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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함으로 부흥하는 교회 (히3:6)
(히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동방 원정길에 나선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군대가 험한 산맥을 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말을 타고 행군하던 병사 중 하나가 깊은 구렁에 빠졌습니다. 간신히 몸은 빠져 나왔는데, 말과 등에 실렸던 커다란 짐은 꺼낼 방법이 없어 안절부절하고 있는 터였습니다. 때마침 알렉산더가 그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대왕이 보기에는 그 병사가 실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상관에게 보고만 하면 그냥 지나쳐도 될 법한 일인데, 구태여 저 무거운 보따리를 자기가 짊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유는 뭘까?' 그래서 알렉산더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 짐이 무엇이길래, 그 깊은 곳에서 그것을 꺼내려고 그렇게 고생을 하는 건가?" 그러자 알렉산더의 얼굴을 모르는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장교님, 이 짐은 알렉산더 대왕의 보물입니다. 힘이 들더라도 목적지까지 옮겨야 합니다. 그게 제 임무거든요." 이렇듯 충성을 다하려는 병사의 행동에 감동받은 알렉산더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병사! 내가 바로 알렉산더다. 너의 충성심이 나를 감동시켰도다. 그 짐을 막사까지 옮겨 놓거든 다시 너의 짐에 합류시켜라. 이제 너의 것이 되었다. 웬 보물이냐고 누가 묻거든 알렉산더가 직접 네게 주었다고 말하려므나!"
충성스런 사신은 주어진 임무를 잘 감당하는 사람이요, 좋은 군사는 지휘관의 명령에 충성하는 군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사람은 충성스런 사신과 좋은 군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며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충성입니다(갈5:22-23).
주님께서는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 작은 일에라도 충성할 때는 기뻐하시며 '착하고 충성도니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1907년 처럼 다시 부흥하는 달입니다. 히브리서를 통하여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충성을 본 받아 우리도 충성하며 다시 부흥하는 역사를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예수님은 사도로서 사명에 충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히 3:1,2)었다고 합니다.
사도의 근본 의미는 '파송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파송 받은 자는 보내신 자의 권력과 권위를 대표하고, 그의 목소리는 그를 파송한 자의 의사를 대변합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 무서운 전염병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증세가 심했던지 의사들마저도 환자를 만지기만 하면 죽게 되므로, 병의 원인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기용이라는 한 의사가 매우 심각한 어조로 “내일 아침 날이 밝을 무렵이면 이 병에 걸린 사람을 해부한 기록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의사들은 환자를 만져본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인가 하고서는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기용 의사는 자기의 처소로 돌아가 밤이 깊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한 후, 한 죽은 환자를 내어 놓고 하나 하나 해부를 하면서 상세한 기록을 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무서운 전염병의 원인을 규명할 수가 있었으며 그리고 병에 대한 치료가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해지게 된 바로 그 순간 이 의사는 죽었다고 합니다. 의사로서 보냄 받은 사명에 충성 다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 보냄 받으신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우리도 세상에 보냄 받은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충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하셨고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합니다.
파루아의 성 안토니오는 어린 아이였을 때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오는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누가 왔나 보려고 달려갔습니다. 문을 열자 싸늘한 겨울 날씨에 떨고 서 있는 누더기를 걸친 거지를 발견했습니다. 안토니오는 거지를 불쌍하게 여겨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가서 당신에게 따뜻한 옷을 드리라고 부탁해 볼께요.”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당신네들이 사는 세상은 참 춥군요. 그러나 나는 옷을 구걸하러 오진 않았습니다.” 안토니오는 다시 말했습니다. “굉장히 배가 고프신 모양이군요. 들어오세요. 우리 어머니께서 당신에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할 것입니다.”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배가 고프긴 하지만 음식을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안토니오는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우리 집 문을 두드리셨어요?”거지가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 달라고 부탁하러 왔습니다.”안토니오는 한발 짝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제 심장을 당신께 드리면 저는 죽을 거예요.”그러자 거지는 어깨에 메고 있던 자루를 내려서 거기에서 몇 개의 심장을 꺼내 보이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심장이고,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것이고, 이것은 성 이그나시우스의 것입니다. 나에게 심장을 준 모든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오히려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그 말을 들은 안토니오는 자기 앞에 서 있는 거지가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심장을 내어 놓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길이 당장은 죽음의 길 같지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 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후 68년 네로 박해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국 밧으라에서 X형으로 된 형틀에서 못박혀 죽었습니다. 큰 야고보는 주후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요한은 끊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 당했다가 주후100년경 에베소에서 죽었고, 빌립은 부루기아에서 기둥에 매인채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고, 마태는 애굽에서 칼에, 다대오는 버시아에서 활에 맞아 죽었으며, 작은 야고보는 주후 62년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하여 충성다했고 12 사도들도 주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충성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사도라 하시고 대제사장이라 합니다.
