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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 (롬 8:31-39)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에 대하여 확신을 갖느냐 못 갖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일생의 색갈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자신의 신앙이나 어떤 것이든지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삶의 걸음걸이가 분명하고 힘이 있게 됩니다만 자신에 대하여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상황이나 외부의 여건에 따라서 흔들거리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가장 잘 나타낸 사람을 신약에서 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울은 확신을 가진 일생을 산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 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소명감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일생을 두고 자기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행해야 할 복음전파에 대한 사명감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이루어 갔던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확신에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확신이 없었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바로 가룟유다일 것입니다. 그는 주께서 직접 자신을 지목하여 부르셨음에도 확신이 없었고 자신이 뭘 해야 하는 사람인지도 확신하지 못하여 흔들리다가 결국은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확신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갖춰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신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의 질이 달라지고 그에 따른 삶의 질도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갖는 믿음의 핵심교리를 가장 잘 제시하고 있는 책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반지로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반지의 보석에 해당하고 그 중의 로마서 8장은 보석의 중심부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만큼 로마서는 중요하고 또 그 중에서도 8장은 핵심 중의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31절 부터 마지막 39절까지는 앞에서 증거한 모든 내용, 즉 복음의 대단원을 내리려는 핵심부분입니다. 즉 복음을 확실하게 제시한 후에 도장을 꽉 찍고 확신을 갖도록 하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는 말씀이며 모든 사람을 무장하게 하는 그런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에서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그런 확신을 가지는 놀라운 은혜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1. 오늘의 본문은 2가지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우선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라는 질문과 이어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두 질문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즉 우리는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즉 지금까지 앞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너무나 명백한 것인데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주장한 말씀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내용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즉,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연약하여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범죄하고 때로는 흐트러지는데도 그걸 아시고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것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쓰러질 때에 붙잡아 주시고 부족하여 주님과 저 멀리 떨어져 갈 때도 우리 곁에서 우리를 세워주셔서 우리가 저 세상으로 가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시고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에게는 모든 것들이, 즉 좋은 일이든지 안 좋은 일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다, 모두가 서로 다 합력하여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조화를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놀라운 조화입니다. 우리가 형편없이 낙심이 되는 일을 당해도 나중에는 그것이 도리어 우리에게 좋은 일로 나타나구요 지금은 기가 막히는 그런 일 때문에 낙심천만이 되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재료로 하여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결과는 좋은 것으로 만드시는 분, 즉 해피앤딩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입니까?
욥이 온갖 어려움에서도 이기고 극복했던 것은 끝내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승리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엄청난 상황에서도 그는 욥기 1:21-22절에서는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엄청난 어려움에서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아니하고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그 욥에게 ‘우리 한번 말해 보자’고 요청하였으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번 말하였사온 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욥 40:4-5). 하나님은 그 욥의 믿음을 보시고 욥의 중심 마음을 보시고 욥을 사랑하시고 끝내는 더 엄청난 복으로 그를 축복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30절에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즉 우리를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또 의롭다고 하시고 또 영화롭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과 섭리 속에 있는 운명적인 사람들입니다. 즉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셔서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할 말이 없고 무슨 다른 변명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할렐루야’ 라고 응답할 뿐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또 한 가지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의 능력에 도전할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감히 도전하고 누가 감히 우리 앞을 가로 막고 해롭게 하며 누가 감히 방해하고 누가 감히 우리를 해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아무도 그럴 수 없는 법입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보통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생각하면 정말 우리는 그냥 지나치고 그냥 그런 인물이야 그런 정도가 아爛求? 정말 대단하고 정말 귀한 존재들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위하심, 돌보심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이 우리를 휘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들의 신앙의 밑바닥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의 열조들에게 계속하여 이렇게 내려 왔습니다. 창 15:1절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삭에게는 창 26:24절에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고 약속하셨고 또한 야곱에게도 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출3:12절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약속하셨으며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사41:10절에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 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그들을 해할 수도 없었고 대적할 수도 없었기에 그들이야 말로 가장 많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감히 송사하리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귀가 가까이 와서 우리를 해치려고 하면 대적하면 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인물이며 얼마나 대단하며 얼마나 신나는 삶이 보장된 인물입니까?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는 확고한 보장은 오늘의 본문 안에 또 있습니다. 본문 8:32-33을 읽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다면 그보다 못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는 반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나님께 요구하십니까?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은 우리인데 그 나머지 우리가 요구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은 아깝게 생각하시지 아니하시고 다 주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이러한 확고한 보장이 약속되어 있는 우리입니다.
