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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향한 목마름 (눅 8:43-48)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시작되기 전에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조건들을 완벽히 해결해 주시고 이 땅에 인간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하나의 인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결코 외로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을 홀로 있게 않으시고 하와를 짝지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고독은 하나님께서도 원치 아니하시는 바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인류의 문제임을 알게 해 줍니다. 요즈음의 세상은 겉보기엔 화려하고 왁자지껄한 것 같아도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심한 고독감에 시달리고 있는 자들이 예상외로 많습니다. 군중은 요란한데 개개인은 고독한 삶을 삽니다.
노동계의 설문조사 자료에 의하면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조직내의 경쟁체제 때문에 구성원들 사이에도 동료의식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고립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그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이러한 현대인의 고독은 문명의 발전이 낳은 시대적 부산물이라 할 수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고독 그 자체가 아니라 고독에 대한 인간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에릭 프롬>은 고독을 이기지 못한 인간이 결국은 자아상실의 길을 걷게 되는 비극적 상황을 그린 바가 있고, <마르틴 루터>는 "인간은 혼자 있는 고독한 순간에 악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고 경고를 하였듯이 고독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면, 고독을 잘 승화시켜 극복을 하게 된다면 인생에 있어서 그것은 값진 기회가 될 것입니다. 대개 사람이 떠들고 다니는 동안에는 머리가 비어 있게 되지만 고독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진정으로 자아에 눈을 뜨게 되어 깊은 자기성찰을 통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고 엄청난 열정을 쏟아 자기 성취의 길을 걸어나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나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나 자신의 철저한 고독과 싸워 이긴 자 만이 자기 성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베토벤>은 고독한 산책길에서 무수한 천상의 선율을 떠올렸으며,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게 된 것도 사과나무 아래서 그만의 고독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임을 생각해 본다면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고독을 경험합니다만 고독을 경험하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대인관계 기피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고 귀찮게 느껴져 대인관계를 기피하고 타인의 간섭 없이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생각하고 일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지나치게 강해서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면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교류하고 비교하는 기회가 줄어들게 되므로 사고내용이 자폐적이고 독단적으로 흐르거나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저하될 위험이 있는 고독입니다.
둘째, 대인관계 미숙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 하지만 사람 사귀는 기술이 서툴러 친한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말과 행동이 부적절하거나 공격적이어서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먼저 말을 건내거나 먼저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고독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대인관계 피상형입니다. 겉으로는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으로 절친한 친구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속마음과 감정을 잘 털어놓지 않고 피상적인 내용의 대화를 하며 대인관계에서 깊이보다는 넓이를 추구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 고민과 어려움을 상의할 사람이 없어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넷째, 대인관계 중독형의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의존적이어서 혼자 있으면 불안하고 허전해 하며 늘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 중에는 흔히 "생명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 "항상 나만을 생각해 주는 친구",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 등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 현실 속에서 기대가 빗나갈 때 쉽게 실망하고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생은 던져진 생애를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고독에, 혹은 주어진 운명에 던져진 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황량하기 그지없고 허전하기 짝이 없는 고독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시 인간은 이 고독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가장 행복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 생애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고독을 이길 수 있는 몇 가지 절대조건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소속감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내 친구에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반갑게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짜증스럽게 대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과 잠깐 인사하고 있는 가운데에도 벌써 이 생각이 확 지나갑니다. 요즘 선거 철이 되어서 길거리에 나가면 다가와서 악수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제가 이번 ○○선거에 출마한 아무개입니다."하면서 악수를 하면서도 "이 사람이 나를 정말 반가워할까, 나를 지지해 줄까 아니면 그저 손을 내미니까 하는 악수인가"를 생각합니다. 즉 소속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출마자들이 이것 때문에 피곤한 겁니다. 아무튼 이 소속감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두 번째가 가치감에 대한 자신입니다. "내가 정말 요구되고 있는가, 저 사람에게 내가 필요한가, 내가 쓸만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실망감을 수치로 계산해 본다면 "이 사회에, 이 가정에, 이 사람에게 나는 쓸모 없는 존재다"라고 느낄 때가 가장 큰 아픔일 것입니다. 흔히 연세 드신 분들이 하는 말이"빨리 가야지, 빨리 죽어야지"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가치감에 대한 확인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필요가 없군요"하는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있어야 됩니다"라는 답을 듣고 싶은 심리입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려거든 하루에 열 번씩 이런 말을 해드려야 됩니다. "어머니가 꼭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꼭 필요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안 계시면 집에 들어갈 맛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면 "내가 정말 필요한가"하는 가치감에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은 삽니다.
