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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4~8)
유대인의 교훈집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죽음의 천사에게 위기가 한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요슈아 벤 레비라는 랍비가 죽게 되어 죽음의 천사가 그에게 왔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본 요슈아 벤 레비 랍비는 “내가 갈 천국을 보여 주십시오. 그래야 이 세상을 쉽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간청했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에게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천국을 향해 같이 갔습니다. 가는 길에 랍비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들고 있는 칼이 너무 무섭습니다. 나를 위협하는 것같이 느껴지는데, 내가 들고 가면 안되겠습니까?” 천사는 랍비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그 칼을 랍비에게 주었습니다. 칼을 들고 천국에 가까이 다다른 랍비는 생각이 바뀌어 죽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그 랍비는 칼을 움켜쥐고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외쳤습니다. 난감해진 죽음의 천사는 하나님께 가서 칼을 빼앗긴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랍비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으니 지상으로 돌려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요슈아 벤 레비 랍비에게 이제 지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줄테니 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슈아 벤 레비 랍비는 “이 칼이 없으면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죽지 않고 천사같이 될 수 있을테니, 내가 이 칼을 가지고 가서 이 땅에서 영원히 죽음을 없애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요슈아 랍비야. 칼을 돌려 주어라.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죄의 결과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죽음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죽음은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순서도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은 순서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우리를 항상 따라 다닙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른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그런데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 후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세상 사람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무서운 심판이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 성경에서는 지옥을 가리켜 견딜수 없는 고통이 연속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49) 이렇게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에 죽음은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도, 심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부활할 것이며, 심판주로 오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당당하게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절 둘째 주일을 맞아, 진정한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기를 바랍니다.
1. 예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습니다. 본래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 때문에 인간은 죽음의 운명이 되었는데,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하게 사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추수할 때 제일 먼저 거두어들인 첫 곡식단이 그 다음에 계속될 본격적 추수의 대표격이요, 모든 추수의 감사를 대신하는 표증인 것처럼(레 23: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요 확실한 표증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구원받는 자들의 신기원을 수립하신 분으로서 당신 스스로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구주로 믿는 자들을 친히 구원하셨고, 미래에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신 백성들의 부활의 모범이요, 변경될 수 없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의 재림시에 있을 우리의 부활에 순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 15:23). 그 순서는, 그리스도가 첫 번째 부활이요, 그분에 의하여 구속받은 사람들은 그 분이 다시 오실 때에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현재의 만물은 다 그 수명을 다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다음으로 부활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7-19). 실로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을 것입니다.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이 땅의 사람들은 최고의 소망을 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최상의 소망을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부활(復活) 때에 무덤에서 일어난 것을 더 분명하게 확신”하여야 합니다.
2. 부활을 체험한 우리는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다음 사람들과 성도들은 유대인들과 헤롯의 핍박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러한 핍박의 과정에서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첫 순교의 피를 흘렸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도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후 사도 요한은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을 전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로마의 핍박은 더욱 가혹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Domitianus 81-96)의 통치 말엽에, 로마는 황제 숭배정책을 강화하였고, 이를 따르지 않는 기독교에 대한 상상할 수 없는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 박해는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 전체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당시 황제 숭배는 다신 사회였던 로마의 다른 종교와는 마찰이 없었으나, 유일신을 섬기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섬기는 기독교인들은 눈에 가시와 같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사도 요한도 로마 당국에 붙잡혀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각지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5)
여기서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하던 로마의 황제보다 더 크고 높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아무런 근심. 걱정 하지 말고 평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폭풍 속에서나 바위 틈에 있는 독수리 새끼가 어미 독수리 옆에서 의연하게 서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밀레(Millet, Jean Francois 1817-1875)의 '만종'(晩鍾)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 원작이 우리 나라에 전시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운반하는데 007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라고 합니다. 1859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친 농부가 저녁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기도하는 전원적인 풍경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고전적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얽힌 사연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언젠가 MBC 라디오 아침프로그램에 소개된 이 그림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오히려 슬픈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농부 부부가 바구니를 밭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바구니가 감자씨와 밭일도구를 담은 바구니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바구니에는 씨감자가 들어있던 게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가 들어있었습니다. 농부 부부는 배고픔을 참고 겨울을 지나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아기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게 된 밀레의 친구는 큰 충격과 우려를 보이며 아기를 넣지 말자고 부탁을 했고,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넣어 그려 출품하게 됐습니다. 이들은 육체는 썩지만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나타나신 것처럼 이 아기도 주께서 부활에 동참케 해주실 것을 믿으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는 말씀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의 소망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 온다고 해도 전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어떤 경우에도 담대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부활을 체험한 우리는 제사장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들만 감당할 수 있었던 귀한 직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들 또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 1:6).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오직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인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했습니다. 그 제사는 인간의 죄와 허물을 속죄하기 위한 것으로, 제사장은 죄에 빠진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해야 할 사명을 받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일로 다가온 총동원 주일에 우리가 한 생명을 초대하는 것 또한 제사장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받을 수 있도록 중재역할을 감당했던 제사장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죄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총동원 전도를 하는 이유입니다.
