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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이대로는 위험하다. (고전 9: 16: 23)
우리 한국 교회는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부흥은 수적인 부흥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부흥을 경험 하였다고 하기 보다는 엄청난 성장을 하였다고 하는 것이 옳고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1984년 개신교 10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100주년이 붙은 불에 기름을 붓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84년을 지나면서부터 한국 교회의 성장세는 오히려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약한 성장과 정체 또는 침체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최근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한국교회는 꽤 오랫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교인 감소라는 상황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통계는 아직도 수적인 성장이 미미하지만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발표되지만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현재 십 몇 만 정도의 교인이 감소하였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더 줄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하면 아주 빠른 속도로 감소할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교인 감소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목협과 국민일보가 공동조사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 한국 교인 67%가 올해 2007년 이후 교회 이미지가 개선되고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언제나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그 조직과 집단을 몰락케 하는 주범인데 우리 한국교회는 비탈에서 벌써 미끄러지기 시작하였는데, 그리고 그 미끄러짐이 점점 빨라지고 있는데도 ‘괜찮을 거야’, ‘올해가 지나면 좋아질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교회의 존재목적과 이유가 선교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교회의 교인 감소는 단순한 기독교 세력의 약화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선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주 나쁜 상황입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정신을 차리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반성하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 교회는 다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아주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위험에 빠지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고 염려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한국교회가 수적인 성장을 통하여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힘을 갖게 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교만하여지기 시작하였고 그 교만함과 교만함으로 말미암은 어리석음이 우리 한국 교회를 패망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면서부터 세상은 교회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권력이 교회에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와 같은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권력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즐기게 되었고 그러면서부터 세상과 사회에 대하여 고자세가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행사하여 그것으로 세상을 움직이고 더 나아가 교회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는 치명적인 어리석음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제가 보기에 지금이 그 정점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입니다.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흘러 들어오게 하려면 교회는 세상보다 낮은 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가 교만하여져서 세상보다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흘러들어 올 수가 없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
71년도에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신학교에서 설교와 강의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선지 동산’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소명감을 고취시킨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런 표현을 통하여 우리 신학생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인 우월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왜곡된 인식은 지금까지 전혀 개선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은 자동적으로 교회와 교인을 섬긴다는 정신과 자세를 배우기보다는 싸구려(?) 부흥회에서 가장 많이 남발되고 있는 ‘주의 종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주의 종을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의 사고방식에 감염되어 교인을 섬기려 하기 보다는 교인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려하고 그것이 되지 않을 때 못 견뎌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상은 제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상은 목사뿐만 아니라 교회와 교인을 섬기라고 뽑아 세운 장로와 권사와 집사들에게도 있습니다.
저는 빨리 우리 목회자들과 교회의 직분자들이 이와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우리 한국 교회가 비탈에 서서 미끄러지기 시작한 때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목회자와 직분자들이 자세를 낮추고 겸손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한국 교회 전체의 이미지를 겸손 모드로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사를 잘 하는 민족 중에 하나는 일본과 중국입니다. 세상에 일본 장사꾼보다 인사를 잘하는 장사꾼은 없습니다. 겸손한 장사꾼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 일본에 갔을 때 충격적으로 놀랐던 일은 공항 라운지에서 차를 서빙하는 여직원이 무릎을 꿇고 차를 따라 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상점엘 가든 어느 음식점엘 가든 그와 같은 일본인의 자세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장사꾼은 절대로 손님보다 높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대로 높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들은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지만 저는 일본이 경제대국이 된 이유가 바로 그와 같은 밑바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중국 상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 상인들은 어찌 보면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중국 상인들의 상술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인이 손님보다 똑똑해 보이면 물건을 팔 수 없다는 것을 저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보이기 때문에 바보처럼 어수룩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복음을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것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판매하는 영적 상인이고 세상과 사람들은 우리가 그 복음을 전할 다시 말해서 판매해야 할 고객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와 같은 사실을 망각한데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자신의 본분을 망각했습니다.
