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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간 사람 (사53:30)
설교를 하기 전에 지난 한 주간 동안 지난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저를 필요로 하고 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를 필요로 하고 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필리핀 중부 앙겔레스 지역에서 외롭게 사역하고 있는 사십 여명의 선교사들이 저를 너무 필요로 하고 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저들을 반갑게 만나보고 돌아왔습니다. 저들이 저를 만나서 교제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나 좋아하고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월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오후까지 하루에 세 번씩 만나서 교제와 나눔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떠날 때는 다시 보고 싶고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목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아침까지는 저를 너무너무 보고 싶어하는 동혁이와 수혁이와 함께 지내면서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수혁이는 만 하루 반을 저와 함께 지내면서 제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저와 함께 친밀한 사랑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한 침대에서 이틀 밤을 저와 함께 잤고 금요일 하루 종일 신나게 놀 때에는 아빠나 엄마는 저리 가라고 했습니다. 토요일 저녁 7시경에 수지 집에 도착했기 때문에 설교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양해하시고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문둥병자들은 저주 받은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았습니다. 흑인들과 인디언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았습니다. 모슬렘들은 기독교의 원수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인종 문제나 종교 문제나 문화 문제나 정치 문제나 계급 문제나 장애 문제 등 때문에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면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불행과 슬픔과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필리핀 중부 앙겔레스 지역을 방문하면서 하루는 앙겔레스 산지에서 살고 있는 아이타 종족들을 만나보고 왔는데 저들이 바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이타 종족 수십만 명이 산 속에서 살고 있는데 저들은 물도 전기도 음식도 의약품도 옷도 없이 문명에서 떠난 원시 상태에서 불쌍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아이타 산족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저들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사는 원시 종족들이 남미와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수 없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타 민족이나 타 종족들에 대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의 태도는 인간 역사의 시초부터 나타났는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도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배타적인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서 앗수르의 니느웨 사람들은 물론 애굽과 바벨론과 로마 등 이방 민족들을 저주 받은 민족들로 취급하면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창12:3 이나 사49:6등에 나타난 세상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관심과 사랑을 전혀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타 지역 사람들과 타 민족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는 우리 한국 사람들 가운데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타 민족들에 대한 우월감과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태도가 독일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 가운데도 나타났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 가운데는 더 많이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의 현대 역사의 정서를 나타내는 말 가운데 반일, 반공, 반독재, 반북, 반미 등 무엇을 반대하는 구호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태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타 민족이나 타 종족들에 대한 인류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배타적이고 적대적인데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들을 품고 도우면서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편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나환자들과 모슬렘을 찾아간 성 프랜시스가 '이상한' 사람이었고, 미국 인디언들의 친구가 되었던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이상한' 사람이었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찾아간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쳐 박사가 '이상한' 사람이었고, 인도의 빈민들을 찾아간 20세기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이상한' 사람이었고, 나환자들과 살인자를 찾아간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가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인간 역사에 나타났습니까? 저는 지난 며칠 동안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다가 다음과 같은 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간 '이상한' 사람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간 '이상한' 사람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델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성 프랜시스에게도, 데이빗 브레이너드에게도, 슈바이쳐 박사에게도, 테레사 수녀에게도, 손양원 목사에게도 모델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모델이 있었습니다.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인간 역사에 역행한 '이상한' 모델이 있었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편 '이상한' 모델이 있었습니다. 그 모델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시기 전에 자기 자신이 먼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 받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 될 수도 있고 위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참으로 도울 수가 없고, 멸시와 천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을 참으로 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이 충만한 이 세상 역사에 들어오셔서 자신이 먼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과 유대인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유대의 헤롯왕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로 오셨지만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장로들과 제사장들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이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신 다음 즉 자신이 먼저 자격을 갖추신 다음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을 품고 도우면서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살아가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도움과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멸시를 당하던 이방의 땅 갈릴리로 찾아가서 저들에게 도움과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저주 받은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살아가던 문둥병 자들과 혈루증 환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도움과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살아가던 세리와 세리장들과 심지어는 간음한 여인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도움과 용서와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빨리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눅14:21).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베드로보고 이방인 로마 군인 백부장 고넬료를 찾아가라고 분부하셨고 사도 바울보고는 악의 심장부인 로마를 찾아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기독교의 복음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죄인들과 병신들과 버림 받은 사람들을 위한 제3 인종의 종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켈서스란 이교 철학자는 기독교를 조소하면서 “기독교는 병신 같은 제3 인종의 종교라”는 말을 했습니다.
