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24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디모데후서1:6-8)
여러해 전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78세 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머니의 주된 사망원인은 극심한 영양실조였습니다. 나이가 많다고는 하지만 죽을 당시의 몸무게가 25㎏밖에 안나갔으니까 얼마나 야위었겠습니까? 뼈만 앙상한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살던방은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했습니다. 값진물건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몸에 걸치고 있던 옷도 누더기 옷이었습니다. 그할머니는 음식을 사서 먹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먹다가 내버린 음식찌꺼기를 주워먹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걸해서 얻어먹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할머니가 돈이 없어서 굶어죽은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죽고나서 할머니가 쓰던 침대 밑에서 열쇠 두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열쇠는 시중에 있는 은행의 금고 열쇠였습니다. 사람들이 열쇠를 가지고 은행에 있는 할머니의 금고를 열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금고 안에서 현찰만 60만달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증권과 귀금속도 있었습니다. 이것들을 합치니까 100만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많은 돈을 쌓아놓기만 하고 하나도 쓰지못하고 굶어죽고 만것입니다.
여러분, 이할머니가 백만장자갑부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거렁뱅이처럼 살았으니까 거지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 많은 돈을 쌓아놓고 쓰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입술로 믿는다고 떠들어대도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을 활용하지 않고, 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필요할 때 믿음을 써야 합니다. 믿음을 쓰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소용없는 믿음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눈을 붙이고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갑자기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몹시도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돛을 올려라 내려라, 노를 저어라 말아라,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배가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다급해지니까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어찌하여 우리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예수님이 깨셨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서 명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 말 한 마디에 바람과 물결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나무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도대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위급할 때 믿음을 써야지, 믿음을 어디다 팔아먹었느냐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 항로를 노 저어 가다보면 이런저런 풍랑이 일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타고 가던 배도 풍랑을 만났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도 이런저런 시련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겁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무서워하느냐? 도대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 책망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깨워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풍랑을 다 잠재워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산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17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 고난, 시련이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마귀가 준 생각입니다. 떨쳐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가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의 능력이 되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왜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다 위에 작은 바위섬이 하나 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것없습니다. 돌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돌섬은 아무리 풍랑이 거세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태풍이 휘몰아쳐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수만 톤 급의 배가 다가와도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가 피해서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기에는 보잘것없지만 이 돌섬은 어디에 연결되어 있습니까? 지구라고 하는 엄청난 땅덩어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돌섬이 끄떡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미련합니다.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잇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영국의 유명한 웨슬리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한번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기대 밖이었습니다.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낙심했습니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 배가 대서양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거센 풍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끝장이구나. 이제는 죽었구나." 웨슬리의 마음에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쪽에서 몇 사람이 거센 풍랑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평온한 모습으로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풍랑이 다 멎은 후 웨슬리가 그들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그 거센 풍랑에서도 태연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왜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그러면서 그는 웨슬리에게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을 안 믿는가 봅니다. 형제여,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에게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웨슬리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뉘우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피상적으로 믿고 있었구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가 바로 믿지 못했구나." 웨슬리는 크게 회개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 모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했습니다. 그 뒤로 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는 능력의 사람이 되어서 큰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영국을 완전히 뒤집어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 되십시다. 세상을 이길 능력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써야 합니다. 쓰지 않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시다. 우리를 향하신 사랑은 놀라운 사랑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영원하신 사랑입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고 있는 사랑의 줄은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끊을 수 없는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롬 8:31에서 고백하기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대적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대적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육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마실 것이 필요합니다. 입을 것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필요합니다. 물질도 필요합니다. 직장도 필요합니다. 왜 그 모든 것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공급해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까지라도 아낌없이 내어주셨는데, 그까짓 물질적인 것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지 않겠습니까? 육신적인 생활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세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이런 저런 어려운 시련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이어주고 있는 사랑의 줄은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시련도 끊을 수 없습니다. 감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을 붙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 24:16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말 한 마디를 해도, 행동 하나를 해도 신중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지 말 한 마디라도 절제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능력을 믿고 마음대로 행동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하고 방탕하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큰 홍해 바다가 나타났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니까 애굽 바로의 군사들이 추격해옵니다. 얼마나 큰 시련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모세를 향해서 아우성을 쳤습니다. "애굽에 우리의 매장지가 없어서, 애굽에 우리를 묻을 데가 없어서 여기로 이끌어내어 이곳에서 죽게 만드느냐?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저들의 종이 되는 것이 더 낫겠다." 두려움에 떨면서 아우성쳤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했습니다. 모세는 담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모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절제하는 정신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기되 넉넉히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서재중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