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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축복을 받은 자! (요 3:16-21)
'인생의 마지막 30분!'이란 연극 각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유망한 청년이 30세 늦은 나이에 대학을 마치고, 박사 논문을 제출해 놓고 그만 폐암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최후로 진단하기를 '이제 30분 후면 죽는다.'는 사망선고를 내립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최후에 시간을 지나갑니다. 병상에 누워 최후에 순간을 기다리는 청년에게 우편배달부가 급한 전보 한 통을 전달합니다. 내용인즉 '억만장자인 삼촌이 죽었다는 부고와 함께 상속할 자가 없으니 와서 재산을 상속 받으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들 청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시간은 그의 생명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명은 이제 15분을 남겨놓고 있는데 그 때 학교에서 '박사학위논문합격' 통지서가 날라 왔습니다. 그의 생명 5분을 남겨 놓고는 애인에게서 '결혼 승낙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반가워야 할 애인의 결혼 승낙도 죽어 가는 생명 앞에서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억만장자 상속권, 박사학위 논문 합격증, 그리고 행복한 결혼 승낙서'를 손에 쥔 채 죽어 갔습니다.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그 청년은 30세에 평생을 분투해도 얻기 힘든 것을 다 얻었으나 그의 생명을 잃으니 그 모든 것이 다 휴지조각처럼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귀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죽음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과 세금은 면치 못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저마다 자기를 향하여 달려오는 죽음을 회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표 따라 살다가 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시간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당부합니다.
성경은 말하십니다. 약4:14절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또 벧전1:24-25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인생은 저마다 죽음의 밤이 홀연히 찾아온답니다.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나그네 생활이 끝나는 날이 옵니다. 그런데 인생이 죽어버리면 끝이 나고 맙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낳고 죽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낳고 싶어서 난 사람이 없고, 죽고 싶다고 마음대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그 분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믿/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죽음 뒤가 더 무섭습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 무서운 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나의 행위를 밝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지나온 과거를 심판하신다면 누구 한 사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이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3:10)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만은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행여 사람 앞에 죄인이 아닐지라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덮어두시고 한 가지 죄만 가지고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요3: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무슨 말씀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믿지 않은 것이 죄이므로 그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죄라고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요6:29절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우리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할/ ◀제목소개!▶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불쌍하다'고 합니다. 또 '고아가 불쌍하다'고 합니다. '병든 사람이 불쌍하다'고 합니다. '과부신세가 불쌍하다'고도 합니다. '쫄딱 망한 사람이 불쌍하다'고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 이 사람들은 심판 받아 지옥 불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중요한 이야깁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을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집 없이 살던 사람이 APT 한 채 장만한 정도일까요? 사람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정도일까요? 아니면 딸만 다섯 낳던 사람이 아들 하나 낳은 것 정도일까요? 아니면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기쁨정도일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그렇게 값싸게 여길까요? 장사해서 이익을 좀 얻은 정도로 평가하거나 고상한 취미 정도로 생각하거나 이 땅에서 흔히 있는 어떤 문제의 하나로 생각하니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문제를 너무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얼마나 심각하고 엄숙한 질문입니까? 우리는 누구나 이 엄숙한 질문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 세상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문제입니다. /믿/ 이 생명의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신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 16절을 최대한으로 확대한다면 신구약 성경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대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래서 흔히 요3장을 '구원 장, 혹은 믿음 장, 영생 장'이라고 합니다. 요3:16절을 요약해 보면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입니다. 이 말을 더 줄이면 '믿음과 구원'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복음의 내용입니다. /할/
1. 예수가 누구인가?
신약 성경의 4복음서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무려 600번이나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마1:21절에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세상의 숱한 군왕들의 이름은 사라져가도 '예수'의 이름은 영원히 성도들의 입에서 불리고 있습니다.
①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기 '하늘에 올라간 자'는 직역하면 '하늘에 계신 자'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기원은 땅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기원이 하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믿/
②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민21:4-9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속죄의 죽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고 있을 때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주야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시고 돌보셨습니다. 이런 복스러운 삶 속에서 감사와 찬송이 터져 나와야 하는데 그들은 뚝하면 지도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길이 나쁘다'는 것과 '식물도 없고 물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어 물게 하므로 죽은 자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모세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민21;8절 "불 뱀에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는 장대 위의 놋 뱀! 그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여기 뱀은 마귀를 나타냅니다. 물린 자는 죄인을 가리킵니다. 장대 위의 놋 뱀은 세상 죄를 지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놋 뱀을 쳐다보면 살았는데, 이것은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행16: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
③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16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0:28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롬5:21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다른 곳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영생이 있습니다.