제사의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제사’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속죄하기 위해 양이나 비둘기를 희생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 인류의 속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데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No cross, No crown”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면류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총동원 주일에 한 사람을 초대하는 것도, 그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도 ‘나’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선교사가 되어서 직접적으로 세계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얼마전 저와 가까운 박찬섭 목사님이라는 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분은 지금 케냐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저보다 나이가 많지만 훨씬 건강하게 활동하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연락이 오기를 간에 암이 생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걸고 나서는 이들도 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번 총동원주일이 그 기회입니다. 이미 교회에서는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초청만 하면 됩니다. 이 일에 강남교회 성도 모두가 힘써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정의 소망, 우리 나라도 소망은 경제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교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방력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 희망을 굳게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유대인의 교훈집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죽음의 천사에게 위기가 한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요슈아 벤 레비라는 랍비가 죽게 되어 죽음의 천사가 그에게 왔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본 요슈아 벤 레비 랍비는 “내가 갈 천국을 보여 주십시오. 그래야 이 세상을 쉽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간청했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에게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천국을 향해 같이 갔습니다. 가는 길에 랍비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들고 있는 칼이 너무 무섭습니다. 나를 위협하는 것같이 느껴지는데, 내가 들고 가면 안되겠습니까?” 천사는 랍비를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그 칼을 랍비에게 주었습니다. 칼을 들고 천국에 가까이 다다른 랍비는 생각이 바뀌어 죽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그 랍비는 칼을 움켜쥐고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외쳤습니다. 난감해진 죽음의 천사는 하나님께 가서 칼을 빼앗긴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랍비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으니 지상으로 돌려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요슈아 벤 레비 랍비에게 이제 지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줄테니 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슈아 벤 레비 랍비는 “이 칼이 없으면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죽지 않고 천사같이 될 수 있을테니, 내가 이 칼을 가지고 가서 이 땅에서 영원히 죽음을 없애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요슈아 랍비야. 칼을 돌려 주어라.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죄의 결과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죽음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죽음은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순서도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은 순서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우리를 항상 따라 다닙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른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그런데 죽음이 두려운 것은 그 후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세상 사람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무서운 심판이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 성경에서는 지옥을 가리켜 견딜수 없는 고통이 연속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49) 이렇게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에 죽음은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도, 심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부활할 것이며, 심판주로 오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당당하게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절 둘째 주일을 맞아, 진정한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기를 바랍니다.