제사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며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합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에서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제사장이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이루어집니다. 제사는 대제사장 아론으로부터 예수의 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레 16:11).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단번에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어떤 일에는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는 충성이 따릅니다. 전라남도에 있는 용정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국전쟁 때 공산당의 만행으로 교회는 불이 나서 없어졌고 성도들은 많이 피살당했습니다. 수복되자 피난 갔던 성도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시 건축하려고 해도 도무지 가망이 없었습니다. 이때 온 성도들이 힘을 모아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예산을 세웠습니다. 시멘트, 목재, 자갈 등 건축 자재의 예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예산이라는 것도 실재 필요 액에는 못 미쳐 막막한 실정이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부모가 순교하고 혼자 살고 있는 15살 된 성옥이가 있었습니다. 교회 건축자재 중 돌에 대한 예산이 나오자 성옥이는 이 돌을 내가 산에서 머리에 이어서 날라 놓으리라고 결심을 하고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옥이는 남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밤 11시가 지나서야만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한밤 중에 산에 가서 돌을 예배당 건축터에 매일 날랐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이 일을 행하면서 순교 당하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아버지! 어머니! 제가 부모님 대신 예배당 건축을 하는데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고 울었습니다. 돌이 세 트럭에 실을 만큼 되었습니다. 아무도 누가 돌을 날랐는지 몰랐습니다. 성옥이는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교회의 건축은 성옥이의 희생이 함께 했던 것입니다.
몸을 바쳐 희생하며 헌신함과 함께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충성도 함께 합니다. 인도의 시인 타골(Tagore)의 체험담입니다. 어느 날 아침 종이 출근하지 않아 타골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종은 오후 2시에 와서 자기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가라! 너같은 자는 필요없다!"고 외치자 종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지난 밤에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과 주인의 분노를 다 짊어지고서도 하루의 책임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꾼입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제사장으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충성하셨습니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우리도 신령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으로 충성 다하여야 합니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나니'(6절)라 기록하심으로 그리스도는 집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집을 다스리시는 자로서 충성하셨음을 말씀합니다.
하인으로 충성하기도 합니다.
(히 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영국 왕자가 여행을 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한참 길을 찾아 헤매다가 들에서 양을 돌보고 있는 소년 목동을 발견했습니다. 왕자는 '이제 길을 찾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왕자는 소년 목동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어이 소년, 내가 지금 길을 잃었는데 내게 길을 안내해 줄 수 있겠나?' 그 때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저는 이 양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저의 주인께서 이 양들을 제게 맡기셨으므로 제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자는 약간 놀라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자네, 내가 누군지 아는가? 나는 이 나라의 왕자일세. 자네는 이렇게 하루 종일 양을 돌보면 얼마의 보수를 받나? 나를 길 있는 곳까지만 인도해 주게. 그러면 자네가 받는 보수의 일년 치를 주겠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양들을 돌볼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듣자 왕자는 화가 치밀어 올라 뒷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총을 그 소년 목동의 머리를 향해 겨누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자다. 내게는 너를 죽일 권한이 있다. 그래도 내 말을 듣지 않겠나?'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목동은 분노에 차 있는 왕자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 저는 길을 안내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양떼를 돌볼 책임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후일에 이 소년 목동은 영국 왕의 부름을 받아 영국의 유명한 수상 <존 제임스> 이 되었습니다. (21세기 예화- 끝까지 충성한 목동 영국의 수상이 되다)
주님은 아들로서 충성합니다.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우월하시어 집을 맡은 자이시며 아들로서 우월성을 가지셨지만 충성의 삶을 사셨음을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 (요 1:14)신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빌 2:6)며 곧 하나님이(요 1:1)십니다.