행4:12절에 하나님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밖에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5:24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
2. 우리가 16절의 '믿음과 구원'을 말할 때 몇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관계성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여기서 '저'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과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흔히 기복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은 욕망이나 목적을 성취하려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 회퍼'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믿음을 "싸구려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믿음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나 얻고 심리적인 위안이나 얻어 보자 해서 믿는 신앙입니다. 이것도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신앙이고 극히 수양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과 관련성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예수님과 관계될 때에만 그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태중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탯줄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하고 영양을 공급받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태아가 탯줄에서 떨어지면 끝장입니다.
피아노를 보십시오. 피아노의 생명은 줄입니다. 피아노가 겉에서 보면 화려하고 윤기가 나고 빛이 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줄입니다. 그 피아노가 아무리 값이 비싸고 화려해도 모든 줄이 붙어 있어야 할 곳에 붙어 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값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입니다.
▶성경은 이 관계성을 말할 때 요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를 듭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아무리 극상품이라 할지라도 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15: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관계성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시골에서 고구마를 깰 때에 보면, 땅속에서 고구마가 커서 땅이 갈라지고 흙이 수북하게 올라옵니다. 그 때 갈라진 곳을 파면 큰 고구마가 뛰어 나옵니다. 그 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고구마 줄기를 잡고 쑥 뽑으면 여러 개의 고구마가 한꺼번에 주렁주렁 매달려서 뽑혀 나옵니다. 이것을 보고 박병선집사님은 '고구마 전도 법'을 개발해서 인기가 높습니다. 왜 주렁주렁 뽑혀 나옵니까? 그것은 고구마가 줄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관계성입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모두 예수의 생명 속에 연합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계신 곳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누리는 축복을 우리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영광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영광을 받을 것이고, 그가 승리했으니 우리도 승리할 것이고, 그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우리도 세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골3: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였음이니라." 이것이 모두 관계성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눅18장에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기도의 응답에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⑴관계의 근거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속에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닌데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 일까보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데 왜 안 들어주시겠느냐? 육신의 부모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십니다.
사49:15-16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무슨 말씀입니까? 어머니가 젖 먹는 아이를 잃어버릴지언정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써놓고 기억하고 계신다고 이사야 선지지가 말하고 있습니다.
⑵약속의 근거입니다. 약속이 없는 사이도 들어주었는데, 약속하신 하나님이 왜 안 들어주시겠냐는 것입니다. 재판관은 들어주겠다는 약속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들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마7:7-11절에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찾으면 만나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두드리면 하는 문을 여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롬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반문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21: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⑶능력에 근거입니다. 재판관은 인간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홍해바다를 하나님의 콧김으로 갈라놓으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신 하나님은 죽어서 4일이나 지난 썩어버린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과소 평가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10:27절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신앙생활은 이런 관계성을 잘 이해하고 믿으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②인식하는 일, 즉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구든지 그를 믿게 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영생을 돈을 주고 산다면, 천국은 눈꼴사나운 사람들로 가득 메워질 것입니다. 거기서도 돈 많이 낸 사람들이 저마다 돈의 힘을 자랑하며 으스댈 것입니다. 만일 천국을 권력으로 간다면 거기서도 권력 쥔 사람들이 득실거릴 것입니다. 또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간다면 박사들이 득실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조건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서 수천 번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가는 곳도 아니고, 도를 닦고 적선을 많이 해서 가는 곳도 아닙니다. 본문은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너무나 쉽고 간단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천국은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오직 믿음이 영생을 얻게 되는데 엡2:8절에서 이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세상의 가장 큰 것들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공기는 음식값처럼 값을 쳐서 지불해야 한다면 엄청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혜택을 받는 햇빛 값을 전기료 내듯 계산해서 낸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값일 것이고, 우리가 매일 먹고 쓰는 물 값을 전부 내야 한다면 그 값이 엄청날 것입니다. 수도세라는 것은 사실 물 수송 요금이지 물 값이 아닙니다.