2. 33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되 간구하시고 계십니다. 히 7:25절은 “그러므로 자기를 힘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송사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송사할 수 없고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재판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가 변론을 맡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재판의 결과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유명한 변호사가 필요하고 그래서 전직 유명한 관리를 고액의 보수를 주고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변호해 주시면 거의 다 들어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강력하게 옹호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 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며 변론했는데 창세기 18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대화를 해 주셨고 무려 6번이나 조건을 바꾸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변론은 어떤 마귀도 이기지 못하며 아무도 우리를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감히 우리를 송사하리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분의 변론을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참소하려 하지만 더 이상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없으며 더 이상 우리를 참소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심히 부족하지만 그래서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죄를 가까이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예수 그리스도가 적극적으로 우리를 변론하시며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우리 스스로를 스스로 비하하거나 우리 스스로를 자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학하거나 비하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도우시는 예수님을 비하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이신 그 주님, 이 땅의 모든 무릎이 주라고 고백하며 높이는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 그분이 바로 나의 편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나는 이토록 하나님의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할렐루야!
3. 다같이 35절에서 37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심지어는 우리를 죽이려는 칼도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확신입니까? 우리는 이 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믿음에 선 자들입니다.
이 확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부족하고 모자라고 연약하여 불완전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완전하여서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완전하신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겐 이러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요?”라는 반문입니다. 못 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구요.
요 10:28-29절을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한쪽에선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고 다른 한 쪽에선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우리를 해할 자가 없으며 송사하지 못하고 대적하지 못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공개적인 선언입니다. 그럴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라도 있으면 나와 보라는 공개적인 단언입니다. 37절의 말씀을 보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러한 존재입니다. 사망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즉 죽는다 해도 우리를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내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못하고 현재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못하고 장래에 일어나는 그 어떠한 일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며 다른 아무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36절의 말씀처럼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습니까? 그러나 기록된 바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는 확신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총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 앞에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서시길 원하십니까?
최후의 승리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어떤 우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그런 우리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입니다. 우리가 이기되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무슨 힘으로 이것이 가능합니까? 사도는 말합 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의 승리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이기되 넉넉히 이깁니다. 적의 공격이 아무리 많고 능해도 우리가 이겨서 우리가 정복자가 되고 우리가 승리자가 될 수 있으며 우리가 개선장군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가진 믿음에 서 있어야 합니다.
출처: 최제봉 목사 설교 중에서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에 대하여 확신을 갖느냐 못 갖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일생의 색갈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자신의 신앙이나 어떤 것이든지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삶의 걸음걸이가 분명하고 힘이 있게 됩니다만 자신에 대하여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상황이나 외부의 여건에 따라서 흔들거리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가장 잘 나타낸 사람을 신약에서 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 바울은 확신을 가진 일생을 산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어려움이 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소명감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일생을 두고 자기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행해야 할 복음전파에 대한 사명감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이루어 갔던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확신에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확신이 없었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바로 가룟유다일 것입니다. 그는 주께서 직접 자신을 지목하여 부르셨음에도 확신이 없었고 자신이 뭘 해야 하는 사람인지도 확신하지 못하여 흔들리다가 결국은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확신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갖춰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신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의 질이 달라지고 그에 따른 삶의 질도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갖는 믿음의 핵심교리를 가장 잘 제시하고 있는 책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반지로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반지의 보석에 해당하고 그 중의 로마서 8장은 보석의 중심부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만큼 로마서는 중요하고 또 그 중에서도 8장은 핵심 중의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31절 부터 마지막 39절까지는 앞에서 증거한 모든 내용, 즉 복음의 대단원을 내리려는 핵심부분입니다. 즉 복음을 확실하게 제시한 후에 도장을 꽉 찍고 확신을 갖도록 하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는 말씀이며 모든 사람을 무장하게 하는 그런 말씀이 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에서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그런 확신을 가지는 놀라운 은혜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
1. 오늘의 본문은 2가지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우선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라는 질문과 이어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두 질문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즉 우리는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즉 지금까지 앞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너무나 명백한 것인데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주장한 말씀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내용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즉,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연약하여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범죄하고 때로는 흐트러지는데도 그걸 아시고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것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쓰러질 때에 붙잡아 주시고 부족하여 주님과 저 멀리 떨어져 갈 때도 우리 곁에서 우리를 세워주셔서 우리가 저 세상으로 가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시고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에게는 모든 것들이, 즉 좋은 일이든지 안 좋은 일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다, 모두가 서로 다 합력하여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조화를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놀라운 조화입니다. 우리가 형편없이 낙심이 되는 일을 당해도 나중에는 그것이 도리어 우리에게 좋은 일로 나타나구요 지금은 기가 막히는 그런 일 때문에 낙심천만이 되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재료로 하여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결과는 좋은 것으로 만드시는 분, 즉 해피앤딩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입니까?
