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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교인 (느헤미야 11장 1-36절)
어느 날, 한 성도가 교회에 구두로 포천 땅 13만평을 기도원 부지로 기증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분이 운영하던 백화점이 부도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 대기업에서 골프장을 세운다고 하면서 포천 땅값이 폭등했습니다. 유혹이 생겼습니다. “이 땅을 팔면 돈 걱정 없이 사업할 수 있는데... 이 땅을 팔아 어려움을 해결하고 다시 사 바치면 안 될까? 굳이 이 비싼 땅에 기도원을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분은 곧 결단을 내렸습니다. “망하더라도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으면 약속을 지키자.” 그래도 자꾸 마음이 흔들려 아예 등기를 이전해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 후, 신기하게 부도 위기를 면했고 그 다음 해에는 매출목표를 초과 달성했습니다.
백화점 영업이 잘되자 그분은 사업 확장 계획으로 스포츠 센터를 짓기로 하고 설계도까지 만들었다가 곧 그 사업을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백화점 앞에 누군가 조그만 스포츠 센터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말했습니다. “제가 이 사업을 밀어붙이면 그 스포츠 센터는 그 날로 망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돈을 벌었으면 됐지 그 사람을 망하게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 마음을 가진 ‘마음의 부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얼마 후, 백화점이 잘되니까 매장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2000평 정도 넓히려고 백화점 옆의 땅을 사려고 했는데 그 땅을 사지 않아도 될 일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시에서 도시 발전을 위해 백화점이 있는 지역의 건폐율을 높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화점 층수만 올리면 되기 때문에 앉아서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망해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복된 존재가 되려면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희생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이 일이 내게 이익인가?”를 생각하며 하지만 성도는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먼저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사는 길이 있고,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교인 >
느헤미야 11장은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거주자의 이름이 열거된 장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다 멸망 후에는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포로생활에서 귀환 후에도 예루살렘은 예전처럼 복구되지 못했고,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통해 예루살렘 성벽이 수축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서 살기를 꺼려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당시 지도자들은 예루살렘 인구 유입정책을 씁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살게 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폐허에 살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은 수도의 지위를 회복하고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도 누구보다 축복된 백성들이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교인이 어떤 교인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교인을 축복하실까요?
1. 앞서 희생하는 교인
본문 1절 첫 부분을 보십시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당시 리더들은 먼저 솔선수범을 했습니다. 그처럼 리더가 앞서 헌신하는 교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직분이 높을수록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 중직 자리는 높은 자리가 아니고 헌신하는 자리입니다. 누가 리더입니까? 헌신하는 사람은 리더입니다. 누군가 앞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공동체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옛날 중국 원나라의 탕왕이 천자가 된 후, 7년간 가뭄이 계속되자 한 노대신이 말했습니다. “황제님! 이번 흉년을 끝내려면 사람을 잡아 제물로 드려야 됩니다.” 그때 탕왕이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백성을 잡아 제물로 드리겠나? 내가 제물이 되겠다.”
곧 탕왕은 목욕재개하고 흰 말이 이끄는 흰 수레를 타고 들에 나가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신이여! 제가 정치를 못하고 백성을 잘 돌보지 못해 이런 가뭄이 생겼습니까? 지금 뇌물과 참소가 성행해서 의인이 고통을 당해 이런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제물로 받으시고 이 백성을 구해주소서!” 바로 그때 순식간에 비가 내려 수천 리 땅을 적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앞서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죽이면 만사가 해결됩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생기면 즉시 남 탓부터 하지 말고 즉시 내 탓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내게 마음과 피부에 느껴지기도 전에 더 철저히 죽어버려야 합니다. 내 탓인 줄 알면 다 함께 살고, 남 탓인 줄 알면 다 함께 죽습니다.