영생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가운데 가장 큰 선물입니다. 너무나 큰 선물이기 때문에 그 값을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선물이라는 '히'단어 가운데 '데데'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아낌없이 내어 던지다'라는 의미이고, 또 다른 '쇼하드'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속전(값)을 주고 몸을 구해 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영생은 주님이 자신을 아낌없이 내던지고 그 대신 우리를 건져내신 위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이 땅위에 살고 잇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믿음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값이 비싼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고 살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아주 비싼 보석 반지가 있는데 그것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알 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값이 비싼 최신 기계를 수입해 들여왔어도 그 기계를 만질 줄 모르면 그것은 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인식한다, 안다.'는 말은 머리로 기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성경을 뜻도 모르면서 머리로만 많이 기억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외운 사람이 불행하게도 교도소에 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약성경을 모두 외우고 시편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다고 합니다. 성경을 그렇게 많이 외웠어도 그 말씀이 그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체험이 수반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요6:68절에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곧 체험입니다. 이 같은 체험이 있으니까 그를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같은 체험이 없는 사람은 미련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천국의 길에서 떠나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반드시 이 같은 체험이 중요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근거는 믿음'이라고 했답니다. 사람들이 우주선에 사람을 태워서 달나라로 쏘아 올립니다. 그때 우주선에 태워져 달나라로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별로 긴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선이 다시 지구로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조차도 믿음에 기초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치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높이 올라가서도 편안히 잠을 잡니다. 왜냐하면 이 비행기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이 기차를 타고 그 좁은 레일 위를 마구 달리면서도 단잠을 잡니다. 그것도 믿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요1:12절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고 했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알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고로 믿음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무지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무지가 죄라고 했습니다. 모르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지하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더 힘이 듭니다. 우리가 같은 길을 걸어가도 느낌이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릅니다. 갈 때는 모르는 길을 가기 때문에 더 멀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올 때는 아는 길로 오기 때문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면서 당부하기를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했습니다. 왜? '아는 일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우주만물을 운행하십니다.
▶지구는 한 시간당 1600km의 속도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지구가 자전속도를 10분의 1로 줄여서 시간당 160km로 자전한다면 밤과 낮의 길이가 10배나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낮 120시간, 밤 120시간, 그렇게 되면 낮의 태양은 모든 식물을 태워 죽일 것이며 밤의 추위는 모든 생명을 얼어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매 시간당 1,60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지금도 돌고 있어, 하루는 24시간 낮과 밤이 적절히 교차하며 흘러갑니다.
▶지구와 태양은 너무나도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표면은 섭씨 6000도입니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구는 다 타 버릴 것이요, 조금만 멀어지면 지구는 곧 얼음 덩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지구가 23도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23도 쯤 기울어져 있기에 우리에게 4계절을 만들어 줍니다.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는 전부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여 온 대륙은 얼음 덩어리로 가득 차고 말았을 것입니다.
▶정확한 대기권의 두께입니다. 지금보다 얇았다면 하루에도 수백만 개의 별똥별들이 대기권을 통과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표면에 떨어져 순식간에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모든 동식물의 신체적인 성장이 적절하게 제한되고 있습니다. 지구에는 수천 억의 곤충이 있습니다. 그런데 곤충들이 지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소유한 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을 통해서 호흡하는데 곤충들이 성장하면 몸은 커져도 호흡하는 관은 커지지 않기에 성장의 제한을 받습니다. 만약 곤충들에게 신체적 성장의 제한이 없었다면 사자처럼 큰 벌을 만들 것입니다. 인간은 벌에 쏘여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같은 일들이 우연히 되었겠는가? 성경을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19: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히3:4절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아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우리의 신앙의 높이도 깊이도 넓이도 측량할 수 있습니다.
③믿음과 구원은 '예수를 영접하는 일'입니다(요1:12).
믿음은 알고 인식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알고 인식한 바를 마음 깊이 영접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나의 주님으로 체험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영접기도를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간절한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은 중요합니다. 영접이 바로 되지 않으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영접은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됩니다. 창3장에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므로 인간에게 저주가 임했는데 그것이 인간사의 근본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는데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창3: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영접한다는 것은 마귀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회복하는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회복의 관계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관계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회복하고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단계'가 됩니다. /아멘!/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을 하게 되면 맨 먼저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목적의 변화입니다.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목적이 변화됩니다. 또 소속이 바뀌는 변화가 오게 됩니다. 호적이 바뀌고, 신분이 바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시민권자가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망하려야 망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안 되는 것 때문에 낙심하십니까? 안 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른 길을 여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생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할/
▶진시황은 38세에 중국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불로 장수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그였지만 흐르는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영원토록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서 불로초까지 먹었습니다. 그랬던 그도 결국 50을 넘기지 못하고 49살에 죽습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절세의 미인 양귀비도 그렇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부귀영화가 한 몸에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녀도 난리가 나서 도망가다가 37살 한창 나이에 목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7-80년 살다가 결국 한두 평 무덤으로 끝나는 게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서도 인생을 '생로병사'라 합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게 인생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고 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절대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최대의 고통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멘!/
3.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왜 보내셨는가?
