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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의 의의 (고린도전서 15장 12 ~ 19절)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은 정평이 나있습니다. 남다른 교육열, 독특한 교육방법, 그리고 탁월한 교육효과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교육방법 가운데 ‘역사적 기억’(Historical Memory)란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13살이 되면 ‘바 미쯔바’(Bar Mizwah)라는 성인식을 치릅니다. 이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3500년 전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구원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 아들이 무릎을 꿇고 대답합니다. “예, 아버지! 3500년 전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구원 이야기를 오늘 제게 들려주십시오.” 아버지도 함께 무릎을 꿇고 3500년 전 출애굽의 구원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이 때 아이는 눈을 감고 그 이야기를 암기하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버지! 3500년 전 출애굽 사건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태동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출애굽 사건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자랑스러운 이스라엘의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단순히 3500년 전 일어났던 저 출애굽 사건을 있는 사실 그대로 암기하는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 출애굽이라는 존재론적 사건과 오늘의 자신의 삶을 연결시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 자신의 존재를 재해석합니다. 자신이 존재하게 된 근거와 존재하는 목적을 발견합니다. 이것을 역사적 기억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저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예수의 부활이라는 존재론적 사건이 오늘 내 삶과 구체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 내 존재가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사건 안에서 내가 존재하게 된 근거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역사적 기억은 우리가 이미 사용하는 의의(意義)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의의라는 말이 “어떤 말이나 일, 행위 따위가 현실에 구체적으로 연관되면서 가지는 가치 내용”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적 기억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예수 부활의 의의는 무엇일까요?
1. 신앙 고백적 의의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도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을 찾으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그 사실을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 때 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 번에는 일부러 도마에게 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때 도마가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도마와 같은 사람들이 이 땅에 너무도 많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사건들을 믿지 못합니다. 현대판 도마라 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운동이 인류 사상사의 한 분수령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르네상스 운동은 인간을 종교로부터 자유를 얻게 한 기념비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핵심은 인간다움으로 돌아가라고 선언하면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이성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인류의 사상사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소위 “경험론”을 주창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경험한 것을 이성으로 이해한 지식을 강조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라는 사람은 소위 “이성철학”을 주창했습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칸트나 헤겔 같은 사람들이 소위 “관념론”이라는 것을 주창했습니다. 이들은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를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류의 사상사의 흐름은 한 마디로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인간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지식이라 하여 가치를 부여합니다.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이것을 이성적 지식주의라 부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이성적 지식주의에 사로잡혀서 믿지 못합니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이성적 지식주의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폭이 더 좁아지게 됩니다. 소위 과학기술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과학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만 연구합니다. 이 가시적 세계를 연구해서 의미 있는 정보를 찾아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해 가는 과학기술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학기술 시대에는 “믿는다.”는 말은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든 말이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관찰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그래서 “안다”는 말이 힘을 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과학기술주의에 사로잡혀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지 못하고 의심하던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굳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도 무덤에 장사된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경험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그분을 영적으로 만나게 되면 우리도 도마처럼 믿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복 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부활절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의 의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그리고 다르면서도 같은 두 개의 공동체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12 제자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외양으로는 같은 사람들의 모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모입니다. 양적으로는 같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모임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12 제자 모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모임은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공동체였습니다. 자기들이 모이고 싶어서 모인 모임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특별한 사람들만이 모인 모입니다. 저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직업도, 가정도, 개인적인 야망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아주 특별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남들이 체험할 수 없는 표적들도 직접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누릴 수 없는 남다른 주님의 사랑을 뜨겁게 맛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특별한 공동체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공동체는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한 순간에 깨지고 부서지고 흩어져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불러내서 세우신 공동체였습니다. 3년 간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세우신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무참히도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놀랍게도 깨지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것도 120명이나 되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떡을 떼고 더 끈끈한 결속력을 보이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앞의 12명의 제자 공동체에는 늘 예수님께서 친히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공동체에는 예수님께서 몸으로 친히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12 제자 공동체보다 더욱 능력있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이렇게 변하게 만든 것일까요? 딱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저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무덤을 가르고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셨던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저들의 공동체에 임해서 저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지키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우리가 덧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입니다.
일본의 존경받는 기독교 지도자 중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21살 때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한 저주의 형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놀라운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요 부활의 능력을 일으키는 새출발의 징표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다음날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가난한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빈민굴에서 각혈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놀랍게도 그는 72세까지 살면서 많은 사랑의 헌신을 했고 큰 영향력을 미치는 책들을 썼습니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새로운 삶을 향해 일어선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바로 저 유명한 “사선을 넘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현실의 저 죽음의 그림자를 넘어설 수 있게 해 줍니다. 허무와 절망으로 가득 찬 우리 인생에 새로운 비전을 줍니다. 여기에 또 다른 부활절의 의의가 있습니다.