세 번째가 신뢰감의 확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인입니다.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존재이구나"하는 자기신뢰입니다. 결국은 내가 무능하다고 할 때에 나는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만큼 내 가치는 커지는 것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나는 소모적인 인간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건을 살 때 미국사람들은"이것이 제일 비싼 것입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독일사람들은 "이것이 제일 튼튼합니까?"라고 묻고, 프랑스 사람들은 "이것이 최신형입니까?"라고 묻는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뭐라고 물을 것 같습니까? "이거 진짜입니까?"라고 한답니다. 진짜 가짜가 흔들리면 만사가 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신뢰감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절대조건에 대해 자기 스스로 옳다고 인정할 때에 비로소 나라는 존재는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소외감, 열등의식, 피해의식, 고독의식, 절망의식에 빠집니다.
스위스의 내과 의사요 정신 의학자로서 인격 의학을 제창하였으며 현대 심리학과 기독교를 연결시키는 데 크게 공헌 한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필자로 꼽히는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고독>이라는 책에서 고독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심리적 덫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점점 더 고립되어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고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과연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는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경쟁심, 지나친 독립심, 탐욕, 자기 주장과 질투 등 고독을 초래하는 원인들을 진단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나누는 친교만이 고독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역설합니다.
마치 현대인을 대표하는 것 같은 중요한 인물이 오늘의 본문에 나옵니다. 병든 여인입니다. 당시에 천대받던 여자라는 존재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혈루증을 앓는 여인입니다. 그것도 지긋지긋하게 12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소속감을 잃어 버렸습니다. 즉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가치감에 대한 자신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스스로 쓸모 없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단지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그 가치감을 인정받을 길이 없습니다. 누구하나 달려 와서 "당신이 참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라고 말해 주는 이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무너진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능해도 이렇게 철저히 무능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여인이 겪는 고독은 엄청난 고독입니다. 그 여인이 겪었던 심리적 고독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하루하루 새 날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이 때로는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큰 심리적 고독 속에 무려 12년을 지내 왔고 이 고독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또한 도덕적 고독은 또 어떻습니까? 오늘 이 여인의 질병은 아주 고약한 질병이었습니다. 성경은"혈루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 병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이 스스로가 표시하고 멀리 떨어져야 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히 분리 된 삶을 살아야 했다는 말입니다. 남이 나를 버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내가 나를 버렸습니다. 자신이 완전히 버려졌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 무관심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도덕적 고립입니다. 이게 괴로운 것입니다.
이 모든 고독이 아무리 깊다해도 특별히 견딜 수 없는 고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독입니다. 민 15:37절이나 신22:1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를 부정한 여인이라고 규정했으며 회중 앞에 나가거나 특별히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데에 가지 말아야 되고, 예배를 드리는 데까지도 가지 말아야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만나주지 않아서 괴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누가 나를 찾아와서 만나줄까 걱정입니다. 가까이 오는 사람을 일부러 피해야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이 견딜 수 없는 고독 중의 고독입니다.
불행합니다. 철저히 불행 속에 사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도 행복을 갈망 할 자격은 있습니다. 행복에 목말라 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이 사실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택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행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나옵니다. 예수님만은 내 사정을 아실 것이라고, 내가 말을 안 해도 아실 것이라고, 그에게 지혜가 있고, 그에게 능력이 있고, 그에게 자식이 있고, 그에게 사랑이 있다고 유일하게 믿고, 말없는 신앙고백과 함께 나옵니다. 그러나 비록 예수님 앞에 나왔지마는 그녀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 부끄러운 병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말없는 사랑을 원할 뿐입니다. 어디가 아프냐, 무슨 문제를 가졌느냐고 물을 때에 대답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이런 고독한 마음, 이런 절박한 마음, 그러나 행복을 향한 목마름으로 끝까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생각한 한 가지 방법, 그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나름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밀한 경배입니다. 말없는 예배입니다. 소리 없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독하십니까? 분주함 속에 숨겨져 있는 그 고독의 실체를 아십니까? 그리고 진정 행복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으로 채우며 살아가십니까? 인간은 한평생 불행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한 평생 행복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행복을 한번 경험한 사람은 다시는 불행해 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여인에게는 이제 비방도 상관없습니다. 과거를 캐묻는 어떤 사람의 말도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저 마냥 행복할 뿐입니다. 이 행복이 있을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고,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남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행복에 목말라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진정 그 분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그것으로 행복을 향한 목마름을 해갈하시기 바랍니다.
출처/김철현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