둘째,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상한’ 사람들이 시대마다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성자 프랜시스는 기독교 세계가 모두 정죄한 모슬렘들과 심지어는 이단들까지 찾아가서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과 가난과 청빈의 복음을 온 몸으로 전한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의 친구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그 당시 미국의 기독교까지 멸시하고 천대하고 싫어 버린 인디언들을 찾아가서 자기의 젊음을 모두 불사르며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다가 결국 병들어 세상을 떠난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쳐 박사는 고향인 독일을 떠나 아프리카에 가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면서 살다가 아프리카 땅에 묻힌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20세기의 성녀 테레사 수녀는 고향인 알바니아를 떠나 인도에 가서 인도의 빈민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면서 살다가 인도 땅에 묻힌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이 나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당한 나환자들을 찾아가서 저들과 함께 살면서 저들에게 용서와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온 몸으로 폈고, 그리고 공산당 살인자 안재선에게까지 찾아가서 안재선과 그의 부모에게 용서와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폈으며, 나중에는 자기를 총살하는 공산당 군인에게까지 용서와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면서 세상을 떠난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이상한’ 사람의 원조였던 예수님을 생각하고 사모하고 따르다가 저들도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며 예수님의 발자취와 그분의 제자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의 친구로 살아가는 작은 제자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손영삼 선교사 부부는 싫어 버림 받은 사람들인 그리스의 집시들의 친구로 저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윤주홍 선교사 부부는 멸시와 천대와 적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친구로 저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남일 선교사 부부 등 몇몇 선교사들은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사람들인 아이타 종족들의 친구들로 저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남일 선교사 부부 등 몇몇 선교사들은 산속에서 원시적으로 살아가는 아이타 종족들에게 15개의 우물을 파주었고, 15개의 교회당을 지어주었으며, 저들을 계속해서 찾아가서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노래를 가르치고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아이타족들이 사는 곳 두 곳을 함께 방문해서 쌀 포대들과 빵을 선물로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양남일 선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뺑뺑 돌아가면서 원주민 춤을 추었는데 아주 멋지게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거의 벗은 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목욕할 수 있는 물은 없습니다. 비가 올 때 밖에 나와서 빗물로 몸을 씻는 길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저들이 사는 산속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너무 험했습니다. 마치 장애물 경주하는 느낌으로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타고 달렸습니다. 자동차 바퀴가 두 번이나 펑크가 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남일 선교사 부부는 즐겁고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운전을 얼마나 빨리 잘하는 모릅니다. 저들은 아이타 족을 돌보면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임명희 목사 부부는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영등포의 노숙자들을 찾아가서 저들과 함께 살아가며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격려와 구원의 손길을 펴고 있습니다. 김해성 목사와 이선희 목사는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외국인 노동들과 함께 살면서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격려와 구원의 손길을 펴고 있습니다. 왜 저들이 보통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이상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상한’ 일을 하시는 원조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주님을 따라서 ‘이상한’ 일을 한 사람들이 곳곳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주일마다 고난에 대한 설교를 자주하고 순교에 대한 설교를 자주해서 여러분들에게 부담을 많이 드리게 되어서 참으로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축복을 많이 받으라는 설교를 많이 하여야 하는데 고난과 순교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해서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더 어렵고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살자는 설교를 하게 되어서 더욱 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오늘의 설교의 내용은 역사의 흐름과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며 살자는 내용입니다. 나와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정치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스타일이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천대하거나 무시하거나 적대하거나 싫어 버리지 말고 저들을 품고 이해하고 돕고 격려하며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따뜻하게 펴면서 살도록 힘쓰자는 것입니다. 최근에 조용기 목사님이 개성에서 말한 대로 말로써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곳에서는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기분에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속 상하는 일과 어려움이 많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고 참으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 될 것입니다.
