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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기도 (엡 1:15-23)
성경에 나오는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인물을 든다면 우선 꼽히는 사람이 바로 욥일 것입니다. 욥기서 1장을 보면 욥은 괜히 사단의 시험 대상이 되어 자녀들도 다 잃고 재산도 다 잃고 건강도 다 잃게 되고 그야말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고 잿더미 위에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도 그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0-22)고 기록합니다. 이런 욥을 두고 하나님이 사단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고 말씀하실 정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보시고 그야말로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고(마 8:10)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시고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칭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는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주님을 감동케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부모에게 감동을 주고 감격케 하는 자녀들이 있는가 하면 그 부모의 가슴에 한없는 아픔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부모가 감동하는 자녀, 부모가 자랑하는 자녀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부모가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감사의 헌금을 드리게 하는 자녀가 된다면 그건 참으로 복일 것입니다. 2005년도는 하나님을 감동케 하고 부모를 한없이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금년에도 목회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욥을 보시고 감동하셨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들 같으면 아니 평범한 사람 같으면 그 순간의 그 처지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믿음에서 떠나야 정상인데 그러나 욥은 그 자리에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니 단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신앙을 가지고 꿋꿋하게 이기고 극복하는 것을 보시고 감동하신 것입니다. 일반인 같으면 실족하고 넘어져야 당연한데 그런데도 오히려 찬송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신앙인이니까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감동하고 감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기만 하면 그 다음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솔로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네 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하시지 않을까요? 그냥 다 주고 싶잖아요? 우리야 마음은 있어도 없어서 못주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다 주실 수 있는 분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이웃과 주의 종들을 감동시키는 그런 성도들이 다 되시기 축복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어떤 것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의 칭찬의 대상이 되시기 축복합니다.
1. 너희 믿음과 사랑을 듣고(15).
에베소서 1장은 두 부분으로 구분이 됩니다. 지금까지의 부분은 우리의 구원 사역에서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사역, 즉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그 외아들을 보내 주신 것,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역,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눈을 열어 주십사는 바울 사도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도 앞부분은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보면서 무척 감사를 드리는데 감사의 내용이 바로 에베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다는 것과 모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듣고 끊임없이 감사한다는 내용입니다. 바로 된 믿음과 풍성한 사랑을 가진 성도,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귀한 신앙모습입니까?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그런 교회로 평가를 하였습니다. 이런 교회를 생각하니 사도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고 감격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무게를 둔다면 사랑은 인간관계에 더 무게를 두며 비중을 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는 믿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라고 사랑을 표현합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사랑은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표현되는 신앙의 표현을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 두 가지 즉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았고 서로 간의 이웃과의 관계도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주 조화가 잘된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즉, 믿음은 아주 좋은데 사람들과의 관계인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인 사랑은 풍성한데 하나님 앞에선 믿음이 제대로 되지 아니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고 이웃과의 관계도 좋다면 그는 정말 바른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바른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좋다는 말은 사랑이 풍성하다는 말도 되고 사랑이 풍성하다는 말은 곧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도 좋고 사랑도 풍성한 사람이 바른 신앙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고 이웃과도 서로 사랑하는 좋은 관계를 가지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찐한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뜨거운 사랑받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너희 믿음과 사랑을 듣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께로부터 어떤 것을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칭찬하실 수 있는 믿음과 사랑을 가지시는 성도가 되도록 노력하는 금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 만한 믿음을 찾아보지 못하였노라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을 받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 없는 자들아” 또는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책망을 받아선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창을 활짝 열고 신령한 영을 적극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일 때에 창조적이고 풍요로운 인생이 열리고 생산적인 생명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키워나가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2. 마음의 눈을 밝히사(18).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마음의 눈을 밝히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신앙의 단계는 바로 마음의 눈을 밝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겐 3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있고 지식의 눈이 있고 마음의 눈이 있는데 이 마음의 눈을 다른 말로는 영적인 눈이라고도 말합니다. 육신의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이요 지식의 눈은 학문을 하는 눈이요 마음의 눈은 우리의 지능적, 종교적, 도덕적 생활을 영위하는 중심기관으로서의 영적인 눈을 말합니다.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는데도 밝은 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영적 눈이 떠져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영적인 섭리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MBC 프로그램의 느낌표 ‘눈을 떠요’ 라는 프로가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참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두 주전에는 초등학교 5학년인 원종건이 어머니의 육신의 눈을 수술하여 눈을 뜨게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를 보면서 당사자인 종건이 엄마 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육신의 눈을 밝히는데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는데 영이 눈을 밝히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음으로 육의 눈이 밝아졌습니다만 영의 눈이 어두워지는 비극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중생하는 날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그 마음의 눈 즉, 영의 눈이 밝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안 됩니다. 이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눈은 하나님이 밝혀 주셔야 잘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눈이 밝아지기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 눈이 밝아야 영적 세계의 흐름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신앙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영적인 흐름에 둔하면 안 됩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내하길 원하시는데 너무 행동으로 앞서 가면 안 됩니다. 