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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사람 다윗 (행 13: 21-23)
오늘은 사도행전 13장 21절에서 23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마음에 드는 사람 다윗”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2절을 보면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사시대 450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하자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세웠더니 변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움을 받은 후에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집사일 때에는 순종하고 충성하다가 장로로 세워놓으니 변질되어 목에 힘을 줍니다. 차라리 장로가 안된 것만 못합니다. 그런 장로는 문제가 됩니다. 사울도 왕으로 세워놓자 변질되었습니다. 권사 되기 전에는 성경공부도 잘 하고 봉사도 잘 하다가 권사로 세워놓자 이제는 될 만큼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다음달로 당장 성경공부와 봉사를 그만 둡니다. 차라리 권사가 안 되는 것이 낫습니다. 권사 되는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었다 봅니다. 후회 스러운 인간입니다.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참아 기다려보시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하시고 사울을 전쟁에 보내어 죽이시고 아들 요나단도 끝내버리고 맙니다. 사울이 죽고 왕노릇을 했던 이스보셋마저도 하나님은 노여워하여서 정리하셨습니다. 그 후에 다윗을 세우시고 내 마음에 꼭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밖에 나면 하나님께서 폐기처분 하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도 세워주시고 자기의 뜻을 이루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찾을 수 없으나 성경 이곳 저곳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런 면이 마음에 들었겠다라는 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사건들은 다윗을 만나매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신 이후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과론 적이 아니냐고 하실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적이라는 것을 아시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래서 다윗 평생의 사건들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신앙적인 사람 다윗 (삼상 17:45-47)
다윗의 믿음이 마음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웠는데 처음에는 얼마나 겸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쥐꼬리만한 믿음이 있더니 그것도 나중에는 모두 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 꼴을 보지 못하시고 정리하십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무엇이 마음에 들으셨느냐 하면 다윗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형님 세분이 블레셋 나라와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군대에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세명의 아들걱정을 하면서 다윗에게 가서 안부를 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전쟁터에 가서 안부를 알아 가지고 오는 것은 턱도 없는 소리이지만 그 때는 가능했습니다. 다윗이 그 때에 소년의 티는 벗어났지만 청년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가보니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엘라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대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블레셋의 대장 골리앗이 앞으로 나오더니 이렇게 싸울 것 없이 블레셋의 대표자 한명과 이스라엘의 대표자 한명이 나와서 일대일로 싸우고 끝내자고 하였습니다. 그 장면을 본 이스라엘 군대가 모두 두려워 떨며 누구도 나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때 형님의 안부를 알기 위해 갔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섰습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욕하는 골리앗을 보고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저 놈을 해치우겠다고 하는 자세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누구와 싸울 때 둘이서 치고 받고 싸우는 경우 져줄 수도 있지만 아버지 욕을 하고 어머니 욕을 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싸우려면 나와 싸울 일이지, 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건드립니까? 부모님 욕을 하는데도 가만히 있다면 정말 멍청한 자식입니다. 나를 욕하고 나에게 싸우자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부모님을 욕하면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척 장신에 베틀채같은 창을 가지고 나오는 골리앗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다윗이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지고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갑옷도 입지 못했습니다. 어른의 갑옷을 입혀주자 질질 끌려서 움직이지를 못했기에 맨몸으로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골리앗을 보고 “너무 크다”라고 합니다. “너무 크다”라고 할 때에는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한가지는 너무 크니까 우리가 감당을 못하겠다는 반응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이렇게 생각하였고 그러기에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는 너무 크니까 물맷돌을 아무렇게 던져도 다 맞겠다는 반응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러분, 야구선수가 홈런을 칠 때 어떻게 해서 치는지 아십니까? 어린아이 주먹만한 공이 날아오는데 그 공이 축구공만 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축구공이 날아오는데 못 칠 야구선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그 공을 치면 홈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3진 아웃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 공이 콩알만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칠 수가 없고 아웃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도 골리앗을 보았을 때 몸집이 너무 크니까 아무렇게 던져도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골리앗이 전신갑주를 입었는데 얼굴만 내놓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자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칼도 없이 물맷돌 다섯 개만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차고 있는 칼을 빼서 골리앗의 목을 베었습니다. 누구의 칼에 누가 죽은 것입니까? 자신의 칼에 자신이 죽은 것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큽니다. 내가 한 말에 내가 걸려드는 수가 있습니다. 말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한 짓에 내가 걸려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칼에 내가 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보기 좋게 승리합니다. 블레셋 군대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을 치고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군대를 뒤쫓아가면서 빼앗고 죽였습니다.