1. 예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습니다. 본래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 때문에 인간은 죽음의 운명이 되었는데,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하게 사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추수할 때 제일 먼저 거두어들인 첫 곡식단이 그 다음에 계속될 본격적 추수의 대표격이요, 모든 추수의 감사를 대신하는 표증인 것처럼(레 23: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요 확실한 표증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구원받는 자들의 신기원을 수립하신 분으로서 당신 스스로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구주로 믿는 자들을 친히 구원하셨고, 미래에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당신 백성들의 부활의 모범이요, 변경될 수 없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의 재림시에 있을 우리의 부활에 순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 15:23). 그 순서는, 그리스도가 첫 번째 부활이요, 그분에 의하여 구속받은 사람들은 그 분이 다시 오실 때에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현재의 만물은 다 그 수명을 다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다음으로 부활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7-19). 실로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을 것입니다.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호흡'이라는 희곡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한 연극은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막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이 땅의 사람들은 최고의 소망을 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최상의 소망을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부활(復活) 때에 무덤에서 일어난 것을 더 분명하게 확신”하여야 합니다.
2. 부활을 체험한 우리는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다음 사람들과 성도들은 유대인들과 헤롯의 핍박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러한 핍박의 과정에서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첫 순교의 피를 흘렸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도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후 사도 요한은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을 전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로마의 핍박은 더욱 가혹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Domitianus 81-96)의 통치 말엽에, 로마는 황제 숭배정책을 강화하였고, 이를 따르지 않는 기독교에 대한 상상할 수 없는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 박해는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 전체로 확대되었습니다. 그 당시 황제 숭배는 다신 사회였던 로마의 다른 종교와는 마찰이 없었으나, 유일신을 섬기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섬기는 기독교인들은 눈에 가시와 같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사도 요한도 로마 당국에 붙잡혀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각지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5)
여기서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하던 로마의 황제보다 더 크고 높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아무런 근심. 걱정 하지 말고 평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폭풍 속에서나 바위 틈에 있는 독수리 새끼가 어미 독수리 옆에서 의연하게 서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밀레(Millet, Jean Francois 1817-1875)의 '만종'(晩鍾)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 원작이 우리 나라에 전시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운반하는데 007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라고 합니다. 1859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친 농부가 저녁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기도하는 전원적인 풍경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고전적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얽힌 사연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언젠가 MBC 라디오 아침프로그램에 소개된 이 그림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오히려 슬픈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농부 부부가 바구니를 밭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바구니가 감자씨와 밭일도구를 담은 바구니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바구니에는 씨감자가 들어있던 게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가 들어있었습니다. 농부 부부는 배고픔을 참고 겨울을 지나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아기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게 된 밀레의 친구는 큰 충격과 우려를 보이며 아기를 넣지 말자고 부탁을 했고,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넣어 그려 출품하게 됐습니다. 이들은 육체는 썩지만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나타나신 것처럼 이 아기도 주께서 부활에 동참케 해주실 것을 믿으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는 말씀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의 소망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 온다고 해도 전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어떤 경우에도 담대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3. 부활을 체험한 우리는 제사장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들만 감당할 수 있었던 귀한 직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들 또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 1:6).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오직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인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했습니다. 그 제사는 인간의 죄와 허물을 속죄하기 위한 것으로, 제사장은 죄에 빠진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해야 할 사명을 받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일로 다가온 총동원 주일에 우리가 한 생명을 초대하는 것 또한 제사장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받을 수 있도록 중재역할을 감당했던 제사장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죄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총동원 전도를 하는 이유입니다.
제사의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제사’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속죄하기 위해 양이나 비둘기를 희생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 인류의 속죄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는 데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No cross, No crown”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면류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총동원 주일에 한 사람을 초대하는 것도, 그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도 ‘나’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선교사가 되어서 직접적으로 세계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얼마전 저와 가까운 박찬섭 목사님이라는 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분은 지금 케냐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저보다 나이가 많지만 훨씬 건강하게 활동하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연락이 오기를 간에 암이 생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걸고 나서는 이들도 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번 총동원주일이 그 기회입니다. 이미 교회에서는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초청만 하면 됩니다. 이 일에 강남교회 성도 모두가 힘써 참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정의 소망, 우리 나라도 소망은 경제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교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방력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 희망을 굳게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