①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인가? 성경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며(마17:17), '죄 많은 세대'라고(막8:38)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온 인류'를 가리키고 이 인류는 죄악에 빠져 있는 인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는 14절의 말씀과 연결된 구절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준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이 보통 사랑입니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합니다. 그런고로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최고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그 외아들을 인류의 대 속물로 주셨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글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아니고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에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②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는 '누구든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종과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 세계 각국 각 민족을 다 포섭하는 사랑, 남녀노소, 빈부귀천, 선악간에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는 그 넓이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③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고후6:9-10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④영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은 영생을 뭐라고 설명합니까? 요17: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또한 그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제 사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잘 알고 있지만 그분은 나를 모르십니다. 왜냐하면 서로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귀고 교제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삶을 말합니다. 독생자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 인생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성령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어의 '루아크'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때부터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삶이 됩니다(새 생명).
롬8장에서는 성령을 곧 생명이라고 했고, 요14장에서는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또한 생명이 있는 자에겐 반드시 생명의 역사와 증거가 따라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 가운데 탄식하며 주를 부를 때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으시며 응답하십니다(요14:14).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멸망치 않는 승리의 신분입니다. /믿/
또 영생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영원히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
⑤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이는 저를(예수님) 믿는 자 마다" 구원의 범위는 무제한입니다. 성별의 차이도 없고, 연령의 차이도 없으며, 빈부귀천의 차이도 없으며, 종족의 구분도 없으며, 때와 시의 구분도 없습니다. 선악의 구분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이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는 선물도 많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어 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귀한 선물인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금 덩어리가 귀한 선물이겠습니까? 병들어서 죽어 가는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이 귀한 선물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생명 이상 귀한 것이 없습니다. 영혼이 죽어 가는 자에겐 예수님 밖에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⑥영생의 축복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리'들이고, 둘째는 '제자'들입니다. 마5: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무리'와 '제자'가 구분됩니다. '무리'와 '제자', 무엇이 다를까요? 겉으로 보면 무리들과 제자들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첫째로, 무리들도 제자들처럼 주님을 열심히 쫓아다녔습니다. 마4:25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13:2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그들은 '들로, 산으로, 동네로' 예수님이 계시다면 불나게 쫓아다녔습니다.
둘째로, 무리들도 주님의 교훈을 들을 만큼 듣고 감탄했습니다. 마7:28절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셋째로, 무리들도 주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마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마9:33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주님 곁을 떠나갔고, 제자들은 주님 곁에 남았습니다. 무리들은 말씀을 잊었지만 제자들은 말씀을 기억했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메시야로 믿었고, 무리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평생 목숨을 걸고 주님을 전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믿/
⑦이제 우리가 할 일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더더욱 사랑해야 합니다(19-21).
▶빛에 종류가 있습니다. 제 일차적인 빛은 사람들이 최초로 발견한 부싯돌로 일으킨 빛입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원시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제 2차원적인 빛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전기 불입니다. 이 불로 사람들은 동력을 일으켜서 오늘의 근대산업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제 3차원적인 빛을 또 발견해 냈습니다. 그것이 원자력입니다. 이 원자력은 소량의 원자로 대량의 화력을 제공해 줍니다. 이 원자력 앞에 우리가 지금 떨고 있습니다. 김정일이가 이것가지고 세계를 놀리고 있습니다. 이 빛은 인간이 발견한 빛 가운데서도 최첨단의 빛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빛들보다도 차원이 다른 또 다른 빛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태양의 빛입니다. 이 빛은 사람들이 발견한 빛이 아니고 하나님이 태초에 주신 빛입니다. 또 하나는 양심의 빛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태초부터 인간에게 주신 빛입니다. 이를테면 도덕적인 빛입니다. 세상에 양심의 빛이 어두워지면 더러운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양심의 빛이 무엇보다도 밝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빛들보다도 더 중요한 빛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은 '빛'으로 오신 예수를 품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빛을 품고 살아갈 때 죄와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빛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두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영생을 주신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할/ (2006년 10월 29일 대예배 설교)
출처/송수천 목사 설교 중에서
'인생의 마지막 30분!'이란 연극 각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유망한 청년이 30세 늦은 나이에 대학을 마치고, 박사 논문을 제출해 놓고 그만 폐암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최후로 진단하기를 '이제 30분 후면 죽는다.'는 사망선고를 내립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최후에 시간을 지나갑니다. 병상에 누워 최후에 순간을 기다리는 청년에게 우편배달부가 급한 전보 한 통을 전달합니다. 내용인즉 '억만장자인 삼촌이 죽었다는 부고와 함께 상속할 자가 없으니 와서 재산을 상속 받으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들 청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시간은 그의 생명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명은 이제 15분을 남겨놓고 있는데 그 때 학교에서 '박사학위논문합격' 통지서가 날라 왔습니다. 그의 생명 5분을 남겨 놓고는 애인에게서 '결혼 승낙의 편지'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반가워야 할 애인의 결혼 승낙도 죽어 가는 생명 앞에서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억만장자 상속권, 박사학위 논문 합격증, 그리고 행복한 결혼 승낙서'를 손에 쥔 채 죽어 갔습니다.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그 청년은 30세에 평생을 분투해도 얻기 힘든 것을 다 얻었으나 그의 생명을 잃으니 그 모든 것이 다 휴지조각처럼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귀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죽음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과 세금은 면치 못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저마다 자기를 향하여 달려오는 죽음을 회피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표 따라 살다가 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시간표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당부합니다.