욥이 온갖 어려움에서도 이기고 극복했던 것은 끝내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승리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엄청난 상황에서도 그는 욥기 1:21-22절에서는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엄청난 어려움에서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아니하고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그 욥에게 ‘우리 한번 말해 보자’고 요청하였으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번 말하였사온 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욥 40:4-5). 하나님은 그 욥의 믿음을 보시고 욥의 중심 마음을 보시고 욥을 사랑하시고 끝내는 더 엄청난 복으로 그를 축복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30절에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즉 우리를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또 의롭다고 하시고 또 영화롭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과 섭리 속에 있는 운명적인 사람들입니다. 즉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셔서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할 말이 없고 무슨 다른 변명이나 이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할렐루야’ 라고 응답할 뿐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또 한 가지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의 능력에 도전할 자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감히 도전하고 누가 감히 우리 앞을 가로 막고 해롭게 하며 누가 감히 방해하고 누가 감히 우리를 해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아무도 그럴 수 없는 법입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정말 보통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생각하면 정말 우리는 그냥 지나치고 그냥 그런 인물이야 그런 정도가 아爛求? 정말 대단하고 정말 귀한 존재들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위하심, 돌보심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이 우리를 휘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들의 신앙의 밑바닥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의 열조들에게 계속하여 이렇게 내려 왔습니다. 창 15:1절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삭에게는 창 26:24절에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고 약속하셨고 또한 야곱에게도 28:15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출3:12절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약속하셨으며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사41:10절에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 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누가 감히 그들을 해할 수도 없었고 대적할 수도 없었기에 그들이야 말로 가장 많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감히 송사하리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귀가 가까이 와서 우리를 해치려고 하면 대적하면 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런 인물이며 얼마나 대단하며 얼마나 신나는 삶이 보장된 인물입니까?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는 확고한 보장은 오늘의 본문 안에 또 있습니다. 본문 8:32-33을 읽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다면 그보다 못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는 반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나님께 요구하십니까?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은 우리인데 그 나머지 우리가 요구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은 아깝게 생각하시지 아니하시고 다 주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이러한 확고한 보장이 약속되어 있는 우리입니다.
2. 33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되 간구하시고 계십니다. 히 7:25절은 “그러므로 자기를 힘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송사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송사할 수 없고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재판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가 변론을 맡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재판의 결과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유명한 변호사가 필요하고 그래서 전직 유명한 관리를 고액의 보수를 주고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변호해 주시면 거의 다 들어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강력하게 옹호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려 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며 변론했는데 창세기 18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대화를 해 주셨고 무려 6번이나 조건을 바꾸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변론은 어떤 마귀도 이기지 못하며 아무도 우리를 참소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감히 우리를 송사하리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분의 변론을 보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참소하려 하지만 더 이상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없으며 더 이상 우리를 참소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심히 부족하지만 그래서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죄를 가까이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예수 그리스도가 적극적으로 우리를 변론하시며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우리 스스로를 스스로 비하하거나 우리 스스로를 자학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학하거나 비하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도우시는 예수님을 비하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이신 그 주님, 이 땅의 모든 무릎이 주라고 고백하며 높이는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 그분이 바로 나의 편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나는 이토록 하나님의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할렐루야!
3. 다같이 35절에서 37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심지어는 우리를 죽이려는 칼도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확신입니까? 우리는 이 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믿음에 선 자들입니다.
이 확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부족하고 모자라고 연약하여 불완전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완전하여서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완전하신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겐 이러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요?”라는 반문입니다. 못 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구요.
요 10:28-29절을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한쪽에선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고 다른 한 쪽에선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우리를 해할 자가 없으며 송사하지 못하고 대적하지 못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공개적인 선언입니다. 그럴 수 있는 그 어떤 존재라도 있으면 나와 보라는 공개적인 단언입니다. 37절의 말씀을 보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러한 존재입니다. 사망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즉 죽는다 해도 우리를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내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못하고 현재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못하고 장래에 일어나는 그 어떠한 일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며 다른 아무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36절의 말씀처럼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습니까? 그러나 기록된 바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는 확신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총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 앞에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서시길 원하십니까?
최후의 승리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어떤 우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그런 우리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입니다. 우리가 이기되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무슨 힘으로 이것이 가능합니까? 사도는 말합 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의 승리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이기되 넉넉히 이깁니다. 적의 공격이 아무리 많고 능해도 우리가 이겨서 우리가 정복자가 되고 우리가 승리자가 될 수 있으며 우리가 개선장군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가진 믿음에 서 있어야 합니다.
출처: 최제봉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