한평생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과 함께 수고롭게 살면서 저들에게 도움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편 사람들의 삶의 마지막 이야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이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무슨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평생을 손해 보면서 헛되게 살았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슈바이쳐 박사에 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가 의학 공부를 다 마친 다음 1913년, 아프리카의 적도지방인 랑바레네에 도착하여, 혼자 힘으로 병원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모두 병원 유지에 쏟아 부었으나, 점점 더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그 병원 규모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각지로 다니며 모금운동을 벌일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자기 고향인 알자스에도 들러 모금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의 동료들과 친지 그리고 각계 인사들은 슈바이쳐가 기차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모여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기차는 도착하였고, 환영 나온 사람들과 기자들은 그 기차의 1등실 앞으로 우루루 몰려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슈바이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둥대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맨 뒤 칸 3등 열차에서 내려 초라한 모습으로 플랫 폼을 걸어 나오는 신사 한 사람이 비쳤는데 그가 바로 슈바이쳐 박사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놀란 사람들은 슈바이쳐 박사 앞으로 달려가서 그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아니 박사님, 어째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그들의 질문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불평에 가까웠습니다. 그때 슈바이쳐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4등칸이 없어서 3등칸을 타고 왔습니다’. 슈바이쳐의 이 대답은 그들 모두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겸손한 그의 말과 태도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저절로 모두 고개가 숙여졌고,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한평생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과 함께 수고롭게 살면서 저들에게 도움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편 사람들은 저들의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모두 감사와 행복을 가슴에 가득가득 지녔을 것입니다. 좀더 가난한 삶과 좀더 불편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아쉬움을 지니면서 모두 감사와 행복을 가슴에 가득가득 지녔을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흔적을 몸에 가득히 지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아쉬움을 지니면서 모두 감사와 행복을 가슴에 가득가득 지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의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 문에 이르렀을 때는 가난한자들과 병든 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던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4-40).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의 남은 삶을 우리의 주변이나 멀리서 사는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다소의 도움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펴는 ‘이상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다하기 전에 몇 년 동안이라도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사랑과 격려와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는 ‘훈련 제도’를 교회가 마련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
설교를 하기 전에 지난 한 주간 동안 지난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저를 필요로 하고 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를 필요로 하고 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필리핀 중부 앙겔레스 지역에서 외롭게 사역하고 있는 사십 여명의 선교사들이 저를 너무 필요로 하고 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저들을 반갑게 만나보고 돌아왔습니다. 저들이 저를 만나서 교제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나 좋아하고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월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오후까지 하루에 세 번씩 만나서 교제와 나눔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떠날 때는 다시 보고 싶고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목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아침까지는 저를 너무너무 보고 싶어하는 동혁이와 수혁이와 함께 지내면서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수혁이는 만 하루 반을 저와 함께 지내면서 제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저와 함께 친밀한 사랑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한 침대에서 이틀 밤을 저와 함께 잤고 금요일 하루 종일 신나게 놀 때에는 아빠나 엄마는 저리 가라고 했습니다. 토요일 저녁 7시경에 수지 집에 도착했기 때문에 설교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양해하시고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는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문둥병자들은 저주 받은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았습니다. 흑인들과 인디언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았습니다. 모슬렘들은 기독교의 원수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인종 문제나 종교 문제나 문화 문제나 정치 문제나 계급 문제나 장애 문제 등 때문에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면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불행과 슬픔과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필리핀 중부 앙겔레스 지역을 방문하면서 하루는 앙겔레스 산지에서 살고 있는 아이타 종족들을 만나보고 왔는데 저들이 바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이타 종족 수십만 명이 산 속에서 살고 있는데 저들은 물도 전기도 음식도 의약품도 옷도 없이 문명에서 떠난 원시 상태에서 불쌍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필리핀 정부는 아이타 산족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저들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사는 원시 종족들이 남미와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수 없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타 민족이나 타 종족들에 대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의 태도는 인간 역사의 시초부터 나타났는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도 계속해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배타적인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서 앗수르의 니느웨 사람들은 물론 애굽과 바벨론과 로마 등 이방 민족들을 저주 받은 민족들로 취급하면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창12:3 이나 사49:6등에 나타난 세상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관심과 사랑을 전혀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타 