어느 날, 한 며느리가 밥을 짓다가 밥을 태웠습니다. 그때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고 구박하자 며느리는 “일부러 그랬느냐?”며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어디서 말대꾸하느냐?”고 호통을 쳤고, 이것을 지켜보던 신랑이 손찌검을 하자 새댁은 “그래! 죽여!”라고 대들며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다음날, 건너편 집의 갓 시집 온 며느리도 밥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때다가 밥을 태웠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는 “내가 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됐구나!”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시아버지는 “내가 땔감을 너무 많이 들여서 그랬다!”고 며느리를 감쌌습니다. 그리고 신랑은 “내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 와서 그렇게 됐다!”고 자기 탓으로 돌렸습니다. 다 그렇게 하니까 그날 밥을 태우고 그 가족은 더욱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을 이해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정과 교회가 잘될 것입니다. 영어로 장관을 ‘미니스터(minister)’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니스터라는 말의 원래 뜻은 ‘섬기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관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섬기는 사람이 장관과 같은 머리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힘든 일에 선택된 교인
계속해서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10분의 1을 제비 뽑아 예루살렘으로 이주시켰고, 나머지 10분의 9는 자기 원래 성읍에 거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제비 뽑히지 않은 사람들은 “다행이다!”라고 신나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제비 뽑힌 사람들은 “내가 이 힘든 일에 뽑혔구나!”라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제비 뽑혀서 예루살렘에 산 사람들은 나라와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구레네 시몬의 경우처럼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때에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해야 되나?”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 십자가를 진 것이 엄청난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원치 않는 십자가가 지워지더라도 감사하며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옛날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스웨덴 출신 선교사 사모님이 심한 향수병에 걸렸습니다. 문화 충격도 심했고 터놓고 말할 대상도 없어서 향수병은 커졌습니다. 어느 날, 그 사모님의 눈에 스웨덴제 성냥갑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분은 성냥갑에게 물었습니다. “성냥갑아! 너는 고국을 떠나 여기까지 뭐 하러 왔니?”
그때 성냥갑이 마치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선교사님! 저는 이곳에 불을 켜주러 왔어요. 그 임무를 마치면 버려질 거예요.” 그 내적인 음성을 듣고 사모님은 즉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곳에 저를 오게 하셨군요. 이제 버려져도 괜찮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하나님의 빛을 발하게 하소서!” 그 뒤 사모님을 향수병을 극복하고 자바 섬 원주민을 위해 헌신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왜 있게 되었습니까? 단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이곳에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출신 목사로서 왜 전혀 기반이 없는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가끔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 하나님께서 제가 이곳에 필요하다고 보내주셨다고 믿습니다.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선교에 초점을 두는 것 말고는 저의 신앙색체가 장로교 통합측과 전체적으로 유사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기에 그쪽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저는 그냥 저의 자리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처음에 한국에 도착하니까 동기, 동창, 동역자, 후원자, 물질 등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어떻게 사역을 시작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때는 총각이었기 때문에 결혼할 일도 막막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91년 10월에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글을 써서 당시 대표적인 3군데 출판사인 두란노, 나침반, 엠마오에 보냈습니다. 그때 엠마오 출판사에서 반응이 와서 “하나님은 나의 전부”란 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때 책을 보면 “미흡한 부분이 많고 더 잘 쓸 수 있는데...”하고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그 책 때문에 인세는 많이 벌지 못했지만 아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 아내가 제가 지은 책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 전도사가 가진 것은 없지만 들은 것은 있네.” 그 뒤 데이트를 하면서 신앙잡지에 나온 저의 글들을 읽으면서 저의 신앙 스타일과 비전이 마음에 들어 “저 정도면 결혼해도 괜찮겠다”고 안심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귀국 초창기에는 아무 것도 없어서 “하나님! 저를 왜 이곳에 보내셨습니까?”라는 생각도 간혹 들었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여러 사역에서 많은 열매를 주셨습니다. 저희 선교회를 꾸준히 후원하는 사랑의 후원자들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 후원자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저는 한국을 ‘선교 중간기지’ 및 ‘선교 자원국가’로 만들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포기하고 벌써 미국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생각하면 앞이 막막합니다. ‘선교 자원국가의 비전’을 이루려면 요삼일육선교센터(John316 Mission Center)가 필요한데 현재까지 센터를 위해 적립된 후원금이 너무 적습니다. 그것을 보면 어느 세월에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정말 막막합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저의 비전이 시들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이 그 비전에 저를 선택하셨다면 그 비전을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작은 징표라도 허락하소서!”