3. 종말론적 의의
성경 고전 15장을 보면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특히 20-22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네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과일나무를 심으면 첫 해 수확을 거둡니다. 그것이 첫 열매입니다. 과일나무는 한 해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 심지 않습니다. 다음해 또 열리고, 그 다음해 또 열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라는 것은 예수님 뒤를 이어 우리 믿는 성도들이 장차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내가 죽으면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장례가 여럿 있었습니다. 가장 가슴에 남는 장례가 고이정국 집사님 장례입니다. 이 분은 건강하던 분이십니다. 건강진단 중 갑자기 폐암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종합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해 보니 이미 온 몸에 암이 퍼져 손 쓸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병원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힘겹게 투병하고 계셨습니다. 감사하게도 병상에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힘겨운 시간을 잘 이기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조금 더 사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임종에 관한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나실 수 있으니 우리 함께 기도하자고 힘 내시라고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가족들이 얼마나 놀라셨을까? 특히 백 권사님께서 얼마나 힘이 드실까? 눈물이 다 났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정국 집사님은 다시 부활하실 것이고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정국 집사님의 부활의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 시신을 안치한 관을 쓰다듬으며 저도 모르게 마치 이 집사님이 거기 살아 누어계신 것처럼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우리 다시 만납시다. 먼저 가십시오. 저도 머지않아 뒤 따를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저의 죽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도 정말 조만간에 이렇게 관에 실려 나가겠구나. 정말 나는 다시 살 소망이 있는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는가? 그 때 다시 이 말씀이 가슴 깊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굳건히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 소망으로 오늘의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저 무서운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힘들면 자살을 택합니다. 그리고 원한에 찬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과연 죽음이 인생의 끝일까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죽여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렸고 결국 예수를 저 십자가에 달아 죽에 했습니다. 그래서 끝이 났습니까?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기들이 죽였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우리에게는 놀라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다시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샘물 호스피스의 원주희 목사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분 말씀이 자기네 샘물호스피스 병동에 교회 수련회 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청년들이 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물었습니다. 청년들이 말기 암환자들이 믿음으로 투병하는 것을 보고, 이분들이 장엄하게 임종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 인생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백 수천번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강한 메시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임종하는 분들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은 그 자체가 위대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의 부활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고하게 믿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을 종말론적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게 다시 살게 됩니다. 여기에 부활절의 또 다른 의의가 있습니다.
부활절입니다. 역사적 기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부활의 의의가 깊이 깨달아지기를 바랍니다.
출처/박봉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은 정평이 나있습니다. 남다른 교육열, 독특한 교육방법, 그리고 탁월한 교육효과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교육방법 가운데 ‘역사적 기억’(Historical Memory)란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13살이 되면 ‘바 미쯔바’(Bar Mizwah)라는 성인식을 치릅니다. 이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3500년 전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구원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 아들이 무릎을 꿇고 대답합니다. “예, 아버지! 3500년 전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구원 이야기를 오늘 제게 들려주십시오.” 아버지도 함께 무릎을 꿇고 3500년 전 출애굽의 구원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이 때 아이는 눈을 감고 그 이야기를 암기하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버지! 3500년 전 출애굽 사건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태동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출애굽 사건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자랑스러운 이스라엘의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단순히 3500년 전 일어났던 저 출애굽 사건을 있는 사실 그대로 암기하는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 출애굽이라는 존재론적 사건과 오늘의 자신의 삶을 연결시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 자신의 존재를 재해석합니다. 자신이 존재하게 된 근거와 존재하는 목적을 발견합니다. 이것을 역사적 기억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저 유대 땅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예수의 부활이라는 존재론적 사건이 오늘 내 삶과 구체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 내 존재가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사건 안에서 내가 존재하게 된 근거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즉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역사적 기억은 우리가 이미 사용하는 의의(意義)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의의라는 말이 “어떤 말이나 일, 행위 따위가 현실에 구체적으로 연관되면서 가지는 가치 내용”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부활에 대한 역사적 기억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예수 부활의 의의는 무엇일까요?