공생애 기간에 식사할 겨를(막 3:20)도 없이 사명을 감당하시며 새벽마다 기도하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고(요 18:3-8) 붙잡혀 십자가에 죽기까지(빌 2:8) 충성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의 자녀의 품위를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 데니스 레인의 이야기입니다. 뉴욕 부룩클린의 노예시장에 아프리카에서 붙잡혀온 흑인 중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다른 노예들은 모두 슬픔과 절망으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이 청년만은 빛나는 눈동자로 앞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노예를 주시하던 한 실업가가 물었습니다. “저 노예는 다른 노예들과는 달리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자요?” 노예상이 대답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추장의 아들이었소. 비록 작은 부족에 불과하지만 그 부족 사람들은 그를 왕자라고 부르오” 채찍으로 위협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있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6세기 프랑스 국경에 있는 작은 마을 하나가 스페인 군의공격을 받아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성벽은 차차 무너지고 성안에서는 기근과 열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어느 날 스페인 군사들이 편지 꽂힌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 보냈습니다. 만일 항복한다면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겠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을 통치하고 있던 위그노교의 위대한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는 "레겜 하베무스"(우리에게는 왕이 있다)라는 두 단어만 적힌 편지를 창에 꽂아서 적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스페인 군의 위협과 유혹에 대한 단호한 거절이었습니다. 엄청난 위험에도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충성이야말로 진정한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로 대제사장으로 아들로 충성하셨으니 우리도 충성을 다하여 다시 부흥하는 일에 함께하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
(히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동방 원정길에 나선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군대가 험한 산맥을 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말을 타고 행군하던 병사 중 하나가 깊은 구렁에 빠졌습니다. 간신히 몸은 빠져 나왔는데, 말과 등에 실렸던 커다란 짐은 꺼낼 방법이 없어 안절부절하고 있는 터였습니다. 때마침 알렉산더가 그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대왕이 보기에는 그 병사가 실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상관에게 보고만 하면 그냥 지나쳐도 될 법한 일인데, 구태여 저 무거운 보따리를 자기가 짊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유는 뭘까?' 그래서 알렉산더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 짐이 무엇이길래, 그 깊은 곳에서 그것을 꺼내려고 그렇게 고생을 하는 건가?" 그러자 알렉산더의 얼굴을 모르는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장교님, 이 짐은 알렉산더 대왕의 보물입니다. 힘이 들더라도 목적지까지 옮겨야 합니다. 그게 제 임무거든요." 이렇듯 충성을 다하려는 병사의 행동에 감동받은 알렉산더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병사! 내가 바로 알렉산더다. 너의 충성심이 나를 감동시켰도다. 그 짐을 막사까지 옮겨 놓거든 다시 너의 짐에 합류시켜라. 이제 너의 것이 되었다. 웬 보물이냐고 누가 묻거든 알렉산더가 직접 네게 주었다고 말하려므나!"
충성스런 사신은 주어진 임무를 잘 감당하는 사람이요, 좋은 군사는 지휘관의 명령에 충성하는 군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사람은 충성스런 사신과 좋은 군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며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충성입니다(갈5:22-23).
주님께서는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 작은 일에라도 충성할 때는 기뻐하시며 '착하고 충성도니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1907년 처럼 다시 부흥하는 달입니다. 히브리서를 통하여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충성을 본 받아 우리도 충성하며 다시 부흥하는 역사를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예수님은 사도로서 사명에 충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히 3:1,2)었다고 합니다.