행동하며 전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마냥 기다리고 세월을 보내고 있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바르게 행동하는 그런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보다가 발견되는 진리가 바로 아브라함은 영적인 눈이 밝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그가 조카 롯과 땅을 서로 나눠 차지하기로 하고 롯에게 “우리는 서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그렇게 양보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의 흐름을 알고 있었던 눈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어두웠던 롯은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 롯은 영안이 어두웠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만 얼마 있지 아니하여 그 땅은 하나님의 불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읽지 못하고 단지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대로 평가하고 결정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를 알 수 있고 영계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하고 그저 흐릿한 그런 사람으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롯처럼 단지 며칠 뒤의 일도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대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그저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육신의 눈은 밝은데 마음의 눈은 감고 사는 그런 어두운 사람이 되어선 안됩니다. 이와 반대로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인도와 계획을 보면서 차분히 한 걸음 한걸음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신앙인, 영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마음의 눈을 떠서 보아야 할 3가지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 중의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신 자의 영광스런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길 원합니다. 중생한 자는 눈을 떠서 자신이 바로 어떤 사람으로 그 신분이 변하였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 놀라운 변화를 실감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신앙의 에너지가 넘치고 그 에너지로 어떠한 일도 능히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의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중생의 이 놀라운 신분변화 즉, 천국의 시민이 되었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마음의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만큼 중요하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건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일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 세상에서 다 끝나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까지 영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얼마나 강조하신지 모르며 사도행전의 역사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언제나 제일 먼저 가르치고 행하였습니다. 신앙이 좋다 안 좋다는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까?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신앙에 관계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삶의 우선순위에 두면 좋은 신앙인이나 신앙생활에 관계되는 것은 아무렇게 생각하고 바쁘면 뒤로 미룰 수도 있고 때로는 잠시 접어 둘 수도 있고 그러면 그 신앙은 좋은 신앙이라고 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받은 구원에 대하여 정말 감격하고 내가 받은 그 구원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간직하시고 신앙생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변화산상에서의 변화된 주님을 경험한 예수님의 3제자들이 너무 너무 감격하여 이곳에 초막 셋을 짓자고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직접 그 아름다운 변화된 세계의 멋을 눈을 떠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면 힘이 생기게 됩니다. 보면 신앙의 능력이 생기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그 놀라운 소망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보면 시험을 이길 힘이 생기는 것이며 어떤 문제에서도 능히 극복할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에너지를 가지고 날마다 승리하면서 가슴 펴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영의 눈을 밝히사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밝히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감격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날마다 커다란 은혜로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떠서 보아야 할 두 번째의 것은 우리 앞에 있는 소망을 보는 눈입니다. 중생함을 얻은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자녀에게는 곧 후사가 있나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하늘나라의 기업을 보고 영적 소망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이 눈이 어두우니까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저 여기가 다 인줄 알고 여기에 그저 돈만 있으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땅 사고 집도 두 채, 세 채 갖고 그리고도 또 사고 그럽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인데도 집이 열 몇 채가 된데요. 없는 사람들이 고루고루 가지고 다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하는데 남이야 어떻게 되든 편법하고 부정하면서 집을 사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그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거기에 심고 쌓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광은 하나님 나라에서 수많은 기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그 영광입니다. 우리가 비록 약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에 쌓아 놓고 준비하고 계시는 그런 우리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에 내게 주실 영광스러움을 바라보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쌓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움은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칭찬하시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이해해 주시는 그것이 가장 소중하며 그것만 생각하면 전율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모세는 애굽에서 누릴 수 있었던 그 많은 보화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선택하였는데 그 앞에는 더 나은 본향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수 있었던 힘도, 사도바울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복음전파에 온 몸을 던질 수 있었던 힘도 바로 눈 앞에 있는 지금보다, 현세보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는 안목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순간 내가 하나님 앞에 선다면 어떤 인정을 받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평가를 받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불행하게도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는 악한 종으로 평가받게 될 위험은 없습니까? 우리가 가끔 은행에 가서 자기 통장의 통장정리를 하고 잔고확인을 하듯 우리 신앙의 통장정리를 하고 잔고의 확인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평가받고 인정받게 되시기 축복합니다. 그날에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높이는 그런 영광스러움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영의 눈을 떠서 정신 바로 차리고 아멘하는 신앙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영안을 떠서 바라보기를 원하는 세 번째의 기도는 19절입니다. 함께 19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내가 구원 받은 과거를 분명하게 보고 아는 것도 중요하고 미래에 내게 나타날 영광스러움을 보는 것도 중요하나 현재 경험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실현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현재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보는 눈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도들을 회개하는데 나타나고 성도들을 끝까지 보존하는데 나타나며 성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는데 나타나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존귀케 하는데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러한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능력으로 우리를 붙잡고 계시며 인도하십니다. 그걸 밝히 알 수 있는 자가 하나님께 바르게 반응하며 실수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게 됩니다.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섭리와 역사를 볼 수 있는 자가 하나님께 바르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베드로는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바로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자신을 부르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묻고 예수님인 것을 알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능력으로 나를 붙잡고 계시며 능력으로 나를 인도 하시고 계십니다. 나만 아니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붙잡고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빨리 눈을 떠서 이 사실을 알아야 인생을 허비하지 아니하고 바르게 살 수 있게 될s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으시길 바랍니다. 영안을 떠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응답받으시길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일고 아는 영안을 가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기도가 바로 이러한 기도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받은 사람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최제봉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