대에서 그 '속히'라는 시간은 항상 '당장'이나 '며칠 이내'가 아니라, 몇 주일, 몇 달, 혹은 몇 십 년까지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속히'라는 것은 "인자가 올 때," 즉 예수님 재림 때까지 걸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약속을 하실 때에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처럼 기도 응답의 시기는 오직 하나님의 시계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조금 기도해보다가 도중에 쉬 '낙망'하는 교인들이 많은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재림할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항상 기도하는 믿음 가진 사람을 얼마나 보겠느냐?"라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세는 자기가 지금 기도드리고 있는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부단하고도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간청을 못 이겨 들어줄 수밖에 없다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야 얼마나 더 확실히 응답해주시랴.'라는 철저한 신뢰야말로 신자로 하여금 끝까지 낙망치 아니하고 기도드리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입니다.
오직 이 믿음 있는 자만이 '항상 기도'할 수 있으며 '인자가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꼭 이루어졌으면 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란 그런 식으로 정의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막연히 어떤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나 돌과 나무 앞에서 절하는 모습은 이 세상의 여러 종교들이나 미신에서 가장 흔하고도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기도란 것은 그 정도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기도하는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짐으로써 성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이처럼 인격적으로 통하는 것 없이 그저 자기 소원만 가지고 기도하려는 사람은, 그 기도가 자기 뜻대로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빌어 보았자 별무신통하다고 싶으면 그 다음에는 이단 사이비 교주 앞에도 가보고 부처 앞에도 가보고 무당 앞에도 가보고 끝내는 말 못하는 돌 앞에까지 물을 떠다놓고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드리는 대상과의 내면적 관계라는 것이 선행되지 않고, 일단 자기 기도를 먼저 응답해주면 그 응답해주는 신을 믿겠다는 식인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가 그런 유치한 것, 주객전도 격의 미신이 되어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조건을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신뢰하는 믿음 가운데 그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면서 끝까지 낙심치 않고 항상 기도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하는 것입니다.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를 서두에 분명히 밝히시면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의 기도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 기도의 대표자 역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의 기도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온통 자기 자랑이었습니다.
첫 서두에서 딱 한번 "하나님이여"라고 부른 것 외에는, 전부가 다 자기가 얼마나 완벽하게 신앙생활했는가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보고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함을 자랑했습니다.
원래 율법에 정해진 의무적인 금식은 일 년에 꼭 한번 대속죄일에 하는 것뿐이었지만, 이 바리새인은 일주일에도 월요일과 목요일을 정해놓고 금식일로 지켜왔다고 자랑했습니다.
또 "소득의 십일조" 드림을 자랑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한 십일조 외에도 자기 개인정원에서 나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까지도 어김없이 계산해서 바친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훨씬 더 많이 초과달성하는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자랑스레 보고한 것이 그의 기도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보고하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특히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지금 같은 성전 안에서 같이 기도드리고 있는 곁의 한 사람을 지목하여 자기와 비교하면서까지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란 것이 전무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만이 그의 청산유수 같은 미사여구의 구구절절에 가득 차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반면에 13절과 14절에 기록하기를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리의 기도에는 조금 전의 바리새인의 경우와 같은 유창한 말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 대신 몸으로 이미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멀리 서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전 앞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조차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슴을 치며"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란 설명하면 오히려 사족이 될 정도로 명백한 것입니다.
실로 이 세리의 자세는 그냥 보아도 정말 백 마디 말보다도 더 정확하게 자기 속에 있는 바를 솔직히 전달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밖에 다른 기도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는 가장 유창한, 최고로 아름답고도 완벽한 기도였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정말이지 이 한 문장보다 더 멋지고 진실한 기도는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드릴 줄 아는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오직 이런 기도드릴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를 낮춤으로써 높아지는," 즉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써 그 하나님께서 오히려 인정해주시는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확증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유창한 말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에서 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을 잘 못해서 기도 못 하겠다.'는 말은 결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청산유수 같은 언변으로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어디 세상에서 말 좀 잘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어디 세상에서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자기 자랑하는 소리 듣고 싶어서 그러셨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런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정말 듣기 지겹고 가장 역겨워 하실 기도들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아예 기도드릴 줄 모르는 교인들, 이런 사람들은 목사가 볼 때에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지만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믿는다는 교인들 중에도 '묵묵부답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조금 전 설교시간에는 분명히 '아멘'이라고 했는데 통성기도 시간만 되면 한 마디 소리도 나오지 않는 '급성 벙어리 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통성기도 시간에는 그래도 기도를 하는데, 나머지 엿새 동안에는 하나님께 한 마디도 기도드릴 줄 모르는 '주기적 벙어리 교인'들도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소위 '자녀'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주셔야 하겠습니까?