성경은 말하십니다. 약4:14절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또 벧전1:24-25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인생은 저마다 죽음의 밤이 홀연히 찾아온답니다.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나그네 생활이 끝나는 날이 옵니다. 그런데 인생이 죽어버리면 끝이 나고 맙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낳고 죽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낳고 싶어서 난 사람이 없고, 죽고 싶다고 마음대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그 분의 섭리 아래 있습니다. /믿/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죽음 뒤가 더 무섭습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 무서운 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나의 행위를 밝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지나온 과거를 심판하신다면 누구 한 사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이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3:10)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만은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행여 사람 앞에 죄인이 아닐지라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덮어두시고 한 가지 죄만 가지고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요3: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무슨 말씀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믿지 않은 것이 죄이므로 그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죄라고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요6:29절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우리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할/ ◀제목소개!▶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불쌍하다'고 합니다. 또 '고아가 불쌍하다'고 합니다. '병든 사람이 불쌍하다'고 합니다. '과부신세가 불쌍하다'고도 합니다. '쫄딱 망한 사람이 불쌍하다'고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 이 사람들은 심판 받아 지옥 불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중요한 이야깁니다. 정말 예수 믿는 것을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집 없이 살던 사람이 APT 한 채 장만한 정도일까요? 사람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정도일까요? 아니면 딸만 다섯 낳던 사람이 아들 하나 낳은 것 정도일까요? 아니면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기쁨정도일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그렇게 값싸게 여길까요? 장사해서 이익을 좀 얻은 정도로 평가하거나 고상한 취미 정도로 생각하거나 이 땅에서 흔히 있는 어떤 문제의 하나로 생각하니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문제를 너무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확신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얼마나 심각하고 엄숙한 질문입니까? 우리는 누구나 이 엄숙한 질문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 세상만을 위한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문제입니다. /믿/ 이 생명의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신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 16절을 최대한으로 확대한다면 신구약 성경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대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래서 흔히 요3장을 '구원 장, 혹은 믿음 장, 영생 장'이라고 합니다. 요3:16절을 요약해 보면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입니다. 이 말을 더 줄이면 '믿음과 구원'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복음의 내용입니다. /할/
1. 예수가 누구인가?
신약 성경의 4복음서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무려 600번이나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마1:21절에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세상의 숱한 군왕들의 이름은 사라져가도 '예수'의 이름은 영원히 성도들의 입에서 불리고 있습니다.
①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여기 '하늘에 올라간 자'는 직역하면 '하늘에 계신 자'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기원은 땅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기원이 하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믿/
②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민21:4-9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속죄의 죽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고 있을 때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주야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시고 돌보셨습니다. 이런 복스러운 삶 속에서 감사와 찬송이 터져 나와야 하는데 그들은 뚝하면 지도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길이 나쁘다'는 것과 '식물도 없고 물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어 물게 하므로 죽은 자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모세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민21;8절 "불 뱀에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는 장대 위의 놋 뱀! 그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여기 뱀은 마귀를 나타냅니다. 물린 자는 죄인을 가리킵니다. 장대 위의 놋 뱀은 세상 죄를 지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놋 뱀을 쳐다보면 살았는데, 이것은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행16: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
③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16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0:28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롬5:21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다른 곳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영생이 있습니다.