지역 사람들과 타 민족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는 우리 한국 사람들 가운데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타 민족들에 대한 우월감과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태도가 독일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 가운데도 나타났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 가운데는 더 많이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의 현대 역사의 정서를 나타내는 말 가운데 반일, 반공, 반독재, 반북, 반미 등 무엇을 반대하는 구호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태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타 민족이나 타 종족들에 대한 인류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배타적이고 적대적인데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들을 품고 도우면서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편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나환자들과 모슬렘을 찾아간 성 프랜시스가 '이상한' 사람이었고, 미국 인디언들의 친구가 되었던 데이빗 브레이너드가 '이상한' 사람이었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찾아간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쳐 박사가 '이상한' 사람이었고, 인도의 빈민들을 찾아간 20세기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이상한' 사람이었고, 나환자들과 살인자를 찾아간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가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인간 역사에 나타났습니까? 저는 지난 며칠 동안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다가 다음과 같은 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간 '이상한' 사람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간 '이상한' 사람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델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성 프랜시스에게도, 데이빗 브레이너드에게도, 슈바이쳐 박사에게도, 테레사 수녀에게도, 손양원 목사에게도 모델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모델이 있었습니다.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인간 역사에 역행한 '이상한' 모델이 있었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편 '이상한' 모델이 있었습니다. 그 모델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시기 전에 자기 자신이 먼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 받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 될 수도 있고 위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참으로 도울 수가 없고, 멸시와 천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을 참으로 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이 충만한 이 세상 역사에 들어오셔서 자신이 먼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과 유대인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유대의 헤롯왕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로 오셨지만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장로들과 제사장들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신이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신 다음 즉 자신이 먼저 자격을 갖추신 다음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을 품고 도우면서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살아가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도움과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멸시를 당하던 이방의 땅 갈릴리로 찾아가서 저들에게 도움과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저주 받은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살아가던 문둥병 자들과 혈루증 환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도움과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살아가던 세리와 세리장들과 심지어는 간음한 여인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도움과 용서와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빨리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눅14:21).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베드로보고 이방인 로마 군인 백부장 고넬료를 찾아가라고 분부하셨고 사도 바울보고는 악의 심장부인 로마를 찾아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기독교의 복음은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죄인들과 병신들과 버림 받은 사람들을 위한 제3 인종의 종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켈서스란 이교 철학자는 기독교를 조소하면서 “기독교는 병신 같은 제3 인종의 종교라”는 말을 했습니다.
둘째,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상한’ 사람들이 시대마다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성자 프랜시스는 기독교 세계가 모두 정죄한 모슬렘들과 심지어는 이단들까지 찾아가서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과 가난과 청빈의 복음을 온 몸으로 전한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의 친구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그 당시 미국의 기독교까지 멸시하고 천대하고 싫어 버린 인디언들을 찾아가서 자기의 젊음을 모두 불사르며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다가 결국 병들어 세상을 떠난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쳐 박사는 고향인 독일을 떠나 아프리카에 가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면서 살다가 아프리카 땅에 묻힌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20세기의 성녀 테레사 수녀는 고향인 알바니아를 떠나 인도에 가서 인도의 빈민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면서 살다가 인도 땅에 묻힌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이 나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당한 나환자들을 찾아가서 저들과 함께 살면서 저들에게 용서와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온 몸으로 폈고, 그리고 공산당 살인자 안재선에게까지 찾아가서 안재선과 그의 부모에게 용서와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폈으며, 나중에는 자기를 총살하는 공산당 군인에게까지 용서와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면서 세상을 떠난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이상한’ 사람의 원조였던 예수님을 생각하고 사모하고 따르다가 저들도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며 예수님의 발자취와 그분의 제자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의 친구로 살아가는 작은 제자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손영삼 선교사 부부는 싫어 버림 받은 사람들인 그리스의 집시들의 친구로 저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윤주홍 선교사 부부는 멸시와 천대와 적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친구로 저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남일 선교사 부부 등 몇몇 선교사들은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사람들인 아이타 종족들의 친구들로 저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남일 선교사 부부 등 몇몇 선교사들은 산속에서 원시적으로 살아가는 아이타 종족들에게 15개의 우물을 파주었고, 15개의 교회당을 지어주었으며, 저들을 계속해서 찾아가서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의 손길을 펴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노래를 가르치고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아이타족들이 사는 곳 두 곳을 함께 방문해서 쌀 포대들과 빵을 선물로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양남일 선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뺑뺑 돌아가면서 원주민 춤을 추었는데 아주 멋지게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거의 벗은 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목욕할 수 있는 물은 없습니다. 