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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서 구하소서(주기도문 강해 10) (시36:5-12 요일2:15-17)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는 생활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외모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사회적 지위는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한 부분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함만을 가지고는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와 지위보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하는 일과 그 속 사람을 알아야 그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피상적인 대화만 나누는 대화는 사실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타인의 일과 생각에 대한 질문이 없다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상대방의 일과 생각을 알기 위해서 계속 질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상대방이 나의 생각과 나의 일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야 나도 남에게 나를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이는 실제로 서로 인격적인 깊은 교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며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그 분은 가난하게 사셨으며 결혼을 하지 않으셨고 방랑하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아름다운 모습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며, 33살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셔서 일생을 마치신 분입니다.
이런 내용에 관심이 더 있다면 예수님의 외모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됩니다. 그분이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그 분의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인지, 그분이 무엇을 고민하고 관심을 가지셨는지를 알아야 예수님의 사역과 속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사셨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구원’이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와 사역의 핵심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모르면 예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악으로부터 구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은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악으로부터 구원한다’고 하는 명제는 ‘악’과 ‘구원’이라고 하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악’은 우리를 얽매는 것이고 ‘구원’은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악이 무엇인가?
그러면 악이 무엇입니까?
악이란 첫째로 우리 속에 있는 저급한 힘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고자 하는 고상한 삶을 방해하고, 육신의 세계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악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려는 것을 방해하는 힘입니다.
둘째, 악은 무가치한 일, 불행한 일을 의미합니다.
셋째, 악은 세상에서의 지친 삶과 괴로움과 고통을 말합니다.
악의 여러 모양
악은 아주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악은 ‘인격’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악마’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마’라고 할 때는 이미 신화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화적 형태로 악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대적으로 말하면 악은 ‘역사적 현실’로 다가 오기도 합니다. 악은 역사 속에서 봉건주의와 전체주의와 국가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와 군사주의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로 나타납니다.
악은 또한 ‘초인간적인 힘’으로도 나타납니다. 악은 자신의 역동성을 갖습니다. 악은 ‘악의 나라’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리고 악은 자신의 모습을 계속 바꿀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나 인격체로서, 때로는 구조나 체계로 나타납니다. 악은 개인의 악이 있고, 집단의 악이 있습니다.
법적인 악이 있고 도덕적인 악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악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식하는 악이 있고, 의식하지 못하는 악이 있습니다.
악의 활동 방법
그러면 이 악들이 어떻게 활동을 할까요?
악은 사람들을 그 안으로 흡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희생자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 희생자를 금방 악의 협력자로 만들고 마지막에는 악의 적극적 행위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은 행위자와 희생자가 죽어서 없어져도 살아 남아서 사회의 기관들과 전통과 이데올로기와 사람들의 습관들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악은 결코 긍정적인 작용이 없습니다. 악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그 내면은 공허합니다. 악은 인간을 굴종시키고, 종으로 삼으며, 속이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을 비인간화 하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과 인간을 반대하고 창조자와 피조물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고 인간과 인간의 욕망을 신으로 만듭니다.
악의 운명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날은 항상 악과 함께 사는 날입니다. 악을 접하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 중에 악인이 있고, 그 관계에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혼자 있다고 해서 악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에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악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악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대표적인 악의 세 가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요한1서 2장 16절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처음 보았을 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여기서 ‘먹음직’ 하다는 말은 ‘육신의 정욕’을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보암직’ 했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았다는 것은 ‘이생의 자랑’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 간을 금식하였을 때, 사탄이 시험했습니다. 먼저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 세상의 모든 영광을 보여 주며 유혹했습니다. 안목의 정욕을 불러 일으켜서 시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탄은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기적을 자랑하라고 유혹합니다. 이것은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서 육신의 정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체적인 욕구와 만족과 쾌락은 언제든지 우리를 악으로 유혹합니다. 모든 사람은 안목의 정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이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누구나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상의 명예를 다 버린 숭고한 헌신의 삶 가운데서도 종교적 명예가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약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탄식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 20, 24).
죄의 법 아래 사로 잡힌 인간. 사람이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체가 되어 사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악은 어떤 모양입니까?