행4:12절에 하나님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밖에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5:24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
2. 우리가 16절의 '믿음과 구원'을 말할 때 몇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관계성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여기서 '저'는 물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관계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여러 종류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과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흔히 기복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신앙은 욕망이나 목적을 성취하려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본 회퍼'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믿음을 "싸구려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믿음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나 얻고 심리적인 위안이나 얻어 보자 해서 믿는 신앙입니다. 이것도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신앙이고 극히 수양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과 관련성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예수님과 관계될 때에만 그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태중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탯줄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하고 영양을 공급받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태아가 탯줄에서 떨어지면 끝장입니다.
피아노를 보십시오. 피아노의 생명은 줄입니다. 피아노가 겉에서 보면 화려하고 윤기가 나고 빛이 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줄입니다. 그 피아노가 아무리 값이 비싸고 화려해도 모든 줄이 붙어 있어야 할 곳에 붙어 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값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입니다.
▶성경은 이 관계성을 말할 때 요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를 듭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아무리 극상품이라 할지라도 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15: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관계성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시골에서 고구마를 깰 때에 보면, 땅속에서 고구마가 커서 땅이 갈라지고 흙이 수북하게 올라옵니다. 그 때 갈라진 곳을 파면 큰 고구마가 뛰어 나옵니다. 그 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고구마 줄기를 잡고 쑥 뽑으면 여러 개의 고구마가 한꺼번에 주렁주렁 매달려서 뽑혀 나옵니다. 이것을 보고 박병선집사님은 '고구마 전도 법'을 개발해서 인기가 높습니다. 왜 주렁주렁 뽑혀 나옵니까? 그것은 고구마가 줄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관계성입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모두 예수의 생명 속에 연합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계신 곳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누리는 축복을 우리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영광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영광을 받을 것이고, 그가 승리했으니 우리도 승리할 것이고, 그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우리도 세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골3:3절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였음이니라." 이것이 모두 관계성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눅18장에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기도의 응답에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⑴관계의 근거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속에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닌데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 일까보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인데 왜 안 들어주시겠느냐? 육신의 부모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십니다.
사49:15-16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무슨 말씀입니까? 어머니가 젖 먹는 아이를 잃어버릴지언정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써놓고 기억하고 계신다고 이사야 선지지가 말하고 있습니다.
⑵약속의 근거입니다. 약속이 없는 사이도 들어주었는데, 약속하신 하나님이 왜 안 들어주시겠냐는 것입니다. 재판관은 들어주겠다는 약속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들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마7:7-11절에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찾으면 만나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두드리면 하는 문을 여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롬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반문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21: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⑶능력에 근거입니다. 재판관은 인간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홍해바다를 하나님의 콧김으로 갈라놓으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신 하나님은 죽어서 4일이나 지난 썩어버린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과소 평가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10:27절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신앙생활은 이런 관계성을 잘 이해하고 믿으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②인식하는 일, 즉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누구든지 그를 믿게 해서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영생을 돈을 주고 산다면, 천국은 눈꼴사나운 사람들로 가득 메워질 것입니다. 거기서도 돈 많이 낸 사람들이 저마다 돈의 힘을 자랑하며 으스댈 것입니다. 만일 천국을 권력으로 간다면 거기서도 권력 쥔 사람들이 득실거릴 것입니다. 또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간다면 박사들이 득실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런 조건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서 수천 번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가는 곳도 아니고, 도를 닦고 적선을 많이 해서 가는 곳도 아닙니다. 본문은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너무나 쉽고 간단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천국은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오직 믿음이 영생을 얻게 되는데 엡2:8절에서 이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세상의 가장 큰 것들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공기는 음식값처럼 값을 쳐서 지불해야 한다면 엄청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혜택을 받는 햇빛 값을 전기료 내듯 계산해서 낸다면 그것 또한 엄청난 값일 것이고, 우리가 매일 먹고 쓰는 물 값을 전부 내야 한다면 그 값이 엄청날 것입니다. 수도세라는 것은 사실 물 수송 요금이지 물 값이 아닙니다.