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장 다윗이 이기니까 그 군인들은 구경만 하다가 이겼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대장 예수님과 죽음의 권세를 잡은 마귀가 싸우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마귀가 이긴 것 같았는데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마귀와 더불어 싸워 이기셨습니다. 이제는 죽음이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대장 예수님이 승리하므로 우리는 마귀와 더불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겨놓은 싸움만 싸우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삼상 17:45,47). 이 이상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같은 믿음을 찾지 못했고 사울왕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윗에게서 그 믿음을 보고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사울왕이 가져야 할 믿음과 사울왕이 했어야 할 일을 다윗이 한 것입니다. 매사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매사에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살며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어머니가 없으신 분계십니까? 다 계십니다. 세상을 떠나셨어도 어머니는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내 어머니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세상 태어날 때 어느 여자가 날 낳는가 하여 눈을 새까맣게 뜨고서 태어납니까? 그러다가 이 여자가 날 낳았으니 내 어머니다라고 합니까? 눈을 감고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어느 여자가 날 낳았는지도 모르게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여자에게 어머니라고 합니까? 병원에 가서 혈액형 검사를 했습니까? DNA검사를 했습니까? 병원에서 증명서를 받아서 어머니라고 부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이 여자가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나에게 젖 먹여주고 품에 안아주고 울면 달래주고 업어주고 키워주시니까 이 여자는 분명히 나의 어머니가 맞다고 경험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남자가 아버지라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어머니만 알지, 이 남자가 아버지인지, 저 남자가 아버지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말입니다. 병원에 가서 증명서를 받아들고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아버지를 증명할 길이 없으니까 믿지 못하겠다고 하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고 아버지로 생각지도 않으며 아버지로 섬기거나 모시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믿지도 섬기지도 않으면서 밖에 나가서는 착한 일, 의롭고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를 보고 저 남자는 우리 집에 왜 있느냐고 합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가 기뻐하겠습니까? 잘한다 하시겠습니까? 밖에 나가서 의롭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다음 문제입니다. 첫째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믿고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로 모시고 섬겨야 하지 않습니까?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제2차적입니다. 아버지라 부르면서 재롱을 떨고 사랑하며 위하고 모시며 섬기는 것이 얼마나 아버지의 큰 기쁨이 됩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참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살 동안 만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아버지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하늘나라에 가면 아버지는 하나님 뿐이요, 육신의 아버지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만 아버지이기에 육신의 아버지는 살 동안만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요, 참 아버지는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하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며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누가 뭐라고 해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매사에 믿음으로 사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둘째, 열성적인 사람 다윗 (시 69:9)
예수님께서 나이 서른 살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성전에 들어가시니 성전 마당에서 송아지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는 자들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성전 밖에서 쓰는 돈과 성전 안에서 쓰는 돈이 다르기 때문에 돈을 바꾸는 사람들도 한목 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은 성전 밖에서 해야 하는데 성전 뜰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모두 내쫓으며 왜 아버지의 집을 장사꾼의 집으로 만드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시니 그전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몽둥이를 들고 모두 내쫓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왜 강도의 굴혈을 만드느냐고 하셨습니다. 3년 전에는 장사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하시더니 이번에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악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왜 강도짓인 줄 아십니까?
유대사람들은 유월절만 되면 천리밖에 있는 사람들도 남자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옵니다. 심지어 외국에 사는 유대인 남자들도 유월절을 지키려고 오곤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유월절에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 양이나 소를 기릅니다. 그런데 멀리 사는 사람들은 천리를 끌고 올 수가 없으니 그것을 팔아 가지고 예루살렘 근방의 목장을 찾아가 좋은 송아지나 양을 사왔습니다. 장사꾼들이 여기에 착안하여 제사장들과 결탁을 하였습니다. 장사꾼들이 성전 뜰 안으로 들어와서 송아지와 양을 팔테니 아무리 비루먹은 송아지나 양일지라도 흠잡지 않기로 제사장들과 결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밖에서 사오는 양이나 송아지는 아무리 좋아도 흠을 잡아 거절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밖에서 아무리 좋은 송아지와 양을 사와도 제사장이 불합격을 시켰습니다. 할 수 없이 성전 뜰 안에 들어와서 송아지와 양을 삽니다. 그쯤 되면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만원짜리도 2만원 부르면 2만원 줘야 하고 3만원 부르면 3만원 줘야 하지 않습니까? 눈감을 때 코를 베어 가면 차라리 낫지만 눈을 뜨고 있는데 코를 베어 가는 형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도짓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떼돈을 벌어서 장사꾼들과 제사장이 나누어 먹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가만히 계십니까? 몽둥이를 들고 내쫓고 얼마나 야단을 치시는지 정신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때 사도요한이 시 69편 9절에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삼킨바 되었다 하더니 저런 경우로구나”라고 인용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이 바로 그 예수님을 가리켜 열심에 삼킨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지어내서 쓴 말이 아닙니다. 