사도의 근본 의미는 '파송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파송 받은 자는 보내신 자의 권력과 권위를 대표하고, 그의 목소리는 그를 파송한 자의 의사를 대변합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 무서운 전염병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증세가 심했던지 의사들마저도 환자를 만지기만 하면 죽게 되므로, 병의 원인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기용이라는 한 의사가 매우 심각한 어조로 “내일 아침 날이 밝을 무렵이면 이 병에 걸린 사람을 해부한 기록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의사들은 환자를 만져본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인가 하고서는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기용 의사는 자기의 처소로 돌아가 밤이 깊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한 후, 한 죽은 환자를 내어 놓고 하나 하나 해부를 하면서 상세한 기록을 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무서운 전염병의 원인을 규명할 수가 있었으며 그리고 병에 대한 치료가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해지게 된 바로 그 순간 이 의사는 죽었다고 합니다. 의사로서 보냄 받은 사명에 충성 다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 보냄 받으신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우리도 세상에 보냄 받은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충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하셨고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합니다.
파루아의 성 안토니오는 어린 아이였을 때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안토니오는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누가 왔나 보려고 달려갔습니다. 문을 열자 싸늘한 겨울 날씨에 떨고 서 있는 누더기를 걸친 거지를 발견했습니다. 안토니오는 거지를 불쌍하게 여겨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가서 당신에게 따뜻한 옷을 드리라고 부탁해 볼께요.”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당신네들이 사는 세상은 참 춥군요. 그러나 나는 옷을 구걸하러 오진 않았습니다.” 안토니오는 다시 말했습니다. “굉장히 배가 고프신 모양이군요. 들어오세요. 우리 어머니께서 당신에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할 것입니다.”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배가 고프긴 하지만 음식을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안토니오는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우리 집 문을 두드리셨어요?”거지가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 달라고 부탁하러 왔습니다.”안토니오는 한발 짝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제 심장을 당신께 드리면 저는 죽을 거예요.”그러자 거지는 어깨에 메고 있던 자루를 내려서 거기에서 몇 개의 심장을 꺼내 보이며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심장이고,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것이고, 이것은 성 이그나시우스의 것입니다. 나에게 심장을 준 모든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오히려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그 말을 들은 안토니오는 자기 앞에 서 있는 거지가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심장을 내어 놓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길이 당장은 죽음의 길 같지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 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후 68년 네로 박해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국 밧으라에서 X형으로 된 형틀에서 못박혀 죽었습니다. 큰 야고보는 주후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요한은 끊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 당했다가 주후100년경 에베소에서 죽었고, 빌립은 부루기아에서 기둥에 매인채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고, 마태는 애굽에서 칼에, 다대오는 버시아에서 활에 맞아 죽었으며, 작은 야고보는 주후 62년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하여 충성다했고 12 사도들도 주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충성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사도라 하시고 대제사장이라 합니다.
제사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며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합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에서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백성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제사장이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이루어집니다. 제사는 대제사장 아론으로부터 예수의 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레 16:11).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바침으로써 단번에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어떤 일에는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는 충성이 따릅니다. 전라남도에 있는 용정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국전쟁 때 공산당의 만행으로 교회는 불이 나서 없어졌고 성도들은 많이 피살당했습니다. 수복되자 피난 갔던 성도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시 건축하려고 해도 도무지 가망이 없었습니다. 이때 온 성도들이 힘을 모아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예산을 세웠습니다. 시멘트, 목재, 자갈 등 건축 자재의 예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예산이라는 것도 실재 필요 액에는 못 미쳐 막막한 실정이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부모가 순교하고 혼자 살고 있는 15살 된 성옥이가 있었습니다. 교회 건축자재 중 돌에 대한 예산이 나오자 성옥이는 이 돌을 내가 산에서 머리에 이어서 날라 놓으리라고 결심을 하고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옥이는 남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밤 11시가 지나서야만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한밤 중에 산에 가서 돌을 예배당 건축터에 매일 날랐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이 일을 행하면서 순교 당하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아버지! 어머니! 제가 부모님 대신 예배당 건축을 하는데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고 울었습니다. 돌이 세 트럭에 실을 만큼 되었습니다. 아무도 누가 돌을 날랐는지 몰랐습니다. 성옥이는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교회의 건축은 성옥이의 희생이 함께 했던 것입니다.