영생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가운데 가장 큰 선물입니다. 너무나 큰 선물이기 때문에 그 값을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선물이라는 '히'단어 가운데 '데데'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아낌없이 내어 던지다'라는 의미이고, 또 다른 '쇼하드'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속전(값)을 주고 몸을 구해 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영생은 주님이 자신을 아낌없이 내던지고 그 대신 우리를 건져내신 위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이 땅위에 살고 잇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믿음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값이 비싼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고 살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아주 비싼 보석 반지가 있는데 그것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알 수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값이 비싼 최신 기계를 수입해 들여왔어도 그 기계를 만질 줄 모르면 그것은 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인식한다, 안다.'는 말은 머리로 기억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은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가령 성경을 뜻도 모르면서 머리로만 많이 기억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외운 사람이 불행하게도 교도소에 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약성경을 모두 외우고 시편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다고 합니다. 성경을 그렇게 많이 외웠어도 그 말씀이 그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체험이 수반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요6:68절에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곧 체험입니다. 이 같은 체험이 있으니까 그를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같은 체험이 없는 사람은 미련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천국의 길에서 떠나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반드시 이 같은 체험이 중요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근거는 믿음'이라고 했답니다. 사람들이 우주선에 사람을 태워서 달나라로 쏘아 올립니다. 그때 우주선에 태워져 달나라로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별로 긴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선이 다시 지구로 무사히 돌아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조차도 믿음에 기초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이치는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높이 올라가서도 편안히 잠을 잡니다. 왜냐하면 이 비행기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들이 기차를 타고 그 좁은 레일 위를 마구 달리면서도 단잠을 잡니다. 그것도 믿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요1:12절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고 했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알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고로 믿음은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무지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무지가 죄라고 했습니다. 모르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무지하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더 힘이 듭니다. 우리가 같은 길을 걸어가도 느낌이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릅니다. 갈 때는 모르는 길을 가기 때문에 더 멀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올 때는 아는 길로 오기 때문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이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면서 당부하기를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했습니다. 왜? '아는 일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우주만물을 운행하십니다.
▶지구는 한 시간당 1600km의 속도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지구가 자전속도를 10분의 1로 줄여서 시간당 160km로 자전한다면 밤과 낮의 길이가 10배나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낮 120시간, 밤 120시간, 그렇게 되면 낮의 태양은 모든 식물을 태워 죽일 것이며 밤의 추위는 모든 생명을 얼어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매 시간당 1,60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지금도 돌고 있어, 하루는 24시간 낮과 밤이 적절히 교차하며 흘러갑니다.
▶지구와 태양은 너무나도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표면은 섭씨 6000도입니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구는 다 타 버릴 것이요, 조금만 멀어지면 지구는 곧 얼음 덩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지구가 23도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23도 쯤 기울어져 있기에 우리에게 4계절을 만들어 줍니다.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는 전부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여 온 대륙은 얼음 덩어리로 가득 차고 말았을 것입니다.
▶정확한 대기권의 두께입니다. 지금보다 얇았다면 하루에도 수백만 개의 별똥별들이 대기권을 통과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표면에 떨어져 순식간에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모든 동식물의 신체적인 성장이 적절하게 제한되고 있습니다. 지구에는 수천 억의 곤충이 있습니다. 그런데 곤충들이 지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소유한 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을 통해서 호흡하는데 곤충들이 성장하면 몸은 커져도 호흡하는 관은 커지지 않기에 성장의 제한을 받습니다. 만약 곤충들에게 신체적 성장의 제한이 없었다면 사자처럼 큰 벌을 만들 것입니다. 인간은 벌에 쏘여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같은 일들이 우연히 되었겠는가? 성경을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19: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히3:4절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아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우리의 신앙의 높이도 깊이도 넓이도 측량할 수 있습니다.
③믿음과 구원은 '예수를 영접하는 일'입니다(요1:12).
믿음은 알고 인식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알고 인식한 바를 마음 깊이 영접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나의 주님으로 체험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뜻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영접기도를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간절한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은 중요합니다. 영접이 바로 되지 않으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영접은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됩니다. 창3장에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므로 인간에게 저주가 임했는데 그것이 인간사의 근본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는데 예수를 영접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창3:15절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영접한다는 것은 마귀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회복하는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회복의 관계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관계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회복하고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단계'가 됩니다. /아멘!/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을 하게 되면 맨 먼저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목적의 변화입니다.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목적이 변화됩니다. 또 소속이 바뀌는 변화가 오게 됩니다. 호적이 바뀌고, 신분이 바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시민권자가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망하려야 망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안 되는 것 때문에 낙심하십니까? 안 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른 길을 여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생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할/
▶진시황은 38세에 중국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불로 장수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그였지만 흐르는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영원토록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서 불로초까지 먹었습니다. 그랬던 그도 결국 50을 넘기지 못하고 49살에 죽습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절세의 미인 양귀비도 그렇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부귀영화가 한 몸에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녀도 난리가 나서 도망가다가 37살 한창 나이에 목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7-80년 살다가 결국 한두 평 무덤으로 끝나는 게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서도 인생을 '생로병사'라 합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게 인생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고 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절대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최대의 고통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멘!/
3.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왜 보내셨는가?