저는 믿습니다. 지금까지 사역도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많은 열매를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런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끔 하나님께서 사명 주셔서 허허벌판에 우리를 내몰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음과 사명감만 잃지 않으면 허허벌판에서도 반드시 열매 맺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3. 스스로 자원하는 교인
본문 2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살려고 하지 않아서 제비까지 뽑아 강제 이주를 시켰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 예루살렘에 살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자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을 얻었겠습니까? 우리는 남이 가지 않으려는 길을 자원해서 갈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길이 축복된 길입니까? 그 길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길을 보여주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축복된 길은 아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복된 길은 대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탐내는 길은 대개 저주와 심판의 길입니다.
우리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이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자원해서 가는 자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은 자원해서 기쁘게 좁은 길로 가는 사람 편입니다. 그처럼 좁은 길로 가며 십자가를 지면 잠시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너무 아름다워요. 저도 저 불꽃처럼 살고 싶어요.” 엄마가 말했습니다. “얘야! 저 화려한 불꽃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 자기 몸을 태워야 저런 빛이 나오는 거야. 네가 저렇게 멋지게 살려면 너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돼! 항상 남을 생각하고, 어려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고, 하나님 일 많이 해라. 그러면 너도 저 불꽃처럼 아름답게 살 수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태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도 살게 될 것입니다. 나만 살겠다는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개미집에 불이 나면 개미는 그 불 위에 몸을 던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몸이 타면서 불연성의 진액이 나와 불이 꺼짐으로 다른 개미들과 개미집을 살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살려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더욱 영광된 삶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4. 남을 축복해주는 교인
다시 한번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당시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살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원해서 선교지로 선교하러 간 선교사님들을 위해 후방에서 기도해주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하나님은 전방 선교사도 축복하시지만 후방에서 기도하는 후방 선교사도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그 기도 대상자도 축복받지만 그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 더욱 축복받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누군가를 저주하고 미워하면 자신이 더욱 저주받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 이상 남을 미워하지 말고 열심히 남을 위해 기도해주고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편의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편의점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옆 편의점 주인을 미워하지 말고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미워하면 자기 가게가 망하지만 축복해주면 자기 가게가 잘됩니다. 우리는 경쟁자와 미운 사람을 축복해주는 훈련을 부단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되듯이 마음의 생각도 씨가 됩니다.
가끔 나보다 잘되는 사람을 보면 시기심이 생깁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저에게 시기심을 없애주세요.”라고 기도해도 시기심이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나보다 앞서 경쟁자를 힘껏 축복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그분 사업이 부흥하게 해주시고, 그분 자녀가 잘되게 하시고, 내 이웃 교회가 잘 되게 하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그래! 그는 잘 되게 하고 너는 망하게 하마!”라고 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먼저 평화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해주고, 축복을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 때문에 살기 어려운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축복해주고 후원해주어야 합니다.
5. 교회를 힘써 지키는 교인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폐허가 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지킬 사람을 찾으시는 것을 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누군가 나서 지켜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물론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만 하나님은 직접 그 일에 나서지 않고 자원하는 헌신적인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우리가 교회를 지키는 일에 나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지킬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여건을 허락하실 것이고, 더불어 우리 영혼, 우리 자녀, 우리 가정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큰 힘으로 우리 일을 해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수지맞는 일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연약한 부분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축복의 기회입니다. 내 힘이 교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얻어 누리려는 성도가 되지 말고 교회를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힘이 부족해도 내가 가진 작은 것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을 가지고 큰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작고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은 오히려 우리를 단련시키고 성숙하게 만드는 축복의 산실입니다. 모든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 환경을 디딤돌로 삼아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을 찾아 그곳에서 헌신하려는 태도입니다.
요새 가장 중요한 경영학 용어 중의 하나가 레드 오션(붉은 바다)과 블루 오션(푸른 바다)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경쟁하는 레드 오션에서 마켓 쉐어를 늘리려고 하지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블루 오션에서 승부를 해야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가면 큰 인물이 될 수 없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외롭고 한적할지라도 불루 오션에서 작품 인생을 만들 수 있고, 그곳에서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더욱 기억해주십니다.