그저 과묵한 성격 탓이라고 넘겨주셔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점잖은 성격 때문이라고 칭찬해주셔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 앞에서 너무 겸손해서 말 못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주셔야 하겠습니까?
그 어느 것도 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무슨 말씀을 해주시는데 그 자녀라는 자들이 그렇게 아무 반응 없이 앉아 있다면 아버지로서는 어디까지나 기분 나쁜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다 용서해주시겠다고 말씀해주시는데도 그저 유구무언으로 앉아 있는 탕자라면 그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 어떤 감사도, 사랑도, 존경도 없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못난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겸손한 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나머지는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감이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는' 자세야말로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더욱 완벽한 기도의 서론입니다.
'가슴을 치는' 자세야말로 천만 마디의 말보다도 더욱 하나님께 정확하게 상달되는 진짜 기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 자신의 입술을 통하여 이 한 마디를 진심으로 고백할 줄만 알면 이미 최고 수준의 기도를 숙달한 신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창한 말이 아니라 오직 겸손한 자세에서 출발하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이처럼 하나님의 눈에 가장 사랑스럽게 보이는 자녀가 되시고 그 앞에서 참된 의인으로 인정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기도 잘한다'라고 할 때, 대개 '말 잘하는 기도'를 연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짜 잘 드리는 기도는 결코 말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도는 '믿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기도 잘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부터가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재림할 때까지 이렇게 기도드리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걱정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런 주님의 염려 그대로 현대교회들은 이런 '기도의 믿음'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자'는 것이 의례적인 교회의 표어로 전락되면 끝장입니다.
제가 당회에서 장로님들에게 어떤 기도제목을 말씀드리고 매일 기도하자고 부탁드리면, 모든 장로님들은 그 약속한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 기도를 각자가 드려야만 합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리라는 믿음은 오직 우리가 함께 기도드리는 가운데서만 통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안 통하는데, 어떻게 뜻이 통하며, 어떻게 힘이 모아지겠습니까?
서로가 하나님과 먼저 통하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 목사와 장로가, 목사와 집사가, 목사와 교인이 통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어려운 사정이 있는 교인에게 '저도 기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목사의 입에서 무슨 공수표처럼 계속 남발되는 인사말로만 끝나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목사가 삯군이요 외식자가 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기도회에 모일 줄은 모르고 주일예배에만 겨우 참석하는, 일주일에 딱 한 시간만 신자 노릇하는 교인들이 늘어갈 때, 그 교회는 반드시 사양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구미의 교회사를 볼 때 너무나 뚜렷한 사실이며 실로 두려운 경종이 아닙니까?
그처럼 목사부터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아니하고 교인들에게 기도의 확신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기도의 응답을 해주시겠으며 무슨 큰 역사를 이루어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쇠퇴하게 될 때, '말씀에 대한 믿음'과 '기도에 대한 믿음' 중에 어느 쪽이 먼저 약해지기 쉽겠습니까?
그 대답은 분명히 후자입니다.
오늘날 서구의 대형교회들의 예배시간에 설교에는 '아멘'이라고 화답하면서도 공기도 드릴 때에는 기도하던 목사 혼자만 '아멘'하고 끝내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걱정하시던 그대로, 교회가 '말씀에 대한 믿음'은 남아 있는 것 같아도 '기도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기 시작할 때 이미 교회의 쇠퇴는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주일예배 출석교인 수자가 늘어간다 하더라도 기도회에 모이는 수자가 함께 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결코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미 퇴보하고 있는 교회가 되고 만다는 이 주님의 엄한 경종에 대하여 모든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자기 '소원'을 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뜻'이 서로 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언어'가 통하는 것 이상으로 그 '인격'이 먼저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줄 모르는 교인이나 기도가 약한 교회는 결국 하나님과 제대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니 퇴보할 수밖에 없고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점 더 보기 힘들어지는 믿음,' 이 '기도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회복하고 지키며 더욱 강력하게 발휘하는 것은 곧 우리 각자의 개인구원 완성과 우리 교회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얼마나 조리 있게 자기 소원을 하나님께 잘 아뢸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그 마음속에 얼마나 확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의 은혜는 얼마나 막히지 않고 남들 듣기에도 좋은 말들을 이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못난 것과 더러운 것을 얼마나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마음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를 가지고 먼저 하나님과 진실하게 통하는 바른 관계를 맺고 기도드림으로써,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도 더 깊게 하나님과 영교하며 우리의 기도드린 것보다 훨씬 더 많고 좋은 것으로 내려주시는 응답의 축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언젠가 '월간 조선'에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산악인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사람이 히말라야의 어떤 매우 어려운 고봉에 도전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산 등정 때 보통 그러하듯이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하여 몇 차례의 캠프를 거친 후에 정상에 가장 가까운 곳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하게 되면, 거기까지 함께 갔던 대원들 중에서 오직 두 사람만 정상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도전하게 되는 그날 아침이었습니다.
