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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가지 (요한복음 9:13-41)
일편단심 민들레, 일편단심 예수님
여러분,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나 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기어이 잎과 꽃대를 다시 내밀고 꽃을 피우며 씨를 날려 보내는 꽃이 바로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랍니다. 그런데 왜 민들레에게 일편단심이란 별명이 붙었냐하면, 토종민들레 아가씨는 서양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찾아와 애걸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오직 토종민들레 신랑이 날아오기를 일편단심으로 기다리다 토종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날아오면 받아들이고 끝내 오지 않으면 급기야는 처녀임신을 해버리고 만답니다. 발아가 되지 않는 무정란과 같은 씨를 퍼뜨려 순수하게 동족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굳게 믿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치는 소경 거지의 믿음을 만나보시고, 여러분도 “내가 아는 한가지,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환경을 탓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낮이니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심을 통해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소경 거지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 당신이 그 소경 거지요?
그런데 눈을 뜬 소경 거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를 알아보고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들과 그럴 리가 없다며 극구 그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는 사실은 정말 축하해줄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동정의 감정을 버리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슬픔을 나누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인간의 죄인된 본성입니다. 기쁘고 놀라운 일을 보며 잔치를 벌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뻔히 아는 사람을 놓고 ‘누구냐?’며 모른 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렇게 잘 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인데’ 하는 데서 출발하는 ‘시기심’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정을 베푸는 것은 쉽지만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형제가 잘되면 박수를 쳐주고 더 잘되도록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축하와 진실한 격려와 진실한 위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건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진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축하해주며 함께 기뻐하고 더 놀라운 일을 위해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영암교회가 함께 박수치며 전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요!
이렇게 사람들이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 안떴다, 그다 아니다’ 할 때 그는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다. 나의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그가 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고, 그가 시킨 그대로 했더니 내가 보게 되었다.’(9-11) 참으로 놀랍습니다. 소경 거지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보십시오. 모두다 진실입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진실이 배어 있다. ‘내가 그이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며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듣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경 거지가 눈을 뜬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고, 그의 눈을 뜨게 한 방법이 안식일 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를 믿음으로 영접하며, 자기들의 영의 눈도 떠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텐데... 시기심에 눈이 멀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영광도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교회 안에, 성도 안에 다양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는 것이 커다란 영적 축복입니다. 지금 우리 영암교회에 영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복음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믿음 안에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동참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상 일에 눈이 멀어서도 안되고, 잠에 취해 있어서도 안되고, 깨어서 주님을 기대하며, 말씀으로 이 시대를 분별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를 통해 문자적 율법만을 주입받고 사람들 정죄하는 훈련만 받은 무리들은 참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소경 거지를 정죄하기 위해 거짓 심판자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쟁론
16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들은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온 분인가 아닌가에 대한 쟁론이었다. 한쪽은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은 ‘그가 만약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며 의아해 합니다. ‘안식일 법이냐 표적이냐’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티격태격하다가 소경 거지에게 다시 묻습니다. 17절에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그런데 헛갈리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소경 거지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찔러 버립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는 선지자이니이다’ 당당하게 내가 만난 주님, 내가 믿는 주님을 ‘선지자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하고 분명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와 권위주의로 ‘있는 사실’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소경 거지는 그 있는 사실을 통해 ‘그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소경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선지자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인 것을 인정해야 할 텐데, 그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소경이었던 사실 마저 부인하며 그 부모를 호출하여 심문합니다.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입니까! 자기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 하는 말이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이 소경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대답을 보십시오. 20-21절.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부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무슨 태도입니까? ‘오리발’을 쑥 내미는 것입니다. ‘내 자식은 맞는데 우린 모르겠다!’ 그의 부모는 진실을 진실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보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했는지는 모르쇠로 딱 잡아뗍니다. 오히려 ‘그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부모들이 정말 몰랐을까? 설령 부모가 그 현장에 없었다 할지라도 아들이 부모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부모라면 아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지금 모른다고 딱 잡아떼고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22절.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부모들은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때문에 출교당할 일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출교란 율법을 범한 자에게 가해지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출교당한 자는 동족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었기에 유대 사회에서 영구히 매장됩니다. 그러니 소경 거지를 둔 것도 억울한 데, 이제까지도 그놈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는데, 이제 그가 보게 되어 근심 걱정 면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순간 얼마나 자식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이 놈이 끝까지 애비 속을 썩이는구나...’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히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았다면, 예수님이 참빛이신 것을 알았다면, 믿음으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그 빛을 쫓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믿음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려하지 않고 환경 탓만 하고 있는 제자들인지, 율법으로 눈이 멀어 이 사람 저 사람 정죄하는 바리새인인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대충 오리발 내밀며 믿음을 저버리는 부모와 같은지, 아니면 당당하게 진리를 붙들고 믿음을 고백하는 소경 거지인지! 이렇게 말씀은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이다!