상인은 원칙적으로 물건을 파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물론 상인에게도 물건을 파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만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 때문에 물건 파는 일에 지장 받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장사하는 것보다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그보다 작은 것을 가지고는 손님과 절대로 싸우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걸핏하면 시청 광장으로 튀어 나가는 일을 선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주 부정적으로 봅니다. 옛날 여의도 광장에서 모였던 빌리그래함 집회나 부활절 연합예배나 엑스폴로 전도 집회와는 전혀 다른 성격입니다. 제 생각이 다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시청 앞에서 모이는 기독교 집회를 볼 때마다 저는 속된 말로 교회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전에 없이 너무 정치적인 성향이 짙어지는 것을 매우 위험한 현상으로 봅니다. 좌와 우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일에 교회가 앞장 서는 것을 지헤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큰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특히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기업과 기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치적인 입장과 취향이 없겠습니까만은 사업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표명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자기들과 정치적인 성향이 같은 사람도 고객으로 보고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사람도 고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고객들을 포기하고 자기들과 정치적인 성향이 같은 사람에게만 자기 회사 물건을 팔겠다고 생각하는 기업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예 회사 문 닫을 생각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기업은 절대로 자신의 정치적인 색깔과 성향을 겉으로 나타내고 표명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를 주의 복음을 세상에 판매하는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덜 중요한 것 때문에 보다 중요한 것에 손해를 보는 일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그와 같은 어리석음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생각 없이, 함부로 우리 한국교회가 좌와 우를 이야기하고, 진보와 보수를 이야기합니다. 지혜롭지 못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취향과 철학이 있습니다. 사람은 대개 누구나 자기와 같거나 비슷한 철학과 취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사람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사하는 사람은 자기와 취향과 철학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 보다 자기 물건을 사주는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복음에 대한 소명과 사명을 잃어버린 교회 같습니다. 생각 없이 자신의 카드를 다 내 보이고 자신과 취향과 철학이 다른 복음의 고객들에게 비호감이 되는 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과 취향과 철학이 다른 사람을 예수 믿고 구원 얻어야 할 영적 소중한 고객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죄하고 타도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같아 얼마나 답답한지 이루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바울의 태도와 자세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밸 빠진 사람과 같이 자기는 율법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것 같이 행동한다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바울이야말로 선교적인 소명에 가장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감동을 받습니다.
바울 시대 때 교회는 우상의 제물 즉 고기 먹는 일을 놓고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음식이니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먹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율법 있는 사람이란 전자의 사람들 즉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미하고 있는 것이고, 율법 없는 사람이란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면 그까짓 우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생각하는 후자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바꾸면 율법 있는 자는 보수를 의미하고 율법 없는 나는 진보를 의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논쟁에 있어서 바울의 입장은 율법 없는 자 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진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색깔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고집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목회적인 그리고 선교적인 소명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신학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취향 때문에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도 어느 때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옳지 않은 것과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선교의 문이 넓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우리 한국교회가 3. 1 운동 당시 그 운동의 앞장을 서서 싸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의 교회이지만 독재정권과 싸워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앞장을 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은 모두 교회의 유익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익보다 큰 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의 뿐 아니라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의를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순수하였고, 그 때문에 오히려 복음 전도에 아주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볼 때 요즘 교회들의 시위와 투쟁은 복음적인 의를 표명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이익과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 성장이 가져다 준 세상적인 힘과 권력을 가지고 세상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신과 입장과 취향이 같은 사람들을 편 가르기 하여 세상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보다 중요한 목적과 목표를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너무 정치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일을 매우 위험한 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보다 중요한 본분을 망각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더 염려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우리의 힘을 너무 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다 큰 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이익과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 중에 윤동주 시인의 ‘새벽이 올 때까지’라는 시가 있습니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즈런이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 소리 들려 올 게외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아가는 사람도, 진보도 보수도, 미국도 북한도 복음의 젖을 먹여야 할 대상임을 잊지 않고 한 침대에 가즈런이 눞히고 잠을 재우는 우리 한국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출처/김동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