먼저 우리는 너무 공격적입니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전쟁과 비인간적인 역사가 계속되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100년간만 보더라도 전쟁이 없었던 곳이 없었으며, 지구 어느 곳에든지 분쟁이 없었던 때가 한시도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마치 미친듯한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죽어버린 암흑의 세계와 같고 인간이 인간 됨을 상실했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은 오늘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그것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는 사유화의 악이 심각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공적인 일을 생각하지 않고 개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직책을 개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우리는 일을 할 때 주로 개인 중심적으로 일을 합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원리 중심적입니다. 이런 면에서 서양적 사고방식이 복음에 더 가깝습니다. 원리 중심적이고 철학 중심적이고 일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니까 협력도 되고 도리어 업적도 남길 수 있게 되어서 더 많은 유익과 명예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세째로 우리는 지나치게 권력지향적입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힘만 키우려고 애쓰는 모습을 봅니다. 때때로 그 힘이란 능력과 정당한 노력을 통한 인정이 아니라, 단지 거부권을 행사하는 능력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으로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쪽으로만 권력을 사용합니다.
네째로 우리는 지나치게 소유지향적입니다.
사람들이 왜 사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경제적 이익, 자신의 명예부터 생각한다면 이것이 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발견되는 것은 인간적인 술수나 음흉한 계획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오직 한 인간이 보입니다. 예수님께는 부유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했지만 사실 가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지만 그의 나이가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권세도 보이지 아니하지만, 비천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분은 지혜로웠지만 학식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인간 자체만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오로지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거룩한 뜻만 예수님 속에서 보입니다. 구원의 능력만 보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구세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혁명과 힘과 폭력을 선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장님이 아닙니다. 로마의 무시무시한 폭력과 착취를 두 눈으로 그대로 보신 분입니다. 그 분의 수단은 단지 말과 행동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이 사랑만이 보이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가 이런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까?
우리 속의 저급한 세력을 이기는 방법은 싸움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모든 악보다도 훨씬 더 힘이 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세요. 저로 하여금 겉으로만 좋은 길이 아니라, 정말 선한 길을 가게 하소서. 멸망의 길이 아니라 멸망치 않는 길을 가게 하소서. 오류가 아니라 진리의 길을 가게 하소서.’
시편 36편 7절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고 주님의 보호하는 날개 아래로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끗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고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사랑하고 선을 생각하고 선을 행하게 하십니다.
병든 사람은 다시 건강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배고픈 자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친구를 찾아 나섭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죄의 결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감옥에 갇힌 자들은 가족의 품에 안기기를 원합니다. 일자리가 없는 자들은 일자리를 얻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모두 달성이 되어도 인간에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 자체에 대한 욕구입니다. 삶에 대한 욕구 속에는 도움과 위로, 구원과 해방에 대한 욕구입니다. 인간의 이런 욕구들은 사람이 사는 날 동안 결코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구원을 향한 원초적인 욕구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향한 욕구가 없이는 현실적인 삶을 의미 있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여,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땅에서부터 하늘로의 외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규입니다. 이 기도는 의심과 희망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함께 드립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운명 공동체’요 ‘시험의 공동체’요 ‘죄악 공동체’요 ‘기도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을 향해서 구원을 바라는 외침을 지릅니다. 이것은 점잖은 부탁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부르짖음입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는 소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는 악의 상황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주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악 속에 파묻혀서 사는 사람은 스스로 악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밖에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는 악에서 나와야 합니다. 세상의 악과 함께 내가 사로잡혀 있는 악에서 나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는 구조적인 문제와 관계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악의 시작입니다. 악한 구조 속에 있는 우리 개인 자신도 똑 같은 악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흙 구덩이에 빠졌던 사람이 어떻게 진흙이 묻지 않았겠습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들 옆에 있으면서 담배 냄새가 몸에 배지 않을 재주가 없습니다.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악은 환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 희망을 가지고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악이 만연했던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희망합니다. ‘하나님 우리 환경이 꽃밭처럼 향기나는 환경이 되어서 내 몸에도 꽃의 향기가 나게 하시고, 내 주변에 사랑의 환경을 주셔셔 나도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우리들은 결핍 가운데서 기다림이 더 간절해집니다. 우리들이 기다려야 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절실할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가지고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요술지팡이를 가지고 오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마치 감옥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 감옥에서 해방시키시는 열쇠를 가지고 오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 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는 있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옥 같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감옥 같은 이곳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보면 확실해 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 “천국이 가까웠다”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임마누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우리가 악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자를 자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면 갇힌 자는 놓임을 받고, 슬픈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슬픔 대신에 찬송이 그 입에 가득 찰 것입니다(이사야 61:1-3).