다윗의 시편 가운데서 한 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69편 9절을 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얼마나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그 열심에 삼킨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전을 왜 그렇게 사모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기 까닭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불같은 다윗의 그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찬양대가 연습하기 전에 연습할 찬양곡을 나누어주지 않습니까? 나누어주면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얼마나 실력이 쟁쟁한지 속으로 중얼중얼 두세 번 부르더니 당장에 잘 부릅니다. 연습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실력은 쟁쟁한데 연습시간에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나옵니다. 왜냐하면 실력 없는 사람들이나 연습하고 나는 한 두 번 정도 혼자서 불러보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독창은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해도 되지만 함께 음을 맞춰 찬양을 할 때에는 아무리 실력자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연습을 하고 맞춰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안나오고 싶으면 안나온다면 실력은 있는데 열심은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사람은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열심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 삼킨바 되어 불덩어리처럼 또는 정신나간 것처럼 열심 있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열심히 살고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며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또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장사를 해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당합니까? 예수님도 열심에 삼킨바 되었습니다. 열심 있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사랑하는 사람 다윗 (시 18:1)
제가 지금 누구하고 삽니까? 김기옥 사모님하고 삽니다. 그렇지요, 김기옥 사모하고 사는데 제가 그것을 왜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까? 나의 아내와 나는 촌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데 저는 제 아내와 촌수가 있습니다. 몇 촌인가 하면 사촌입니다. 왜 사촌이냐 하면 제가 열여덟 살에 혼자 피난을 내려와서 얼마나 외롭게 살았습니까? 그래서 아들 딸을 보기만 하면 너무 예뻤습니다.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쓰다듬어 주면 제 아내가 비키라고 야단합니다. 아빠가 아이 젖 먹는 모습을 쓰다듬어 주는데 왜 비키라고 합니까? 이것이 사촌이지 뭡니까? 물론 잠이 들려고 하는 아이가 깰까싶어서 비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는지 남편보다 더 사랑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신의 아내와 아들 딸보다 더 사랑합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본문 시편 18편 1절에 보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멋집니까? 베드로가 평생에 세 번의 신앙고백을 합니다.
첫째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는 베드로 이상의 전문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실패했습니다. 날고 뛰는 사람도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여러분들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 날 마침 베드로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실패한 날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실패했을 때 예수님을 만나면 절대로 손해보는 것도 아니고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거 하신 후에 갈릴리 바다에서는 밤중에 얕은 곳에서 고기를 잡지만 그 반대로 한낮에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생각할 때 턱이 없는 소리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하리이다 라며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고 건져 올렸더니 두 배에 꽉 찼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달려와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전에는 주님을 모르고 자신의 멋대로 살아온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자신의 멋대로 사는 것이 큰 죄입니다. 나는 죄인이라 고백할 때 예수님과의 인연이 생깁니다. 즉 관계가 맺어집니다. 주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 나는 죄 없다고 생각하며 내가 천국을 못 가면 세상에서 누가 천국에 가겠느냐고 얘기하는 자칭 의인은 주님께 소용이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고백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기본적입니다.
둘째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불러 제자를 삼고 얼마동안 가르치신 후에 전도하러 보냈습니다. 돌아온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때 거듭나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 못 얻습니다. 관계가 시작되는 것뿐입니다.
셋째로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받으시고 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입니다. 이 사명을 받지 못했다면 문제는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사명을 주고 직분을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목회자는 쓸데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장로는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자기 주장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권사는 문제가 많습니다.
맛있는 고구마를 구워서 먹고 있으면 냄새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 냄새를 맡은 원수처럼 지내는 앞집의 강아지가 앞에 와서 꼬리를 흔들고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힘을 다해서 강아지 배를 걷어차면 강아지가 죽는다고 도망을 갑니다. 사람을 미워하니까 그 집 강아지까지 미워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집에 사는 사랑하는 갑순이의 강아지가 와서 꼬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고구마 껍질만 벗겨 줍니까? 아니면 고구마를 뚝 잘라서 줍니까? 뚝 잘라서 줍니다. 갑순이를 사랑하니까 갑순이네 강아지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예수님의 양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그 양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못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그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이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것입니다.
결론을 짓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첫째는 믿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윗은 무엇이나 믿음으로 하였습니다. 매사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열심 있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꾼에게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없는 능력은 써먹지 못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삼킨바 된 다윗이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윗은 매사에 하나님 우선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즉 아내 미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김창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