비가 올 때 밖에 나와서 빗물로 몸을 씻는 길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저들이 사는 산속을 찾아가는 길은 너무너무 험했습니다. 마치 장애물 경주하는 느낌으로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타고 달렸습니다. 자동차 바퀴가 두 번이나 펑크가 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남일 선교사 부부는 즐겁고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운전을 얼마나 빨리 잘하는 모릅니다. 저들은 아이타 족을 돌보면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임명희 목사 부부는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영등포의 노숙자들을 찾아가서 저들과 함께 살아가며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격려와 구원의 손길을 펴고 있습니다. 김해성 목사와 이선희 목사는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외국인 노동들과 함께 살면서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격려와 구원의 손길을 펴고 있습니다. 왜 저들이 보통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이상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상한’ 일을 하시는 원조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 주님을 따라서 ‘이상한’ 일을 한 사람들이 곳곳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주일마다 고난에 대한 설교를 자주하고 순교에 대한 설교를 자주해서 여러분들에게 부담을 많이 드리게 되어서 참으로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축복을 많이 받으라는 설교를 많이 하여야 하는데 고난과 순교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해서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더 어렵고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살자는 설교를 하게 되어서 더욱 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오늘의 설교의 내용은 역사의 흐름과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며 살자는 내용입니다. 나와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정치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스타일이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천대하거나 무시하거나 적대하거나 싫어 버리지 말고 저들을 품고 이해하고 돕고 격려하며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따뜻하게 펴면서 살도록 힘쓰자는 것입니다. 최근에 조용기 목사님이 개성에서 말한 대로 말로써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곳에서는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기분에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속 상하는 일과 어려움이 많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고 참으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 될 것입니다.
한평생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과 함께 수고롭게 살면서 저들에게 도움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편 사람들의 삶의 마지막 이야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이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무슨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평생을 손해 보면서 헛되게 살았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슈바이쳐 박사에 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가 의학 공부를 다 마친 다음 1913년, 아프리카의 적도지방인 랑바레네에 도착하여, 혼자 힘으로 병원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모두 병원 유지에 쏟아 부었으나, 점점 더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그 병원 규모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각지로 다니며 모금운동을 벌일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자기 고향인 알자스에도 들러 모금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의 동료들과 친지 그리고 각계 인사들은 슈바이쳐가 기차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모여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기차는 도착하였고, 환영 나온 사람들과 기자들은 그 기차의 1등실 앞으로 우루루 몰려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슈바이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둥대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맨 뒤 칸 3등 열차에서 내려 초라한 모습으로 플랫 폼을 걸어 나오는 신사 한 사람이 비쳤는데 그가 바로 슈바이쳐 박사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놀란 사람들은 슈바이쳐 박사 앞으로 달려가서 그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아니 박사님, 어째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그들의 질문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불평에 가까웠습니다. 그때 슈바이쳐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4등칸이 없어서 3등칸을 타고 왔습니다’. 슈바이쳐의 이 대답은 그들 모두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겸손한 그의 말과 태도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저절로 모두 고개가 숙여졌고,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한평생 멸시와 싫어 버림 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저들과 함께 수고롭게 살면서 저들에게 도움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편 사람들은 저들의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모두 감사와 행복을 가슴에 가득가득 지녔을 것입니다. 좀더 가난한 삶과 좀더 불편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아쉬움을 지니면서 모두 감사와 행복을 가슴에 가득가득 지녔을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흔적을 몸에 가득히 지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아쉬움을 지니면서 모두 감사와 행복을 가슴에 가득가득 지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감사의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 문에 이르렀을 때는 가난한자들과 병든 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던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4-40).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의 남은 삶을 우리의 주변이나 멀리서 사는 멸시와 천대와 싫어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다소의 도움과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펴는 ‘이상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다하기 전에 몇 년 동안이라도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사랑과 격려와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는 ‘훈련 제도’를 교회가 마련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