하나님 괴로움과 수고와 고난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를 끌어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와 하나님께서 임재 해 달라는 기도는 같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꼭 드려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날 우리에게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악에서 지켜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의 악을 이기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는 생활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외모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사회적 지위는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한 부분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함만을 가지고는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와 지위보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에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하는 일과 그 속 사람을 알아야 그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피상적인 대화만 나누는 대화는 사실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타인의 일과 생각에 대한 질문이 없다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상대방의 일과 생각을 알기 위해서 계속 질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상대방이 나의 생각과 나의 일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야 나도 남에게 나를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이는 실제로 서로 인격적인 깊은 교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며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그 분은 가난하게 사셨으며 결혼을 하지 않으셨고 방랑하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아름다운 모습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며, 33살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셔서 일생을 마치신 분입니다.
이런 내용에 관심이 더 있다면 예수님의 외모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됩니다. 그분이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그 분의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인지, 그분이 무엇을 고민하고 관심을 가지셨는지를 알아야 예수님의 사역과 속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사셨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구원’이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와 사역의 핵심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모르면 예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악으로부터 구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은 ‘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악으로부터 구원한다’고 하는 명제는 ‘악’과 ‘구원’이라고 하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악’은 우리를 얽매는 것이고 ‘구원’은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악이 무엇인가?
그러면 악이 무엇입니까?
악이란 첫째로 우리 속에 있는 저급한 힘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하고자 하는 고상한 삶을 방해하고, 육신의 세계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악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려는 것을 방해하는 힘입니다.
둘째, 악은 무가치한 일, 불행한 일을 의미합니다.
셋째, 악은 세상에서의 지친 삶과 괴로움과 고통을 말합니다.
악의 여러 모양
악은 아주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악은 ‘인격’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악마’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마’라고 할 때는 이미 신화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화적 형태로 악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대적으로 말하면 악은 ‘역사적 현실’로 다가 오기도 합니다. 악은 역사 속에서 봉건주의와 전체주의와 국가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와 군사주의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로 나타납니다.
악은 또한 ‘초인간적인 힘’으로도 나타납니다. 악은 자신의 역동성을 갖습니다. 악은 ‘악의 나라’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리고 악은 자신의 모습을 계속 바꿀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나 인격체로서, 때로는 구조나 체계로 나타납니다. 악은 개인의 악이 있고, 집단의 악이 있습니다.
법적인 악이 있고 도덕적인 악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악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식하는 악이 있고, 의식하지 못하는 악이 있습니다.
악의 활동 방법
그러면 이 악들이 어떻게 활동을 할까요?
악은 사람들을 그 안으로 흡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희생자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 희생자를 금방 악의 협력자로 만들고 마지막에는 악의 적극적 행위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은 행위자와 희생자가 죽어서 없어져도 살아 남아서 사회의 기관들과 전통과 이데올로기와 사람들의 습관들 속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악은 결코 긍정적인 작용이 없습니다. 악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그 내면은 공허합니다. 악은 인간을 굴종시키고, 종으로 삼으며, 속이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을 비인간화 하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과 인간을 반대하고 창조자와 피조물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악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고 인간과 인간의 욕망을 신으로 만듭니다.
악의 운명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날은 항상 악과 함께 사는 날입니다. 악을 접하지 않고 살아가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 중에 악인이 있고, 그 관계에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혼자 있다고 해서 악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에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악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악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대표적인 악의 세 가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요한1서 2장 16절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처음 보았을 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여기서 ‘먹음직’ 하다는 말은 ‘육신의 정욕’을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보암직’ 했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았다는 것은 ‘이생의 자랑’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 간을 금식하였을 때, 사탄이 시험했습니다. 먼저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 세상의 모든 영광을 보여 주며 유혹했습니다. 안목의 정욕을 불러 일으켜서 시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탄은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기적을 자랑하라고 유혹합니다. 이것은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서 육신의 정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체적인 욕구와 만족과 쾌락은 언제든지 우리를 악으로 유혹합니다. 모든 사람은 안목의 정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이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누구나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상의 명예를 다 버린 숭고한 헌신의 삶 가운데서도 종교적 명예가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약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탄식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 20, 24).
죄의 법 아래 사로 잡힌 인간. 사람이 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체가 되어 사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악은 어떤 모양입니까?