그 산악인은 자기 후배인 어떤 대원 한 명과 짝을 이루어 등반 준비를 하게 되었는데, 그 준비란 것이 아주 간단했습니다.
"어이, 나는 카메라 메고 갈 테니까, 넌 뭐 좋아해? 아무거나 너 잘 먹는 것 챙겨." -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8,000미터 급의 고봉을 등정하려는 그 중요한 날 아침에 그 두 등반가 사이의 대화는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정말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고 그저 눈만 마주쳐도 이미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출발한 그 두 사람은 등반 도중에 폭설을 만나 눈구덩이 속에서 이틀 밤이나 비박을 하는 등의 초인적인 투쟁 끝에 결국 그 고봉을 정복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가장 원활한 의사소통은 말보다 먼저 '마음이 통하는' 것이며 '사람이 통하는' 것이라는 원리는 바로 신자의 기도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신자가 기도드릴 때 '하나님과 먼저 통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무엇인지를 우리 주님의 오묘한 비유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기도는 소원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1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항상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자주 기도하라'는 뜻도 되고, 혹은 '계속 기도하라'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너무 귀찮게 굴지 않기 위하여' 기도 횟수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기도드렸으니 그것이 최대한도라고 정해놓고서 매일의 기도 횟수가 그것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따져볼 가치조차 없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즉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는 "항상" 드려야 하는 것이지 무슨 횟수의 제한 따위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항상 기도'하기 위해서 꼭 한 가지 극복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낙망'이야말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대표적으로 겪게 되는 시험이며, '항상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도중에 낙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체로 그것은 기도 응답이 기대했던 것처럼 속히 내리지 않을 때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낙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시고자 이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즉 오직 자기 생각과 욕심만 철저히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불쌍한 사람에 대한 어떤 자비심의 발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저 공정한 재판 그 자체도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재판관 치고는 정말 대단한(?) 성품의 소유자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자주" 찾아와서 자기 원한을 풀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부당한 복수를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과부는 그 철저히 이기적인 재판장을 움직일만한 아무 재력도, 연줄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 '자주 찾아가서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통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들은 척도 아니하던 그 재판장은 나중에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더 이상 번거로움을 당하는 것이 귀찮고 괴로워서 그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 이하 8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6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단지 그 과부의 끈질긴 소청 때문에 그처럼 바늘 끝 하나 들어갈 여지없이 보였던 재판관의 마음도 움직였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앞의 경우는 '불의한 재판관'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앞의 경우는 그 재판관이 눈이라도 깜빡할 이유도 없는 무력한 '과부'였지만, 여기서는 '그 택하신 자'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당신의 양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관계에서 "밤낮 부르짖는" 끊임없는 기도가 올려지고 있는데 하늘 아버지께서 못들은 척하고 얼마나 '오래 참으실 수 있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셨습니다.
물론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예수님께서 장담하시는 대로 반드시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다음에 이어서 덧붙이신 말씀이 정말 의외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을 말합니다.
당신의 택하신 자들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물론 '속히' 응답해 주십니다.
하지만 그 '속히'라는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대에서 말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시간대에서 그 '속히'라는 시간은 항상 '당장'이나 '며칠 이내'가 아니라, 몇 주일, 몇 달, 혹은 몇 십 년까지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속히'라는 것은 "인자가 올 때," 즉 예수님 재림 때까지 걸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약속을 하실 때에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처럼 기도 응답의 시기는 오직 하나님의 시계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조금 기도해보다가 도중에 쉬 '낙망'하는 교인들이 많은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재림할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항상 기도하는 믿음 가진 사람을 얼마나 보겠느냐?"라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자세는 자기가 지금 기도드리고 있는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부단하고도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긴 간청을 못 이겨 들어줄 수밖에 없다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야 얼마나 더 확실히 응답해주시랴.'라는 철저한 신뢰야말로 신자로 하여금 끝까지 낙망치 아니하고 기도드리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입니다.