당시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사나?” 그러나 그들은 성전이 있는 자리를 지켰기에 결국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복된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를 지키고, 어려운 교회들과 선교사님들을 지켜주는 일에 앞장서면 반드시 어느 누구보다 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개척교회 목사님과 이천의 한 온천에 갔습니다. 그 목사님은 30대 초반에 신학교에 들어가셔서 지금 50이 넘으셨는데 태어나서 그런 곳에 처음 가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선교회에서도 그분을 돕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한 무대만 보지 말고 우리 주변의 그늘진 곳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그늘진 곳을 살피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중심인으로 우뚝 서게 해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리석은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는 모습입니다. 부담이 없는 삶은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삶이고, 앞으로 주어질 축복도 없는 삶이고, 삶 자체의 의미도 없는 삶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십자가의 헌신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귀신을 쫓는 무기가 아니라 내가 져야 할 멍에입니다. 우리가 부담을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시간이 지나면 그곳이 결국 넓은 문이 될 것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 처음 간 아이가 십자가를 보고 고모에게 물었습니다. “고모, 왜 정면의 벽에 ‘더하기(+) 표가 붙어있어?” 고모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습니다. “너 예수님 알지? 저 더하기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더해주셨고, 기쁨을 더해주셨고, 행복을 더해주셨다는 표시야.” 우리는 겉만 화려한 삶을 추구하지 말고 십자가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진정한 축복이 더해지게 될 것입니다.
< 외형 때문에 참됨을 잃지 마십시오 >
결국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지키려고 했던 모든 두목들과 제비 뽑힌 사람들과 자원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예루살렘이 수도의 위치를 회복하면서 다 역사와 사회의 중심인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다고 다 좋은 곳을 찾아 떠났던 사람은 역사와 사회의 주변인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화려한 곳만 찾으면 점차 그늘진 인생이 되고, 그늘진 곳을 찾으면 점차 화려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2차 대전 즈음에, 미국에 존 블랭챠드(John Blanchard)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플로리다의 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그 책을 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보게 되었습니다. 책을 기증한 사람은 미스 홀리스 메이넬(Miss Hollis Maynell)란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책 여기저기에 연필로 메모들이 적어 놓았는데 그 메모가 아주 사려 깊은 내용들이었습니다.
존(John)은 호기심이 생겨 그녀의 주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녀는 뉴욕에 살고 있었습니다. 존(John)은 그녀에게 첫 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쓴 다음날 존은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년여 동안 편지로 교제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텄습니다. 존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는 사랑한다면 외모는 상관이 없다는 신념에서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마침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둘은 뉴욕 역(Grand Central Station)에서 저녁 7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약속한 날, 역에서 존은 장미꽃을 머리에 꽂은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때 푸른 눈에 금발을 가진 한 미모의 늘씬한 여인이 그 앞에 나타나 “저를 따라오실래요?”하고 말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장미꽃을 머리에 꽂지 않았습니다.
그가 곧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 마침 장미꽃을 머리에 꽂은 미스 메이넬이 서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40세가 넘어 보였고, 몸은 통통했고 통통한 몸을 지탱하느라 발목도 두툼해 보였습니다. 금발의 아가씨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존은 짧은 시간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 미모의 금발의 아가씨를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1년 동안 펜팔을 통해 정신적 동반자가 되어주었던 40대 여인을 만나야 하나?”
잠깐 멍한 상태로 있다가 곧 존은 결단을 내리고 살찐 얼굴을 가진 40대 여인에게로 발을 옮겼습니다. 그의 손에는 플로리다 도서관에서 구입한 책이 손에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40대 여인 앞으로 가서 경례를 하고 책을 내보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존 블랭챠드(John Blanchard) 중위입니다. 미스 메이넬(Miss Maynell)이시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때 40대 여인이 말했습니다. “예? 저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방금 전에 여기를 지나간 금발의 아가씨가 저에게 이 장미꽃을 꽂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서 이 꽃을 달았어요. 그 아가씨가 길 건너편 레스토랑에서 기다린다고 하면서 갔어요.” 그때 존은 미스 메이넬의 의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순간적인 유혹을 이기고 자신의 ‘자신됨(integrity)’을 지켜 사랑과 행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도됨과 자신됨(integrity)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금발의 날씬한 여인과 40대의 통통한 여인이 함께 지나가며 서로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그때 우리가 외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의 성도됨을 지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것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항상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함으로 은혜와 사랑과 행복을 얻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