먼저 우리는 너무 공격적입니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전쟁과 비인간적인 역사가 계속되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난 100년간만 보더라도 전쟁이 없었던 곳이 없었으며, 지구 어느 곳에든지 분쟁이 없었던 때가 한시도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마치 미친듯한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죽어버린 암흑의 세계와 같고 인간이 인간 됨을 상실했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비극은 오늘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그것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는 사유화의 악이 심각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공적인 일을 생각하지 않고 개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직책을 개인의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우리는 일을 할 때 주로 개인 중심적으로 일을 합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원리 중심적입니다. 이런 면에서 서양적 사고방식이 복음에 더 가깝습니다. 원리 중심적이고 철학 중심적이고 일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니까 협력도 되고 도리어 업적도 남길 수 있게 되어서 더 많은 유익과 명예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세째로 우리는 지나치게 권력지향적입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힘만 키우려고 애쓰는 모습을 봅니다. 때때로 그 힘이란 능력과 정당한 노력을 통한 인정이 아니라, 단지 거부권을 행사하는 능력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으로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쪽으로만 권력을 사용합니다.
네째로 우리는 지나치게 소유지향적입니다.
사람들이 왜 사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경제적 이익, 자신의 명예부터 생각한다면 이것이 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발견되는 것은 인간적인 술수나 음흉한 계획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오직 한 인간이 보입니다. 예수님께는 부유함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했지만 사실 가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33세에 돌아가셨지만 그의 나이가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권세도 보이지 아니하지만, 비천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분은 지혜로웠지만 학식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인간 자체만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오로지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거룩한 뜻만 예수님 속에서 보입니다. 구원의 능력만 보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구세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혁명과 힘과 폭력을 선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장님이 아닙니다. 로마의 무시무시한 폭력과 착취를 두 눈으로 그대로 보신 분입니다. 그 분의 수단은 단지 말과 행동 속에서 나타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이 사랑만이 보이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가 이런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까?
우리 속의 저급한 세력을 이기는 방법은 싸움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모든 악보다도 훨씬 더 힘이 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세요. 저로 하여금 겉으로만 좋은 길이 아니라, 정말 선한 길을 가게 하소서. 멸망의 길이 아니라 멸망치 않는 길을 가게 하소서. 오류가 아니라 진리의 길을 가게 하소서.’
시편 36편 7절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고 주님의 보호하는 날개 아래로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끗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고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사랑하고 선을 생각하고 선을 행하게 하십니다.
병든 사람은 다시 건강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배고픈 자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친구를 찾아 나섭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죄의 결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감옥에 갇힌 자들은 가족의 품에 안기기를 원합니다. 일자리가 없는 자들은 일자리를 얻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모두 달성이 되어도 인간에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 자체에 대한 욕구입니다. 삶에 대한 욕구 속에는 도움과 위로, 구원과 해방에 대한 욕구입니다. 인간의 이런 욕구들은 사람이 사는 날 동안 결코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구원을 향한 원초적인 욕구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향한 욕구가 없이는 현실적인 삶을 의미 있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여,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는 땅에서부터 하늘로의 외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규입니다. 이 기도는 의심과 희망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함께 드립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운명 공동체’요 ‘시험의 공동체’요 ‘죄악 공동체’요 ‘기도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을 향해서 구원을 바라는 외침을 지릅니다. 이것은 점잖은 부탁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부르짖음입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는 소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는 악의 상황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주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악 속에 파묻혀서 사는 사람은 스스로 악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밖에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는 악에서 나와야 합니다. 세상의 악과 함께 내가 사로잡혀 있는 악에서 나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는 구조적인 문제와 관계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악의 시작입니다. 악한 구조 속에 있는 우리 개인 자신도 똑 같은 악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흙 구덩이에 빠졌던 사람이 어떻게 진흙이 묻지 않았겠습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들 옆에 있으면서 담배 냄새가 몸에 배지 않을 재주가 없습니다.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악은 환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 희망을 가지고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악이 만연했던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희망합니다. ‘하나님 우리 환경이 꽃밭처럼 향기나는 환경이 되어서 내 몸에도 꽃의 향기가 나게 하시고, 내 주변에 사랑의 환경을 주셔셔 나도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우리들은 결핍 가운데서 기다림이 더 간절해집니다. 우리들이 기다려야 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절실할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가지고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요술지팡이를 가지고 오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마치 감옥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 감옥에서 해방시키시는 열쇠를 가지고 오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 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는 있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옥 같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감옥 같은 이곳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보면 확실해 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 “천국이 가까웠다”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임마누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우리가 악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자를 자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면 갇힌 자는 놓임을 받고, 슬픈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슬픔 대신에 찬송이 그 입에 가득 찰 것입니다(이사야 61:1-3).
하나님 괴로움과 수고와 고난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를 끌어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와 하나님께서 임재 해 달라는 기도는 같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꼭 드려야 할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날 우리에게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악에서 지켜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의 악을 이기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