①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인가? 성경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며(마17:17), '죄 많은 세대'라고(막8:38)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온 인류'를 가리키고 이 인류는 죄악에 빠져 있는 인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는 14절의 말씀과 연결된 구절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준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이 보통 사랑입니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합니다. 그런고로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최고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그 외아들을 인류의 대 속물로 주셨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글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아니고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에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②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는 '누구든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종과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 세계 각국 각 민족을 다 포섭하는 사랑, 남녀노소, 빈부귀천, 선악간에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는 그 넓이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③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고후6:9-10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④영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은 영생을 뭐라고 설명합니까? 요17: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또한 그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제 사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잘 알고 있지만 그분은 나를 모르십니다. 왜냐하면 서로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귀고 교제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삶을 말합니다. 독생자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 인생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성령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어의 '루아크'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때부터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새로운 삶이 됩니다(새 생명).
롬8장에서는 성령을 곧 생명이라고 했고, 요14장에서는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또한 생명이 있는 자에겐 반드시 생명의 역사와 증거가 따라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 가운데 탄식하며 주를 부를 때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으시며 응답하십니다(요14:14).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멸망치 않는 승리의 신분입니다. /믿/
또 영생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영원히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
⑤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이는 저를(예수님) 믿는 자 마다" 구원의 범위는 무제한입니다. 성별의 차이도 없고, 연령의 차이도 없으며, 빈부귀천의 차이도 없으며, 종족의 구분도 없으며, 때와 시의 구분도 없습니다. 선악의 구분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이면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는 선물도 많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어 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귀한 선물인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금 덩어리가 귀한 선물이겠습니까? 병들어서 죽어 가는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이 귀한 선물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생명 이상 귀한 것이 없습니다. 영혼이 죽어 가는 자에겐 예수님 밖에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⑥영생의 축복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리'들이고, 둘째는 '제자'들입니다. 마5: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무리'와 '제자'가 구분됩니다. '무리'와 '제자', 무엇이 다를까요? 겉으로 보면 무리들과 제자들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첫째로, 무리들도 제자들처럼 주님을 열심히 쫓아다녔습니다. 마4:25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13:2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그들은 '들로, 산으로, 동네로' 예수님이 계시다면 불나게 쫓아다녔습니다.
둘째로, 무리들도 주님의 교훈을 들을 만큼 듣고 감탄했습니다. 마7:28절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셋째로, 무리들도 주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마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마9:33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주님 곁을 떠나갔고, 제자들은 주님 곁에 남았습니다. 무리들은 말씀을 잊었지만 제자들은 말씀을 기억했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메시야로 믿었고, 무리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평생 목숨을 걸고 주님을 전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믿/
⑦이제 우리가 할 일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더더욱 사랑해야 합니다(19-21).
▶빛에 종류가 있습니다. 제 일차적인 빛은 사람들이 최초로 발견한 부싯돌로 일으킨 빛입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원시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제 2차원적인 빛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전기 불입니다. 이 불로 사람들은 동력을 일으켜서 오늘의 근대산업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제 3차원적인 빛을 또 발견해 냈습니다. 그것이 원자력입니다. 이 원자력은 소량의 원자로 대량의 화력을 제공해 줍니다. 이 원자력 앞에 우리가 지금 떨고 있습니다. 김정일이가 이것가지고 세계를 놀리고 있습니다. 이 빛은 인간이 발견한 빛 가운데서도 최첨단의 빛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빛들보다도 차원이 다른 또 다른 빛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태양의 빛입니다. 이 빛은 사람들이 발견한 빛이 아니고 하나님이 태초에 주신 빛입니다. 또 하나는 양심의 빛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태초부터 인간에게 주신 빛입니다. 이를테면 도덕적인 빛입니다. 세상에 양심의 빛이 어두워지면 더러운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양심의 빛이 무엇보다도 밝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빛들보다도 더 중요한 빛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은 '빛'으로 오신 예수를 품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빛을 품고 살아갈 때 죄와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빛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두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영생을 주신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할/ (2006년 10월 29일 대예배 설교)
출처/송수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