몸을 바쳐 희생하며 헌신함과 함께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충성도 함께 합니다. 인도의 시인 타골(Tagore)의 체험담입니다. 어느 날 아침 종이 출근하지 않아 타골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종은 오후 2시에 와서 자기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가라! 너같은 자는 필요없다!"고 외치자 종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지난 밤에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과 주인의 분노를 다 짊어지고서도 하루의 책임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꾼입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제사장으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충성하셨습니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우리도 신령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으로 충성 다하여야 합니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나니'(6절)라 기록하심으로 그리스도는 집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집을 다스리시는 자로서 충성하셨음을 말씀합니다.
하인으로 충성하기도 합니다.
(히 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영국 왕자가 여행을 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한참 길을 찾아 헤매다가 들에서 양을 돌보고 있는 소년 목동을 발견했습니다. 왕자는 '이제 길을 찾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왕자는 소년 목동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어이 소년, 내가 지금 길을 잃었는데 내게 길을 안내해 줄 수 있겠나?' 그 때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저는 이 양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저의 주인께서 이 양들을 제게 맡기셨으므로 제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자는 약간 놀라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자네, 내가 누군지 아는가? 나는 이 나라의 왕자일세. 자네는 이렇게 하루 종일 양을 돌보면 얼마의 보수를 받나? 나를 길 있는 곳까지만 인도해 주게. 그러면 자네가 받는 보수의 일년 치를 주겠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양들을 돌볼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듣자 왕자는 화가 치밀어 올라 뒷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총을 그 소년 목동의 머리를 향해 겨누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자다. 내게는 너를 죽일 권한이 있다. 그래도 내 말을 듣지 않겠나?'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목동은 분노에 차 있는 왕자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 저는 길을 안내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양떼를 돌볼 책임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후일에 이 소년 목동은 영국 왕의 부름을 받아 영국의 유명한 수상 <존 제임스> 이 되었습니다. (21세기 예화- 끝까지 충성한 목동 영국의 수상이 되다)
주님은 아들로서 충성합니다.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우월하시어 집을 맡은 자이시며 아들로서 우월성을 가지셨지만 충성의 삶을 사셨음을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 (요 1:14)신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빌 2:6)며 곧 하나님이(요 1:1)십니다.
공생애 기간에 식사할 겨를(막 3:20)도 없이 사명을 감당하시며 새벽마다 기도하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고(요 18:3-8) 붙잡혀 십자가에 죽기까지(빌 2:8) 충성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의 자녀의 품위를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 데니스 레인의 이야기입니다. 뉴욕 부룩클린의 노예시장에 아프리카에서 붙잡혀온 흑인 중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다른 노예들은 모두 슬픔과 절망으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이 청년만은 빛나는 눈동자로 앞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노예를 주시하던 한 실업가가 물었습니다. “저 노예는 다른 노예들과는 달리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자요?” 노예상이 대답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추장의 아들이었소. 비록 작은 부족에 불과하지만 그 부족 사람들은 그를 왕자라고 부르오” 채찍으로 위협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있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6세기 프랑스 국경에 있는 작은 마을 하나가 스페인 군의공격을 받아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성벽은 차차 무너지고 성안에서는 기근과 열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어느 날 스페인 군사들이 편지 꽂힌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 보냈습니다. 만일 항복한다면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겠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을 통치하고 있던 위그노교의 위대한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는 "레겜 하베무스"(우리에게는 왕이 있다)라는 두 단어만 적힌 편지를 창에 꽂아서 적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스페인 군의 위협과 유혹에 대한 단호한 거절이었습니다. 엄청난 위험에도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충성이야말로 진정한 충성입니다.
예수님이 사도로 대제사장으로 아들로 충성하셨으니 우리도 충성을 다하여 다시 부흥하는 일에 함께하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