이렇게 소경 거지의 부모가 두려움에 믿음을 저버리며 책임을 회피하자 바리새인들은 소경 거지에게 더 힘을 주어 말합니다. 24절.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그를 따르면 너도 죄인으로 정죄하여 출교시키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라는 권위주의와 율법이라는 칼을 들이밀며 이제 막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어린양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심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교가 무서워서라도 예수를 부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자가 예수를 부인하며 죄인이라고 정죄한다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신나고 기고만장해 지겠습니까! ‘봐라! 기적을 체험한 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저가 빼앗아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며 가로채고 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 대한 정죄의 칼날을 더 높이 들 심산이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자에게는 빛의 역사를 삼키려는 어두움의 역사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믿음의 삶을 진실되게 시작하려 하면 어두움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마음을 낙심하게 하고, 나는 예수를 믿으면 안된다는 거짓을 심으려고 두려움과 회의와 불신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이럴 때,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려고 할 때 오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아는 것은
25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전에는 내가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본다는 사실이다!” 소경 거지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자기 속에 이루어진 능력의 역사 한 가지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그 한 가지 구원의 사실을 꼭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말씀도 모르고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나는 소경이고 거지로 살았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나를 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가지’ 언제 어떤 상황에 어떤 두려움이 나를 엄습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것이 있습니까?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꼭 이 한 가지를 붙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되신다”는 것을 결코 흔들지 못하는 한 가지가 나에게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붙드십시오. 그것을 붙들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내가 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도망치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은 1997년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아니라 병원 침대에 누이시고, 육신의 질병을 먼저 치료해 주시고, 영혼의 질병인 불신과 회의도 말끔히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쳐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고 고쳐주시고, 목자의 길로 초청해 주신 예수님! 바로 이 사실이 내가 목자의 길을 가야하는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두려움과 불신과 회의가 든다 할지라도 이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 신앙의 원동력은 바로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결국 소경 거지는 출교를 당하고...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한 가지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오히려 소경 거지를 욕하며 꾸짖었습니다. 28절.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그러나 소경 거지는 자기가 아는 것을 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31절.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참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경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고, 창세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감격스러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칭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그리고 소경 거지는 그것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출교당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부모도 그를 버렸습니다. 눈을 뜬 기쁨은 잠시였고, 이제는 또 다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어두움에 갇혔습니다. 이제는 거지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가지’를 고백한 결과 얻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고백하고 암담한 현실을 직면한 이 소경 거지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35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서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아멘. 사람들이 소경 거지를 쫓아냈다는 말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 주시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올바른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이전에 소경 거지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불완전한 고백입니다. 이제는 인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 거지는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37절.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소경 거지는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육신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본 것입니다. 38절.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면 그의 믿음이 여기까지 자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소경 거지가 출교 당했을 때 그를 찾아가 동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실 문제를 안타까워하며 해결해 주시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궁극적인 근원은 바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직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소경 거지를 찾아가셔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소경 거지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빛을 볼 뿐만 아니라 빛을 따르는 자가 된 것입니다.