오직 이 믿음 있는 자만이 '항상 기도'할 수 있으며 '인자가 올 때'까지 계속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꼭 이루어졌으면 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란 그런 식으로 정의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막연히 어떤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나 돌과 나무 앞에서 절하는 모습은 이 세상의 여러 종교들이나 미신에서 가장 흔하고도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기도란 것은 그 정도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기도하는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짐으로써 성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이처럼 인격적으로 통하는 것 없이 그저 자기 소원만 가지고 기도하려는 사람은, 그 기도가 자기 뜻대로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빌어 보았자 별무신통하다고 싶으면 그 다음에는 이단 사이비 교주 앞에도 가보고 부처 앞에도 가보고 무당 앞에도 가보고 끝내는 말 못하는 돌 앞에까지 물을 떠다놓고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드리는 대상과의 내면적 관계라는 것이 선행되지 않고, 일단 자기 기도를 먼저 응답해주면 그 응답해주는 신을 믿겠다는 식인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가 그런 유치한 것, 주객전도 격의 미신이 되어서는 절대로 아니 됩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조건을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신뢰하는 믿음 가운데 그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면서 끝까지 낙심치 않고 항상 기도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하는 것입니다.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를 서두에 분명히 밝히시면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의 기도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 기도의 대표자 역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의 기도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온통 자기 자랑이었습니다.
첫 서두에서 딱 한번 "하나님이여"라고 부른 것 외에는, 전부가 다 자기가 얼마나 완벽하게 신앙생활했는가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보고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함을 자랑했습니다.
원래 율법에 정해진 의무적인 금식은 일 년에 꼭 한번 대속죄일에 하는 것뿐이었지만, 이 바리새인은 일주일에도 월요일과 목요일을 정해놓고 금식일로 지켜왔다고 자랑했습니다.
또 "소득의 십일조" 드림을 자랑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정한 십일조 외에도 자기 개인정원에서 나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까지도 어김없이 계산해서 바친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훨씬 더 많이 초과달성하는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자랑스레 보고한 것이 그의 기도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보고하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특히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지금 같은 성전 안에서 같이 기도드리고 있는 곁의 한 사람을 지목하여 자기와 비교하면서까지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란 것이 전무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만이 그의 청산유수 같은 미사여구의 구구절절에 가득 차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반면에 13절과 14절에 기록하기를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리의 기도에는 조금 전의 바리새인의 경우와 같은 유창한 말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 대신 몸으로 이미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멀리 서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전 앞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조차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드러나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슴을 치며"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란 설명하면 오히려 사족이 될 정도로 명백한 것입니다.
실로 이 세리의 자세는 그냥 보아도 정말 백 마디 말보다도 더 정확하게 자기 속에 있는 바를 솔직히 전달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밖에 다른 기도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는 가장 유창한, 최고로 아름답고도 완벽한 기도였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정말이지 이 한 문장보다 더 멋지고 진실한 기도는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드릴 줄 아는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오직 이런 기도드릴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를 낮춤으로써 높아지는," 즉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써 그 하나님께서 오히려 인정해주시는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확증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유창한 말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에서 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을 잘 못해서 기도 못 하겠다.'는 말은 결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청산유수 같은 언변으로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어디 세상에서 말 좀 잘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어디 세상에서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자기 자랑하는 소리 듣고 싶어서 그러셨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런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정말 듣기 지겹고 가장 역겨워 하실 기도들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반면에 아예 기도드릴 줄 모르는 교인들, 이런 사람들은 목사가 볼 때에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지만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믿는다는 교인들 중에도 '묵묵부답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조금 전 설교시간에는 분명히 '아멘'이라고 했는데 통성기도 시간만 되면 한 마디 소리도 나오지 않는 '급성 벙어리 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통성기도 시간에는 그래도 기도를 하는데, 나머지 엿새 동안에는 하나님께 한 마디도 기도드릴 줄 모르는 '주기적 벙어리 교인'들도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소위 '자녀'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주셔야 하겠습니까?
그저 과묵한 성격 탓이라고 넘겨주셔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점잖은 성격 때문이라고 칭찬해주셔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 앞에서 너무 겸손해서 말 못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주셔야 하겠습니까?