1. 신앙 고백적 의의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도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을 찾으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그 사실을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 때 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 번에는 일부러 도마에게 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때 도마가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도마와 같은 사람들이 이 땅에 너무도 많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사건들을 믿지 못합니다. 현대판 도마라 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운동이 인류 사상사의 한 분수령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르네상스 운동은 인간을 종교로부터 자유를 얻게 한 기념비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핵심은 인간다움으로 돌아가라고 선언하면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이성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인류의 사상사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소위 “경험론”을 주창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경험한 것을 이성으로 이해한 지식을 강조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라는 사람은 소위 “이성철학”을 주창했습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칸트나 헤겔 같은 사람들이 소위 “관념론”이라는 것을 주창했습니다. 이들은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를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은 인류의 사상사의 흐름은 한 마디로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인간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지식이라 하여 가치를 부여합니다.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이것을 이성적 지식주의라 부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이성적 지식주의에 사로잡혀서 믿지 못합니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이성적 지식주의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폭이 더 좁아지게 됩니다. 소위 과학기술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과학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만 연구합니다. 이 가시적 세계를 연구해서 의미 있는 정보를 찾아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해 가는 과학기술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학기술 시대에는 “믿는다.”는 말은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든 말이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관찰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그래서 “안다”는 말이 힘을 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과학기술주의에 사로잡혀서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지 못하고 의심하던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굳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도 무덤에 장사된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경험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그분을 영적으로 만나게 되면 우리도 도마처럼 믿음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복 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부활절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의 의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그리고 다르면서도 같은 두 개의 공동체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12 제자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외양으로는 같은 사람들의 모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모입니다. 양적으로는 같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모임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12 제자 모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모임은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공동체였습니다. 자기들이 모이고 싶어서 모인 모임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특별한 사람들만이 모인 모입니다. 저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직업도, 가정도, 개인적인 야망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아주 특별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남들이 체험할 수 없는 표적들도 직접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누릴 수 없는 남다른 주님의 사랑을 뜨겁게 맛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특별한 공동체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공동체는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한 순간에 깨지고 부서지고 흩어져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불러내서 세우신 공동체였습니다. 3년 간 심혈을 기울여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세우신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무참히도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놀랍게도 깨지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것도 120명이나 되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떡을 떼고 더 끈끈한 결속력을 보이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앞의 12명의 제자 공동체에는 늘 예수님께서 친히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공동체에는 예수님께서 몸으로 친히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12 제자 공동체보다 더욱 능력있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이렇게 변하게 만든 것일까요? 딱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저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무덤을 가르고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셨던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저들의 공동체에 임해서 저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지키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우리가 덧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입니다.
일본의 존경받는 기독교 지도자 중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21살 때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한 저주의 형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놀라운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요 부활의 능력을 일으키는 새출발의 징표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다음날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가난한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빈민굴에서 각혈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놀랍게도 그는 72세까지 살면서 많은 사랑의 헌신을 했고 큰 영향력을 미치는 책들을 썼습니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새로운 삶을 향해 일어선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 바로 저 유명한 “사선을 넘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현실의 저 죽음의 그림자를 넘어설 수 있게 해 줍니다. 허무와 절망으로 가득 찬 우리 인생에 새로운 비전을 줍니다. 여기에 또 다른 부활절의 의의가 있습니다.
3. 종말론적 의의
성경 고전 15장을 보면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특히 20-22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네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과일나무를 심으면 첫 해 수확을 거둡니다. 그것이 첫 열매입니다. 과일나무는 한 해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 심지 않습니다. 다음해 또 열리고, 그 다음해 또 열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라는 것은 예수님 뒤를 이어 우리 믿는 성도들이 장차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내가 죽으면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할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장례가 여럿 있었습니다. 가장 가슴에 남는 장례가 고이정국 집사님 장례입니다. 이 분은 건강하던 분이십니다. 건강진단 중 갑자기 폐암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종합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해 보니 이미 온 몸에 암이 퍼져 손 쓸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병원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힘겹게 투병하고 계셨습니다. 감사하게도 병상에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힘겨운 시간을 잘 이기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조금 더 사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임종에 관한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나실 수 있으니 우리 함께 기도하자고 힘 내시라고만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가족들이 얼마나 놀라셨을까? 특히 백 권사님께서 얼마나 힘이 드실까? 눈물이 다 났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정국 집사님은 다시 부활하실 것이고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정국 집사님의 부활의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 시신을 안치한 관을 쓰다듬으며 저도 모르게 마치 이 집사님이 거기 살아 누어계신 것처럼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우리 다시 만납시다. 먼저 가십시오. 저도 머지않아 뒤 따를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저의 죽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도 정말 조만간에 이렇게 관에 실려 나가겠구나. 정말 나는 다시 살 소망이 있는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는가? 그 때 다시 이 말씀이 가슴 깊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굳건히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 소망으로 오늘의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저 무서운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힘들면 자살을 택합니다. 그리고 원한에 찬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과연 죽음이 인생의 끝일까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죽여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렸고 결국 예수를 저 십자가에 달아 죽에 했습니다. 그래서 끝이 났습니까?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기들이 죽였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우리에게는 놀라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다시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샘물 호스피스의 원주희 목사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분 말씀이 자기네 샘물호스피스 병동에 교회 수련회 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청년들이 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물었습니다. 청년들이 말기 암환자들이 믿음으로 투병하는 것을 보고, 이분들이 장엄하게 임종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 인생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백 수천번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강한 메시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임종하는 분들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은 그 자체가 위대한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의 부활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고하게 믿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을 종말론적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새롭게 다시 살게 됩니다. 여기에 부활절의 또 다른 의의가 있습니다.
부활절입니다. 역사적 기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부활의 의의가 깊이 깨달아지기를 바랍니다.
출처/박봉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