결 론
교회는 사회 봉사단체가 아닙니다. 자원봉사 기구도 아닙니다. 친목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을 심어 생명을 거두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오셨고,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몰아낼 “내가 아는 한 가지”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그 “한 가지”를 붙들고, 내 신앙을 말씀에 뿌리내리기 위해 현실과 싸우며, 기도의 무릎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복음을 전하여 제자삼고,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 일편단심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출처/김성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일편단심 민들레, 일편단심 예수님
여러분,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나 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기어이 잎과 꽃대를 다시 내밀고 꽃을 피우며 씨를 날려 보내는 꽃이 바로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랍니다. 그런데 왜 민들레에게 일편단심이란 별명이 붙었냐하면, 토종민들레 아가씨는 서양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찾아와 애걸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오직 토종민들레 신랑이 날아오기를 일편단심으로 기다리다 토종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날아오면 받아들이고 끝내 오지 않으면 급기야는 처녀임신을 해버리고 만답니다. 발아가 되지 않는 무정란과 같은 씨를 퍼뜨려 순수하게 동족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굳게 믿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치는 소경 거지의 믿음을 만나보시고, 여러분도 “내가 아는 한가지,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환경을 탓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낮이니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심을 통해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소경 거지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 당신이 그 소경 거지요?
그런데 눈을 뜬 소경 거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를 알아보고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들과 그럴 리가 없다며 극구 그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는 사실은 정말 축하해줄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동정의 감정을 버리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슬픔을 나누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인간의 죄인된 본성입니다. 기쁘고 놀라운 일을 보며 잔치를 벌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뻔히 아는 사람을 놓고 ‘누구냐?’며 모른 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렇게 잘 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인데’ 하는 데서 출발하는 ‘시기심’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정을 베푸는 것은 쉽지만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형제가 잘되면 박수를 쳐주고 더 잘되도록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축하와 진실한 격려와 진실한 위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건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진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축하해주며 함께 기뻐하고 더 놀라운 일을 위해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영암교회가 함께 박수치며 전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요!
이렇게 사람들이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 안떴다, 그다 아니다’ 할 때 그는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다. 나의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그가 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고, 그가 시킨 그대로 했더니 내가 보게 되었다.’(9-11) 참으로 놀랍습니다. 소경 거지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보십시오. 모두다 진실입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진실이 배어 있다. ‘내가 그이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며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듣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경 거지가 눈을 뜬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고, 그의 눈을 뜨게 한 방법이 안식일 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를 믿음으로 영접하며, 자기들의 영의 눈도 떠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텐데... 시기심에 눈이 멀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영광도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교회 안에, 성도 안에 다양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는 것이 커다란 영적 축복입니다. 지금 우리 영암교회에 영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복음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믿음 안에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동참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상 일에 눈이 멀어서도 안되고, 잠에 취해 있어서도 안되고, 깨어서 주님을 기대하며, 말씀으로 이 시대를 분별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를 통해 문자적 율법만을 주입받고 사람들 정죄하는 훈련만 받은 무리들은 참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소경 거지를 정죄하기 위해 거짓 심판자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쟁론
16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들은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온 분인가 아닌가에 대한 쟁론이었다. 한쪽은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은 ‘그가 만약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며 의아해 합니다. ‘안식일 법이냐 표적이냐’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티격태격하다가 소경 거지에게 다시 묻습니다. 17절에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그런데 헛갈리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소경 거지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찔러 버립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는 선지자이니이다’ 당당하게 내가 만난 주님, 내가 믿는 주님을 ‘선지자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하고 분명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와 권위주의로 ‘있는 사실’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소경 거지는 그 있는 사실을 통해 ‘그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소경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선지자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인 것을 인정해야 할 텐데, 그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소경이었던 사실 마저 부인하며 그 부모를 호출하여 심문합니다.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입니까! 자기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 하는 말이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이 소경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대답을 보십시오. 20-21절.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부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무슨 태도입니까? ‘오리발’을 쑥 내미는 것입니다. ‘내 자식은 맞는데 우린 모르겠다!’ 그의 부모는 진실을 진실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보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했는지는 모르쇠로 딱 잡아뗍니다. 오히려 ‘그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부모들이 정말 몰랐을까? 설령 부모가 그 현장에 없었다 할지라도 아들이 부모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부모라면 아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지금 모른다고 딱 잡아떼고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22절.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부모들은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때문에 출교당할 일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출교란 율법을 범한 자에게 가해지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출교당한 자는 동족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었기에 유대 사회에서 영구히 매장됩니다. 그러니 소경 거지를 둔 것도 억울한 데, 이제까지도 그놈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는데, 이제 그가 보게 되어 근심 걱정 면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순간 얼마나 자식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이 놈이 끝까지 애비 속을 썩이는구나...’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히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았다면, 예수님이 참빛이신 것을 알았다면, 믿음으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그 빛을 쫓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믿음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려하지 않고 환경 탓만 하고 있는 제자들인지, 율법으로 눈이 멀어 이 사람 저 사람 정죄하는 바리새인인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대충 오리발 내밀며 믿음을 저버리는 부모와 같은지, 아니면 당당하게 진리를 붙들고 믿음을 고백하는 소경 거지인지! 이렇게 말씀은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이다!