그 어느 것도 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무슨 말씀을 해주시는데 그 자녀라는 자들이 그렇게 아무 반응 없이 앉아 있다면 아버지로서는 어디까지나 기분 나쁜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다 용서해주시겠다고 말씀해주시는데도 그저 유구무언으로 앉아 있는 탕자라면 그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 어떤 감사도, 사랑도, 존경도 없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못난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겸손한 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나머지는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감이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는' 자세야말로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더욱 완벽한 기도의 서론입니다.
'가슴을 치는' 자세야말로 천만 마디의 말보다도 더욱 하나님께 정확하게 상달되는 진짜 기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 자신의 입술을 통하여 이 한 마디를 진심으로 고백할 줄만 알면 이미 최고 수준의 기도를 숙달한 신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창한 말이 아니라 오직 겸손한 자세에서 출발하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이처럼 하나님의 눈에 가장 사랑스럽게 보이는 자녀가 되시고 그 앞에서 참된 의인으로 인정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기도 잘한다'라고 할 때, 대개 '말 잘하는 기도'를 연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짜 잘 드리는 기도는 결코 말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도는 '믿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기도 잘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부터가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재림할 때까지 이렇게 기도드리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걱정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런 주님의 염려 그대로 현대교회들은 이런 '기도의 믿음'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자'는 것이 의례적인 교회의 표어로 전락되면 끝장입니다.
제가 당회에서 장로님들에게 어떤 기도제목을 말씀드리고 매일 기도하자고 부탁드리면, 모든 장로님들은 그 약속한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 기도를 각자가 드려야만 합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리라는 믿음은 오직 우리가 함께 기도드리는 가운데서만 통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안 통하는데, 어떻게 뜻이 통하며, 어떻게 힘이 모아지겠습니까?
서로가 하나님과 먼저 통하지 않고 있으면 어떻게 목사와 장로가, 목사와 집사가, 목사와 교인이 통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어려운 사정이 있는 교인에게 '저도 기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목사의 입에서 무슨 공수표처럼 계속 남발되는 인사말로만 끝나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목사가 삯군이요 외식자가 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기도회에 모일 줄은 모르고 주일예배에만 겨우 참석하는, 일주일에 딱 한 시간만 신자 노릇하는 교인들이 늘어갈 때, 그 교회는 반드시 사양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구미의 교회사를 볼 때 너무나 뚜렷한 사실이며 실로 두려운 경종이 아닙니까?
그처럼 목사부터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아니하고 교인들에게 기도의 확신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기도의 응답을 해주시겠으며 무슨 큰 역사를 이루어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쇠퇴하게 될 때, '말씀에 대한 믿음'과 '기도에 대한 믿음' 중에 어느 쪽이 먼저 약해지기 쉽겠습니까?
그 대답은 분명히 후자입니다.
오늘날 서구의 대형교회들의 예배시간에 설교에는 '아멘'이라고 화답하면서도 공기도 드릴 때에는 기도하던 목사 혼자만 '아멘'하고 끝내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걱정하시던 그대로, 교회가 '말씀에 대한 믿음'은 남아 있는 것 같아도 '기도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기 시작할 때 이미 교회의 쇠퇴는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주일예배 출석교인 수자가 늘어간다 하더라도 기도회에 모이는 수자가 함께 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결코 성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미 퇴보하고 있는 교회가 되고 만다는 이 주님의 엄한 경종에 대하여 모든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자기 '소원'을 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뜻'이 서로 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언어'가 통하는 것 이상으로 그 '인격'이 먼저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줄 모르는 교인이나 기도가 약한 교회는 결국 하나님과 제대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니 퇴보할 수밖에 없고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점 더 보기 힘들어지는 믿음,' 이 '기도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회복하고 지키며 더욱 강력하게 발휘하는 것은 곧 우리 각자의 개인구원 완성과 우리 교회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얼마나 조리 있게 자기 소원을 하나님께 잘 아뢸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그 마음속에 얼마나 확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의 은혜는 얼마나 막히지 않고 남들 듣기에도 좋은 말들을 이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못난 것과 더러운 것을 얼마나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마음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를 가지고 먼저 하나님과 진실하게 통하는 바른 관계를 맺고 기도드림으로써,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도 더 깊게 하나님과 영교하며 우리의 기도드린 것보다 훨씬 더 많고 좋은 것으로 내려주시는 응답의 축복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