이렇게 소경 거지의 부모가 두려움에 믿음을 저버리며 책임을 회피하자 바리새인들은 소경 거지에게 더 힘을 주어 말합니다. 24절.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그를 따르면 너도 죄인으로 정죄하여 출교시키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라는 권위주의와 율법이라는 칼을 들이밀며 이제 막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어린양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심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교가 무서워서라도 예수를 부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자가 예수를 부인하며 죄인이라고 정죄한다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신나고 기고만장해 지겠습니까! ‘봐라! 기적을 체험한 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저가 빼앗아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며 가로채고 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 대한 정죄의 칼날을 더 높이 들 심산이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자에게는 빛의 역사를 삼키려는 어두움의 역사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믿음의 삶을 진실되게 시작하려 하면 어두움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마음을 낙심하게 하고, 나는 예수를 믿으면 안된다는 거짓을 심으려고 두려움과 회의와 불신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이럴 때,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려고 할 때 오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아는 것은
25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전에는 내가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본다는 사실이다!” 소경 거지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자기 속에 이루어진 능력의 역사 한 가지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그 한 가지 구원의 사실을 꼭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말씀도 모르고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나는 소경이고 거지로 살았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나를 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가지’ 언제 어떤 상황에 어떤 두려움이 나를 엄습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것이 있습니까?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꼭 이 한 가지를 붙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되신다”는 것을 결코 흔들지 못하는 한 가지가 나에게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붙드십시오. 그것을 붙들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내가 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도망치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은 1997년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아니라 병원 침대에 누이시고, 육신의 질병을 먼저 치료해 주시고, 영혼의 질병인 불신과 회의도 말끔히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쳐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고 고쳐주시고, 목자의 길로 초청해 주신 예수님! 바로 이 사실이 내가 목자의 길을 가야하는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두려움과 불신과 회의가 든다 할지라도 이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 신앙의 원동력은 바로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결국 소경 거지는 출교를 당하고...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한 가지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오히려 소경 거지를 욕하며 꾸짖었습니다. 28절.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그러나 소경 거지는 자기가 아는 것을 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31절.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참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경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고, 창세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감격스러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칭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그리고 소경 거지는 그것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출교당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부모도 그를 버렸습니다. 눈을 뜬 기쁨은 잠시였고, 이제는 또 다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어두움에 갇혔습니다. 이제는 거지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가지’를 고백한 결과 얻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고백하고 암담한 현실을 직면한 이 소경 거지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35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서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아멘. 사람들이 소경 거지를 쫓아냈다는 말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 주시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올바른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이전에 소경 거지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불완전한 고백입니다. 이제는 인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 거지는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37절.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소경 거지는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육신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본 것입니다. 38절.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면 그의 믿음이 여기까지 자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소경 거지가 출교 당했을 때 그를 찾아가 동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실 문제를 안타까워하며 해결해 주시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궁극적인 근원은 바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직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소경 거지를 찾아가셔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소경 거지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빛을 볼 뿐만 아니라 빛을 따르는 자가 된 것입니다.
결 론
교회는 사회 봉사단체가 아닙니다. 자원봉사 기구도 아닙니다. 친목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을 심어 생명을 거두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오셨고,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몰아낼 “내가 아는 한 가지”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그 “한 가지”를 붙들고, 내 신앙을 말씀에 뿌리내리기 위해 현실과 싸우며, 기도의 무릎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복음을 전하여 제자삼고,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 일편단심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출처/김성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